경계를 넘어야 복음이 전파된다. / 행 7: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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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설교는 성전에 갇혀있던 신앙을 해방하여 복음이 전파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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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제사장, 장로, 서기관들 앞에 잡혀가서 말 한 내용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이 긴 설교의 일부분 만을 함께 읽었지만 본문이 말하는 메시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의 배경인 6장 후반부와 스데반의 설교가 나오는 7장 전체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6장의 후반부에는 이 사건의 배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6:8 부터 보니까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가 와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고 하자 여러지역에서 모인 유대인들이 스데반에게 찾아와 함께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해서 지혜롭게 이야기를 하니까 당해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행 6:12“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스데반이 당시 유대인의 성지인 예루살렘 성전과 또한 그들의 정신인 모세의 율법을 거스르고 부정하는 말을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그렇게 열을 내고 분노로 가득차서는 스데반을 잡아온 것입니다.
사실 스데반은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 뿐이었습니다.
행 6:14 절, “그의 말에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스데반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셨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한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왜 이 때에 이러한 말씀을 전했던 것일까요?
스데반이 순교하기 전 마지막으로 전한 이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새벽에 읽고 있는 이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누가는 사도행전과 함께 누가복음도 기록하였습니다. 이 두권의 책은 데오빌로에게 쓴 한 씨리즈로 같은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저자가 쓴 누가복음 어디에도 정작 이 스데반의 설교보다 자세하고 길게 기록된 예수님의 설교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틀어 이 스데반의 설교가 가장 긴 설교본문입니다.
물론 본문이 가장 길다고 해서 그 내용 또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자세하고 길게 기록된 본문을 통해 저자가 의도적으로 어떠한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자 한다는 것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포인트는 저자 누가가 이와 같이 본문을 구성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다. 왜 누가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의도적으로 자세하고 길게 기록하였는가? 그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또, 그 메시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율법에 메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전해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과 모세를 거의 동일하게 인식했습니다.
행 6:14 에서 스데반의 죄목을 이야기 할 때에도 보면 스데반이 ‘모세가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죄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제사장들과 장로, 서기관들 앞에서 우리가 읽은 이 모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봐라. 너희가 생명처럼 여기는 율법, 그 율법을 가져다준 모세를 봐라. 그 또한 하나님께 쓰임받은 도구에 불과했다. 모세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가 그 주인되신 하나님을 뒤로하고 모세와 그 율법을 하나님 앞에 두느냐’
스데반은 하나님과 율법을 거스른 것이 아니라 율법에 메여 하나님을 거스르는 유대인들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에 담긴 원래 하나님의 마음을 저버리고, 표면적으로 드러난 율법의 형식에만 치중한 유대인들을 깨우치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서의 많은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ex)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부터 마지막절까지 예수님의 이러한 설교가 계속해서 나오는데요, 제일 이해하기 쉬운 본문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5:38-39,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예수님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원래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을 잊어버리고 그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에만 집중하는 유대인들을 일깨우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구조를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제자들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장은 성령의 임하심을, 3장부터 6장까지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 복음이 전파됨을,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7장을 넘어 8장에서 사마리아에 복음이 증거되고,
9장 이후로부터는 땅끝을 향하여 복음이 증거되고 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과 유대에 충만했던 복음이 사마리아라는 이방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이방에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막고 있는 유대인들의 이 잘못된 율법 주의를 깰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방인들에게도 무리하게 할례받기를 요구하고 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기 힘드고 하니까 15장에 가서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들에게는 우상과 음행과 목메여 죽인 짐승을 먹는 것과 피 먹는 것 외에는 다 허락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까? 율법주의가 복음의 확장을 막고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가운데에도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형식과 전통에 얽매여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가장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뒤로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한다고 지켜왔던 여러 가지 신앙의 전통들이 처음 복음을 접하고 교회에 오시는 이들의 마음을 오히려 닫히게하고 그들의 교회를 향한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들이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주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보다 더 크고 중요한 규례와 규칙은 없습니다. 잘못된 율법 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무장되어 지역사회와 세상으로 복음이 확장되는 데에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내용은,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에 성지 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뻗어나가는 데에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성지의식이었습니다.
먼저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성지 의식이 있었습니다. 율법이 유대인들의 정신이라면 성전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에는 그들 중심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고, 그것을 둔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후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그들의 삶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시기에 그들은 타국에 포로로 잡혀가 있어서 힘든 것도 있었지만 그들의 성전이 파괴 된 것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포로기에서 귀환하였을 때 가장 먼저 성전을 먼저 재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그런 소중한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버리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니, 이 유대인들이 눈이 뒤집어 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지’라는 것이 있습니까? 성스러운 땅이라는 게 정말 있습니까? 우리가 성지 순례한다 뭐 그런 표현들을 하는데, 정말 그 땅이 성스러운 곳입니까?
ex)좀 더 직접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하는 이 예배당, 영세교회 예배당이 성스러운 곳입니까?
성스러운 곳, 성스러운 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땅이 성스러운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성지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예배당이 성지가 아니라 우리가 예배하는 자리,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자리가 성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성지 의식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를 못했습니다. 전통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성지의식 때문에, 그리고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뭐,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라는 성지의식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 보면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두 번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첫 번째 구원자 요셉, 그리고 세 번째는 오늘 읽은, 이스라엘의 세 번째 구원자 모세입니다.
스데반의 설교의 요지가 뭐냐하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곳이 어디냐, 이스라엘, 이 땅이 아니었다. 이 땅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또한 늘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고 기록된 요셉, 하나님이 그와 함께 했던 곳이 어디였냐, 예루살렘과 유다였냐. 아니다. 이방 땅 애굽이었다.
마지막으로, 광야 교회에서 늘 하나님을 경험하였던 모세, 그는 어디서 하나님을 경험하였는가. 예루살렘이나 유다였는가. 아니다 바로 광야였다. 모세는 이 땅에 발도 들이지 못했었다.
그러므로 너희의 성지의식을 버려라. 이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 바로 그곳이 성지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 생활을 오래하다보면, 우리도 이러한 성지의식에 빠지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성지 의식은

첫째 이중적인 신앙 생활을 낳습니다.

교회가 성지가 되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교회가 성지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가 성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가정, 직장, 학교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곳이 성지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잘못된 성지 의식은 사도행전의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복음이 확장 되는 것을 막습니다.

이전까지 우리의 전도 전략은 무조건 교회로 사람들을 끌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데려오고 나서 그 다음을 고민하는 식의 선교 전략이 그동안의 일반적인 교회의 전도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서구 사회를 시작으로 이러한 전도의 흐름은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을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선교사가 되어서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제자를 만들고 그 곳을 하나님의 교회가 되게 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예배당을 성지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가 아니라 그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이 임하시는 자리가 성지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그 곳을 성지로 바꾸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교회가 땅끝으로 뻗어져 나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스데반의 긴 설교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첫째, 율법과 전통과 규칙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다른 곳이 성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임하시는 자리가 성지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마음에 품고 삶으로 살아내어 사도행전의 제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확장되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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