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기쁨이고 자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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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9–10 | 이제는 기쁨이고 자랑입니다.
이 자리에 서는 것은 매우 떨립니다.
왜 떨릴까요?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주신 메시지를 여러분에게 잘 전달해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도 그럴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지금 여러분들이 저를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의 작은 행동 하나 하나 보고 계신다고 생각이 드니 떨리죠. 여러분 제가 떨린다고 해서 굳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온라인 어린이 예배를 준비할 때도 떨립니다. 어린이 예배를 준비할 때에는 지금처럼 여러분들이 있는 것이 아닌 카메라 밖에 없음에도 말이죠.
그럼 정말로 왜 떨릴까요?
떨리는 이유는 저의 약함/부족함이 너무나도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을 조리 있게 못 합니다 . 그리고 신학/성경 지식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다 열거할 수 없지만 그 밖에도 저의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저의 연약함을 느끼면서 말이죠.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때부터 고민하고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주님께 물어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을 떠올리며 기도하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며 준비하고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면 저는 뿌듯해 할 겁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준비했고 서 있기 때문에 저의 약하고 부족함이 이제는 더 이상 약함이 되지 못하고 부족함이 되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연약한 제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설교나 예배 인도를 할 때만 저의 약함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갈 때에도 수 없이 느낍니다. 여러분들도 경험하고 계시죠.
여러분들은 그때 무엇을 하십니까? 여러분의 약함을 숨기십니까? 아니면 그러려니 하며 계십니까? 혹은 와신상담하며 실력을 기르십니까?
제가 초등학교 3학년 일때 선생님께서 조를 짜주지 않고 학생 스스로 조 부터 만들어하는 조별 과제를 주셨습니다. 저는 워낙 소심하기에 어쩔 줄 모르고 누가 불러주면 가야 겠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기가 많은 학생이 아님에도 희안하게 2개의 조에서 저와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나 낯설기에 저는 어찌할바를 몰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2개의 조에서 저와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버린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이 분한 감정을 내색하지 못하고 내가 기필코 점수로 너희들을 눌러주리라 하는 마음을 가지며 준비했습니다. 결과는 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분은 좋았지만 거기까지 였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 고백과 같이 기쁜 마음으로 저의 약점을 자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어린 자녀들은 자신이 못 하는 것이라도 부모가 해줬으면 친구들에게 가서 “이거 아빠가 해줬다.”, “엄마가 해줬다”고 기뻐하며 자랑을 하는데, 제 마음에는 그런 기쁨 조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또 나를 무시하면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밟아주리라 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이 있으면 삶이 기쁘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예수님을 믿어서 내 삶이 기쁘다고 결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도 우리 안에 나의 약함을 자랑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그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마치 생명보험 하나 들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생명보험은 내가 죽어서야 혜택을 받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살아있을 때에는 힘겹게 어쩔 수 없이 예수 생명보험이라는 것을 붓다가 죽고 난 뒤 천국행으로 혜택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걸까요?
제가 신학교에 등록 하기 직전 하나님께서 저의 약함을 자랑 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집은 예수를 믿는 가정이라고 하는데 왜 우리 집은 전쟁터와 같을까?’ 하는 원망이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마다 전쟁이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 혹은 뭔가가 날라다니고, 깨지고, 무서워하며 있어야 할까? 심지어는 집에서 찬양을 부르고 있는데도 아버지의 화가 어머니, 저, 누나에게 덮쳤습니다. 저희 집의 가훈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입니다. 저희 집 상황을 보면 이 가훈은 너무나도 모순적인 가훈이었고,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여러 약함들 중에 하나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싫었고 미웠습니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내가 얼른 어른이 되어서 실력을 키워 당하고만 있지 않을꺼야 하는 마음이 있었지. 하나님 제게 아버지를 주셔서 감사해요. 라는 것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도 여럿 날처럼 아버지께서 기분이 많이 안 좋으셨습니다. 하필 그날은 제가 신학교에 등록을 해야 하는 사실을 알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날까지 등록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저의 진로에 대해서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보기에는 제가 고등학교는 조리학교로 진학을 했으니 관련 계통으로 공부를 하던,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잠시 제가 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준비하다가, 이제 와서는 신학교에 간다고 하니 아버지로서는 큰 염려가 되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날은 그런 아버지의 염려를 느끼며 감사하며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가만히 있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것과 지난 일들을 언급하며 하지 말아야 할 말 “아버지가 우리에게 뭘 해줬습니까?” 라는 말까지 내뱉으며 아버지와 맞서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런 아들 필요없다 죽이겠다 하며 밭에 뒀던 공기총을 가지려 집을 나가셨고, 저는 이런 상황이 된 것에 원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원망했던 것은 저는 하나님이 아버지보다 저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버지와 달리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신학교에 간다고 하니깐요. 그러나 그날까지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왜 너는 내 사랑하는 네 아버지를 아프게 했냐며 오히려 저를 나무라시는 겁니다. 너무나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주시는 마음은 하나님은 저의 아버지가 육체적으로는 강한 자일 수 있으나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으니 강한자가 아닌 약한 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이니 오히려 제가 강한 자라는 겁니다. 이것으로 저는 하나님께 그리고 아버지께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송함으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잠시 후 공기총을 가지려 나가신 아버지는 집으로 다시 돌아오셨고 제 방문을 여셨습니다. 제 방문을 연 아버지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아버지도 울고 계셨습니다. 그 아버지를 본 저는 잠깐이나마 이제 마지막 작별위해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고 계신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미안하다 하며 저를 안아주시고 저도 죄송해요. 하며 극적인 해피엔딩으로 끝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화는 그 후에도 계속 있어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지만, 저는 전과 달리 가훈이 모순적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 지를 깨달았고 저도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뭔가가 날아다니는 상황에도 아버지를 안으며 사랑해요 라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아버지가 저의 약함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숨기거나 외면하는 것, 분노하는 것이 아닌 자랑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이 나의 연약함을 원래 그런가 하며 우울해 하거나 합리화나 정당화를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뻔뻔해지라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나의 약함을 강함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숨기거나 감추고 싶은 것들이 우리 자신을 지배하여 우리가 슬퍼하거나 분노하며 살길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길 원합니다.
어느 자산운용 기업 대표가 부자란 “내가 돈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 말합니다. 이어 “내가 돈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고 돈이 많은 걸 알아보게 하기 위해 비싼 금시계를 사고 그런 사람들은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나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약함에서 도리어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나의 컴플렉스를 감추고 살겠습니까?
요한복음 8장 32절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약함은 제각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함에도 우리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약함은 자신의 몸의 질병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에 이 약점이 얼마나 신경쓰였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로 모릅니다. 너나 잘해라! 네 몸이나 간수 해라! 라고 말이죠. 그래서 3번 기도 했다고 합니다. 왜 3번만 기도했을까요? 10, 20번은 안 하고 말이죠. 기도 3번 만에 사도바울은 이 질병으로 자신의 육체에 거하는 그 어떤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 기도했을 것이고 결코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없었을 겁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몸은 여전히 불편했을 겁니다. 그러나 자신이 불행하다고는 여기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깐요.
사도 바울은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으니깐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고쳐달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기뻐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약함을 사도 바울처럼 자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을 무엇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고린도 교회 공동체는 자신의 재능, 능력들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 공동체는 문제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서로 자기가 잘 났다고 하니 잘 될 수가 없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세상 다른 공동체보다 더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편지를 써서 고린도 교회에 보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읽은 말씀처럼 자랑한다면 이제 우리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한 기도나 자녀가 잘 되길 위한 기도에 머무르지 않게 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원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한 지혜를 달라고 했던 것에 하나님은 너무나도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가 하나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기쁘게 하는 기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제는 나의 컴플렉스가 나의 약함, 나의 결핍이 나를 움추리게 하거나 분노하게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임을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아! 그렇구나 하고 믿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머물게 됩니다. 9절 말씀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아멘!
(바울이 받았던 은혜는 무엇이기에 이렇게 자랑할 수 있는 원동력되었을까요?)
바울이 이 말씀을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호의, 바로 은혜를 그저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다면, 바울은 자기 스스로 세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는 것은 기쁘지 않습니다.
한국 국적의 남성이라면 병역을 이행해야 합니다. 제가 훈련소로 갈 때에 군대에 왜 가야하는 이유를 머리로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제 군 생활이 기뻐졌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럼 군대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기쁠까요? 하라는 대로 해봤습니다. 훈련을 하라고 하는 대로 해서 그 후유증으로 왼쪽 어깨가 1주일 가까이 움직이지 못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왼쪽 어깨는 교통사고로 부서져서 여러 개의 핀으로 고정했었습니다. 즐겁게 해보려고 했지만 제 마음에는 오히려 복잡하고 참담한 심정만 쌓여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저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서 열심히 교회생활하는 사람에게는 9절 말씀과 같은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머리로만 잘 이해하는 것은 전혀 힘이 되지 못합니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자기의 삶이 그리스도의 능력에 머무는 삶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잠깐 마음이 감동이 되어서 했던 말이 아닙니다.
구급차, 구급서, 엄마 까투리
이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군 생활을 시작 하고 있을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로 부터 온 편지로 통해 힘들어 하는 당신의 아들이 군 생활을 기쁘게 하길 원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 부모님의 심정을 깨닫게 되니 부모님이 비록 물리적으로 내 옆에 계시지는 않지만, 그 심정을 떠올릴 때마다 마치 지금 내 옆에서 나와 함께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깐 군대에서 상도 주더라고요. 훈련소 때부터 제대할 때까지 모범상을 여러 차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제가 군대 체질이라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고, 또한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보았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럼 바울은 주님 때문에 얼마나 울었을까요? 얼마나 웃었을까요?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그럼 여러분들은 얼마나 주님 때문에 울었습니까? 얼마나 웃었습니까? 기뻐했습니까? 감사했습니까? 힘들었습니까?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여 이제 우리의 약함이 기쁨이고 자랑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