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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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views[평형 깨기] 정말로 나는 영원히 사는가? 혹시 그렇지 못한 것은 아닐까? [갈등 심화] 교회당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역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의 떡 [복음 경험]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신 예수님 [비전 제시] 생명의 떡을 먹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세요!
Notes
Transcript
[평형 깨기] 정말로 나는 영원히 사는가? 혹시 그렇지 못한 것은 아닐까?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아시죠? 그의 작품 중에서 제일 유명하고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이 바로 ‘햄릿’입니다. 여러분 혹시 햄릿의 명대사를 기억하시나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던 주인공 햄릿의 대사이죠. 잔인한 운명을 참고 견디며 사는 것이 숭고한지, 아니면 고통에 맞서 싸우다 죽는 것이 숭고한지 고뇌하면서 뱉은 말입니다. 결국 햄릿은 알 수 없는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이 세상에 남아서 괴로움을 참고 견디기로 마음먹죠. 자 그럼 여기서 여러분께 한 번 여쭙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인가요?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별로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네, 좋습니다.
그런데 햄릿과 우리 사이에 아주 큰 차이점이 하나 있죠. 그게 무엇일까요? 햄릿은 사후세계를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하죠.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꿀 수 있을 만큼 큰 차이입니다. 물론 우리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하지만 적어도 죽은 후에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몰라 불안해하는, 햄릿의 두려움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통계에 따르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비기독교인들보다 기독교인들에게서 더 높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구원 받으면 천국 가고, 천국가면 영생한다는 믿음이 있어서죠.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데 관심을 둡니다. 죽음과 영생 문제는 이미 해결됐으니, 이젠 땅 위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죠. 그런데요 여러분, 우리의 주된 관심이 온통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다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영생을 알고 모르는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삶에는 별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햄릿과 달리 천국영생을 분명하게 알고 계신가요? 과연 영생은, 우리 모두에게 따 놓은 당상일까요?
오늘 본문 다섯 절은 모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죠.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만나를 내려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옛날에 모세가 광야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들에게는 만나의 기적이 메시아로 인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은 기적을 행해달라고 요구합니다(요6:31,34). 그런데 이런 요구에 예수님은 49절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문자 그대로입니다. 만나가 육신적인 배고픔은 해결해 주었을지 몰라도 죽음을 막아주지는 못했다는 말이죠.
잠시 그 장면으로 돌아가 볼까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먹을 양식이 없어서 배를 주립니다. 그러자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하죠. 하나님을 원망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애굽 땅에서 배불리 먹던 시절을 언급하면서 조금 돌려 말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요지는 결국 먹을 것을 내놓으라는 말이죠. 종살이로부터 해방된 기쁨도 배고픔 앞에선 까마득하게 잊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메추라기와 함께 공급하신 것이 만나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매일같이 만나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만나를 먹었던 자들도 결국엔 다 죽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만나는, 육신의 필요만을 일시적으로 충족시켰을 뿐입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3500년 가까이 지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떨까요? 여전히 변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것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그 말씀(고전10:31)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먹는 것 자체가 목적인지, 하나님의 영광, 그분과의 사귐이 목적인지 말이죠. 광야 이스라엘 백성처럼 주구장창 육신의 필요만을 구합니다.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혹여나 간구대로 채워주시면, 그냥 그것에 만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아무리 육신의 만족을 누려도 결국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말이죠. 음식은, 육신적인 필요들은 여전히 인간의 삶과 죽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그 옛날 만나가 그랬던 것처럼요.
[갈등 심화] 교회당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그렇다면 나는?
여러분,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중에서도 여전히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이 대화에 앞서,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5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바구니가 남았던 기적이지요. 이 기적을 보고 흥분한 무리들은 집에도 가지 않고 벳새다 부근에서 하룻밤을 지냅니다. 이튿날엔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나죠. 여러 척의 배들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이 때 예수님을 찾은 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을까요? 순수한 목적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고자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십니다(6:26). 기적을 봤으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아야 마땅하지요. 하지만 그들은 기적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으로 인해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기적은 보지 못하고 떡만 보는 기형적인 눈먼 자들이죠.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한 자들입니다(6:27). 매일 먹어도 소화돼서 또다시 먹어야만 하는 그런 양식이죠. 육에 속한 사람이 추구하는 세상적인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만나를 먹고도 죽었던 조상들처럼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볼까요? 적어도 세상 사람들 눈에는 교회당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 보일 겁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중에 육신의 만족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없습니까? 당장은 모두가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조금만 더 신중하게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내 배를 채우고 혀를 만족시키는 음식과, 그것을 사기 위해 필요한 돈과 같은, 육신의 필요만을 간절히 구하진 않나요? 너무 그런 것들에 관심이 집중돼있진 않습니까?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6:25).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목숨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목숨을 위해 먹을 것을 주시지 않겠냐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목숨, 즉 생명에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미련하게도 우리는 음식을 포함한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 온통 주의를 거기에 기울이죠.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비록 교회당 안에 있지만 여기에서 죽어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잘 아시듯이,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죄로 인한 결과이지요. 첫 사람 아담의 죄는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전가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죄에 물든 상태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두에게 사망이 들어왔습니다(롬5:12). 세상 모든 이가 맞닥뜨리는 이 죽음 앞에서, 만나는, 음식은, 썩을 양식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의 떡
그런데요 여러분! 여기 아주 특별한 양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생명의 떡입니다. 생명의 떡, 무슨 떡일까요? 50절에 보면 그 떡은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 그런 떡입니다. 만나를 먹은 조상들도 다 죽었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다 죽는데,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대체 누가 주는 떡이길래 죽음도 막아줄까요? 32절과 33절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주시는 떡이요 “하나님의 떡”입니다. 그렇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그 떡의 출처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막아주는 것도 가능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48절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51절에는, “나는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맞습니다. 만나로도, 음식으로도 해결할 수 없던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하나님께서 생명의 떡을 내려주셨습니다.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생명의 떡을 말이죠. 그 떡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 경험]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신 예수님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떡을 먹어야 영원히 삽니다! 그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영생을 줄 수 있을까요? 먼저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입니다(51절).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초월적인 거처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은 지금, 내가 하나님 계신 곳으로부터 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죠. 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신 분입니다(1:18). 하늘의 일들을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지요(3:11-13). 나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14:24), 나의 행함이 곧 하나님의 행하심(5:19)이라는 것을 지금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이 되어 사람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이십니다(1:14).
다음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살입니다(51절). 세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구원을 선물하였습니다. 즉 여기 세상은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나의 살”이란 말은,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이 자신의 살을 십자가에 내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살을 주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하지요. 죽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죽어서 죄인들에게 당신의 살을 주시려고요.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살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희생은 자발적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은 죄인들의 죽음을 대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희생은 대속적입니다. 우리 모든 죄인들의 잃어버린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맞바꾸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기에 죄인에게 영생을 줄 수 있습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줄인 표현이지요. 영원한 생명, 무엇을 뜻할까요? 그저 이 땅 위에서 우리의 목숨을 유지하며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모두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실 수도 있겠죠. “그런데 모든 사람은 죽잖아요”라고 말입니다. 육체적으로 당장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내가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6:40). 육체적으로는 죽을지 몰라도,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에 결국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고 영원히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생명은 나중에 내세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47절에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원문에 현재시제로 기록되었습니다. 영생을 가질 것이다가 아니라,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무슨 뜻일까요? 지금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선물을 이 땅에서 이미 받아서 구원을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죠. 사도 요한은 영생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17:3).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깊은 사귐을 누리는 것이 영생의 본질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뿐만 아니라, 지금부터 계속 삼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누가 가질 수 있을까요? 51절에,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말씀합니다. 50절에도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떡을 먹는 자가 영원히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먹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의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많은 성경구절들이 그것을 증명하지요. 당장 오늘 본문 첫 절인 47절만 봐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비전 제시] 생명의 떡을 먹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세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세요! 이게 오늘 제가 전하는 말씀의 핵심이자, 전부입니다. 조금 이상하게 여기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전도사님! 우린 이미 예수님 믿었는데요?” 네! 그런데 제가 아주 조금 염려가 돼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서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속하지 못하고, 교회당 안에만 머무는 자들이 한국교회에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교회당 안에 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 죽어가는 것이죠. 그래서 아주 기초적인 이 복음을 여러분께 전해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을 하나님이 제게 주셨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비단 교회당 바깥에 있는 자들뿐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깊이 사귀고 계신가요? 혹시 살면서 당장 필요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 갈망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나의 주린 배를 채우는데 급급하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떳떳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6:35). 그렇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도 당연히 충족시켜 주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도 분명히 보여주셨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14:17). 그러니 음식에 집착하지 마시고, 이 땅 위의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고,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누리는 데 모든 관심을 쏟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생명을 얻은 자들의 삶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는 자들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터에 가서 돈을 버는 것보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더 사모하세요. 기도할 때 나의 필요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구하세요. 세상 가요를 듣고 흥얼거리는 시간보다 주님을 찬송하는 시간을 더 기뻐하세요.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까요? 네, 답을 이미 다 알고 계시잖아요. 신구약 66권 말씀뿐이죠. 말씀을 늘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그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함으로써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다 아는 말씀이라고 시시하게 생각하고 넘기지 마세요. 그 말씀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았다고 자신하며 세상 것에 눈을 돌리는 것보다, 평생 기초적인 복음을 붙들고 내 신앙을 점검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구원의 확신을 안겨줄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해서 세워주셨습니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그분의 의가 새로운 삶을 열어주고 그분의 거룩이 계속 변화시킵니다. 오직 예수님만 붙들고 의지하며 바라보세요. 그분께서 다 하셨고, 다 하고 계시며, 다 하실 것입니다. 우리 초원교회당에 모이는 모두가 예수님을 분명하게 믿고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서부터 누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