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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장 11-19절_ 감사한 한 사람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지키는 3대 절기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3대 절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첫째는 유월절입니다.
고난과 박해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양의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장자의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한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둘째는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의 제 2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며,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로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생활을 할 때 나뭇가지와 풀잎으로 초막을 짓고 살던 것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또한 초막절은 추수한 곡식을 창고에 저장해 놓기에 수장절이라고도 하며, 이 초막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 복을 주신 것을 감사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추수감사주일”은 추수한 곡식을 창고해 저장해 놓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점에서 보통“초막절”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그 이면의 이미는 3대 절기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절기를 지키는 이유는“감사”의 진정한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한 사건을 통해 진정한 감사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에는“문둥병”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민수기에는 모세를 비방했다가, 문둥병에 걸린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나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에는 문둥병에 걸렸다가 고침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는 문둥병과 관련된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문둥병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문둥병이 인류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병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이 문둥병을“한센병”이라고 부르며, 아직도 이 병은 인류에 남아 있습니다.
이 병은 나균에 감염되어 피부에 반점이 생기고 짙어지면서 피부가 곪고 썩게 되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성경시대에는 문둥병을 다른 피부병과 구별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둥병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피부병을 문둥병으로 간주했습니다.
아마도 현대의학이라면, 쉽게 치료될 수 있는 피부병의 환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둥병이라 불리는 병의 증상이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기도 하고, 전염성이 있어서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격리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성 밖으로 나가서 그들끼리 따로 모여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 병은 마을과 민족 국가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이렇게 격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문둥병 환자들도 평소에는 마을에 들어와서 생활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양식이 필요할 때만 어쩔 수 없이 마을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들어올 때에도 율법에 따라 멀찍이서‘나는 부정하다!’라고 외쳐야만 했고, 사람과의 접촉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계셨습니다.
그 길을 지나가시다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위치한 한 마을로 들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 곁에는 열 명의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예수님이 그 마을에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예수님은 무슨 병이든지 못 고치는 질병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가까운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꼭 만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자신들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부탁 드려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황급히 예수님이 머물러 계시는 마을로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예수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께 부르짖었지만,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간절히 고침 받기를 원했고, 예수님이라면 자신들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침을 들으신 후,“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문둥병 환자가 낫게 되면, 완치 되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의 내용입니다.
즉, 문둥병의 확증과 완치는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둥병 환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이미 깨끗하게 치유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기적적으로 문둥병에서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 명의 문둥병 환자 중에서 단 한 사람만 예수님에게 돌아와 고침 받음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를 보시고“열 사람이 다 고침 받지 아니하였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다시 돌아와 감사한 한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와 감사한 이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돌아와 감사한 한 사람”을 칭찬하셨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제자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유대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편견을 가지고 낮추어 보았을 뿐 아니라, 이방인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9명의 유대인이 아니라, 1명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실 앞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문둥병에서 낫게 된 것을 발견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영광을 돌렸다는 말”은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과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말은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가장 깊은 차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함은 감사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히브리어“야다”라는 단어는“감사”와“찬양”둘 다의 의미를 가지고 구약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영광과 감사, 즉 찬양과 감사는 믿음을 표현하는 기본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는 찬송은 단순히 형식적인 모습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에서 치료받고 돌아와 감사한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진정한 감사를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인이 문둥병에서 치료를 받았기에 이런 감사를 드림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감사하러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들의 모습들을 되돌아보면, 본문의 한 사람, 사마리아인처럼 찬송하고 감사를 드리는 모습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모습을 조금만 되돌아보면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족이 더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만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평이 쉽게 나오기도 합니다.
불평과 불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마음에는 감사가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조건이 채워지면 행복할 수 있고, 감사한 생활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은 원하는 장난감을 생일선물로 받으면, 감사하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원하는 선물이 생기면 처음에는 행복해 하고 감사하지만 그 감사는 계속 지속되지 못합니다.
조금 후에는 더 좋은 장난감을 가진 친구들을 보면 그것을 부러워하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좋은 점수, 좋은 대학만을 소망하며 기도하지만, 소망이 이루어져도 그 감사는 지속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모습입니다.
아이들과 학생들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직장, 결혼, 자녀들 문제, 주택, 부유함과 명예 등등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소망하며 기도하지만, 그것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감사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또한 감사의 결과와 이유를 주신 감사의 대상을 쉽게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까지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또 하나의 도구로 삼기도 합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문둥병이 낫게 되는 큰 이적이 일어나면 정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잠깐 감사할 수는 있으나, 다시 불평과 불만족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아홉 명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보름 전쯤에 이런 이야기를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출산할 때 그 목사님이 분만실에 함께 들어갔는데, 아이가 출산되자 간호사가 그 아이의 손가락 발가락을 그 목사님과 함께 세도록 했다고 합니다.
하나, 하나 손가락과 발가락을 세는 데 그때처럼 떨리고 긴장된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정상인 것이 확인될 때,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 감사가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때처럼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 적도 없었던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걷고, 말을 하기 시작할 때가 되었을 때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어지자 불안함과 함께, “왜 우리 아이만 이렇게 늦게 발달 되느냐?”고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 불평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감사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작은 것조차도 쉽게 불평하기 쉬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감사는 어떤 모습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감사의 삶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감사한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를 통해 그 본질과 근본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16절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하기 위해 예수님께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엎드린 다는 것”은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적인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고 경험했기에, 이렇게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 외의 모든 대상을 상대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리에 바로“자기자신”을 올려놓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를 바닥에 낮추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시고,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깨달았기에 자신을 그분께 낮추어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은 찬양과 감사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죄 많은 한 여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뜨려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와 그 행동을 인정하시는 예수님을 함께 묶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용서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 말씀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하신 것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죄 많은 여인의 믿음은 단순히 즉흥적으로 감사를 드렸다거나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한 없이 낮출 수 있는 절대대상이신 하나님을 만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참된 감사의 마음이 가능하고 참된 찬양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들이 경험한 삶은 하나님과 관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서 내 중심에 있어야 할 하나님을 밀어낸다면 메마른 심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한 때 하나님을 생명과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였더라도, 세상살이에 살다가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 가게 되었다면 삶은 허무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쉽게 잃게 되고 오히려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이 믿음은 한 순간의 경험과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붙들고 나아가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생명과 삶의 주인으로 인정해야 하는 계속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는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의 신을 벗은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의 성품을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발아래 엎드린다는 것은 절대 순종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초이고,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때 우리의 감사는 지속될 것이고,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절대순종의 믿음을 가지고, 진정한 감사와 찬양의 삶으로 들어가는 저와 모든 가나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