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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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도입]

혹시 어딘가를 가다가 길을 잃어본 적이 있습니까? 모두 한두 번쯤은 길을 잃은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갈 곳을 알지 못해 이리저리 해매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던 경험들. 다시 그때를 생각해보면 참, 난감하지 않나요? 가야할 목적지는 분명한데,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는 당황스러운 상황.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거나, 지도와 나침반을 사용해도 되겠지요. 요즘 같으면, 핸드폰이나 내비게이션을 사용해 더 손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길을 잃었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제로 몇 년 전, 해외에서 아버지와 등산을 하던 한 9살 된 남자아이가 홀로 길을 잃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홀로 산에서 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어른이 감당하기에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9살 된 어린아이가 그 두려움과 공포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염려했던 모두를 놀라게 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 날 9살 된 그 아이는 멀쩡한 모습으로 산 아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힘든 시간을 이겨냈니?’ 아이는 평소 아빠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기억했고, 또 그대로 행동했다고 말합니다. 첫째, 산속에서 길을 잃으면 절대로 잠이 들어서는 안 된다. 둘째, 물이 흐르는 계곡을 찾아라. 마지막 세 번째로 그 계곡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가라. 그러면 반드시 마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아이가 아빠에게 들었던 생존법칙입니다. 만약 이 아이가 평소 아빠의 말을 흘려들었더라면, 그래서 그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 아이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코로나라는 작은 바이러스는 우리로 하여금 갈 길을 잃게 하였습니다. 세상은 지금 길을 찾지 못한 채, 혼돈 속에 있습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혼란의 시대에 교회가 소망이 되고 빛이 되면 좋았을 텐데, 교회가 교회다움을 상실해버렸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마치 길이 보이지 않는 광야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도무지 그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세상에서 진리로 가는 그 유일한 길이 되라는 말입니다. 만약 진리로 인도하는 그 길이 되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되지 못하면 길가에 버려진 소금처럼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그 잃어버린 길을 찾아야 할까요?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요?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과 능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사탄의 시험을 감당하십니다. 이 연약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 길을 일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강해]

본문 1절을 보면,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바로 그 때가 지나고 나서 예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에’라는 단어는 바로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우리의 시선을 인도합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시기 바로 전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그곳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그 장소에 삼위 하나님이 다 같이 등장하십니다. 성경에 몇 번 기록되지 않은 매우 특별한 장면입니다. 그 세례 장소에 삼위 하나님께서 모두 등장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공식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십니다. 그 금식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험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그 시험하는 자 곧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시작합니다. 3절을 보면,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3절)
40일간의 금식을 마친 예수님께 닥친 첫 번째 테스트입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이 떡이 되게 하여 그것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시험하는 이 사탄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든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험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탄의 요구대로 정말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셨다면, 어떤 결과가 주어졌을까요? 정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증명됐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능력을 행함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 돌을 떡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이처럼 사탄은 지극히 간교하면서도 세상 적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다운 힘과 능력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굶주림에 있었던 예수님의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40일을 금식하고 나면, 어떨까요? 사탄이 요구하지 않아도 돌을 떡으로 바꾸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결코 만만치 않은 시험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절)
예수님은 사탄의 간교한 시험에 당황치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사탄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능력을 철저히 감추십니다. 그리고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시험을 감당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사탄의 시험에 맞서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물러설 사탄이 아닙니다. 사탄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채 곧바로 두 번째 시험을 진행 합니다.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6절)
예수님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응하시자, 사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 시험합니다. ‘좋다, 그럼 여기서 뛰어내려봐, 성경에 기록되어 있잖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손으로 네 발을 받들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할 거야.’ 사탄의 두 번째 시험은 더 만만치 않습니다. 이 사탄의 시험에는 보이지 않는 올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을 하든지 기록된 말씀을 부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시험하는 이 사탄의 처세술이 감탄스러울 정도입니다. 이와 유사한 장면이 태초에 에덴동산에서도 있었습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결국 선악과를 따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접근법이 매유 교묘합니다. 창세기 3장 1절을 보면,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하와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더냐.’ 하와 또한 너무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반대로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와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됩니다. 사탄의 덫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이지요. 이처럼 사탄은 간교한 존재입니다. 결코 만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보란 듯이 기록된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러자 이번에 사탄은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이것을 다 줄 테니, 자신에게 절을 하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덫에 걸리지 않으니 작전을 바꾼 것입니다. 만왕의 왕다운 대우를 해줄 테니, 자신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그러나 이 또한 예수님께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어떻게 증명됩니까? 기록된 말씀대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증명됩니다. 기록된 말씀대로,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므로 세상 짐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므로 에덴의 실패를 다시 회복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건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예수님의 선전포고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보란 듯이 기록된 하나님 말씀들을 하나하나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의 참된 시험은 언제 닥칠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갈 길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큰 환란과 어려움을 만나도 가야할 길이 분명하다면, 그 시험은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이겨낼 수 있는 역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고, 그 말씀을 확실히 붙잡고 있다면 인생은 절대로 실패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시라.’ 풀과 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영광과 아름다움 아닙니까? 이 모든 세상의 영광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토록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합니까?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하나님 말씀의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말씀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없다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길 잃은 인생처럼, 가야 할 곳이 어디인줄도 모른 채 길을 걷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왜 일까요? 사람은 마음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곧 마음의 결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 판에 매일 말씀을 새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죽은 신앙입니다. 마치 살아 움직이나 생명이 없는 좀비처럼 말이지요.
얼마 전 다산의 정약용 선생의 ‘마지막 공부’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이 같은 분을 찾기 힘들 정도로 참으로 대단한 분입니다. 시대를 잘 못 타고 태어난 안타까움은 있지만, 만약 이분이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알았더라면 칼빈 선생의 기독교강요를 넘는 작품이 나왔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인생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깁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결국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학문의 끝이자 결론입니다.’ 학문의 끝은 결국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말이겠지요.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죄악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리라.’(막 7:21-23)
사람의 마음만큼 더러운 것이 없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은 악한 생각들뿐입니다. 죄로 더렵혀진 우리의 심령에서 선한 것이 하나도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각 사람의 마음을 다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세상은 아마도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깨끗한 척, 거룩한 척 하지만 씻을 수 없는 죄악들이 우리 안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교리적 언어로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고 합니다. 칼 빈 선생은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죄 받을 일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죄로 타락된 인간의 정죄는 영원한 고통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죄의 결과 우리는 모두 멸망의 길을 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지혜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없이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의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하신 사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씀을 직역하면, ‘말씀이 육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뜻이 됩니다. 이 세상을 회복하시고, 죄로 가득한 인생에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말씀이신 예수님이 장막을 치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그 진 가운데 성막에 임재하는 하나님을 본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예수님은 하늘 영광 버리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수단입니다. 특별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인의 생존 비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죄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성육신 하신 말씀, 예수님은 오늘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갈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심으로 그것을 증명하셨습니다.
만약 오늘 내 삶 가운데 이 말씀이 없다면, 이 말씀이 없이도 혹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히브리서 4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하나님은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그리고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말씀이 나의 생각을 다스리고, 나의 마음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능력이 어떤 상황을 해결해 준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문제와 위기는 말씀의 왜곡에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히 왜곡해 예수님을 미혹합니다. 그 거짓의 영을 어떻게 분별하시겠습니까? 이 시대에 복음의 변질과 말씀을 왜곡시킨 대표적인 것들은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론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예수 믿고 이 땅에서 잘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지금도 교회는 그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교묘한 왜곡이 있습니다. 구원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이라는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왜곡 때문에 삶이 없는 그리스도인 많습니다. 미국 대선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성경에 손을 얻고, 기도하는 데 성도의 삶이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구원은 우리의 신분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제 의인이 된 구원받은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고 힘쓰는 삶을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리라.’(요10:27)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의 순종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100%의 순종을 할 수도, 해내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해 예수님께서 그 말씀에 완전한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속박하거나, 억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우리가 그 진리의 말씀 안에 있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결론]

여기 제 손안에 든 작은 성경이 보이십니까? 이 성경은 북한의 성도들이 보는 성경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소유만 해도 처벌을 받습니다. 금지된 성경을 본다는 것은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이 안에 구원으로 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자신의 안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택합니다. 그 말씀이 핍박과 환란을 이겨내게 합니다. 그러한 은혜가 이제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그 말씀의 진리 안에서 날마다 자유를 누리길 원합니다. 그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날마다 승리하길 원합니다. 날마다 그 하나님과 깊은 교제 안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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