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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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1-21 재난을 주는 위로자
-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이 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힘이 센 거인이자 노상강도였다. 그는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상대로 강도질을 일삼았다. 특히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었는데,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를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그만큼 잘라내고,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고 한다. 이게 현대에서는 자기의 기준이나 생각에 맞춰 타인의 생각을 바꾸려 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횡포, 아집, 독단 등을 이르는 심리학 용어로 사용된다.
- 나이가 들고 경험과 경륜이 많아질수록 생각과 이해의 폭이 넓어져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세월이 지날수록 경직되고 굳어지기 쉽다. 저도 이제 40대 중반을 지나면서 정말 유연하고 아량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저처럼 남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욱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 같다.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자꾸만 사람을 판단하려고 한다.
- 지금 우리는 욥기를 순차적으로 묵상하고 있다. 한 경건한 사람이 끔찍한 일을 겪었다. 재산과 자녀들을 모조리 잃었고, 자신의 건강도 잃어버렸다. 지금껏 자신이 쌓아올렸던 명성과 명예도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더 심한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나 괴롭고 아프다. 하지만 주변에 그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자신의 아내가 있었는데, 욥이 병들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다. 또 그의 친구들이 멀리서 찾아왔는데 7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옆에 있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그런 가운데 욥이 혼잣말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탄식을 쏟아냈다.
- 지금 욥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위로이다. 마음이 상하고 괴로울 때 그것을 싸매어줄 참된 위로가 필요하다. 하지만 욥은 그 어디서도 위로를 받지 못한다. 오늘 설교 제목을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고 했다. 욥기 16:2에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욥이 재 가운데 앉아 있을 때에는 그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욥이 입을 열어서 저주와 탄식을 쏟아내니까 친구들도 참지 못하고 말을 시작한다. 무려 4장부터 31장까지 친구들과 욥의 논쟁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그 말이 욥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 제가 유진 피터슨을 참 좋아하는데 그분이 이렇게 썼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친구가 죽어 상심하거나, 일자리를 잃거나,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거나, 우울증에 빠지거나,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거나, 종류를 막론하고 곤경에 처하는 순간, 사람들이 다가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나아질 수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주검에 독수리가 모이듯 고난당한 사람들 주위에는 해결사들이 모여든다. (중략) 그런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인용하지만 어딘가 어설프다. 그럴듯한 영적 진단과 처방을 잔뜩 내놓는데, 그것을 듣고 난 다음에는 ‘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왜 저들의 말을 듣고 나면 기분이 나빠지는 거지?’하는 의문이 든다.”
- 제가 이 글을 읽고 많이 찔렸다. 제가 딱 여기서 묘사한 사람들처럼 행동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치 해결사인 것처럼,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정답을 주려고 한 적이 많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공감이다. 상담을 잘 하시는 분들은 절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잘 들어준다. 잘 들어준다는 것은 공감하며 들어준다는 말이다. 정신과 의사나 상담자들이 돈을 받는 것은 들어주는 값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설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상담할 때도 설교하려고 할 때가 종종 있다. 제가 목사가 된 지 10년이 되었는데, 초반에는 저와 상담하기 위해서 온 분들에게 설교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 오늘 본문은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말이다. 그의 주장을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욥은 원래 지혜롭고 강한 사람이었다. 3-4절에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그는 많은 약한 이들을 가르친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했고 넘어지는 자를 도와주었다. 지혜로운 자는 삶의 방향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아는 자들이다. 둘째, 그런데 그런 욥이 지금 낙심하고 있다. 5절에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욥은 상황이 좋을 때는 강하지만 문제가 오면 넘어지는 사람이다. 욥은 명확하고 통찰력 있는 사람에서 혼란스러워하며 실수하는 자로 변했다.
- 셋째, 오직 죄인만이 고난을 당한다. 여기서 엘리바스의 핵심적인 사상이 드러난다. 7-8절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온전한 자는 고난당하지 않지만, 악인은 심지어 겉으로 가장 강력하고 위험스럽게 보이는 자도 멸망한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은 언제나 그렇게 작동한다. 8절에서 중요한 표현이 ‘내가 보건대’이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과 관찰에 근거해서 이런 논리를 펴고 있다.
- 넷째,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을 신뢰하지 않는다. 피조물, 특히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로 든다. 하나는 인간은 그리 의롭거나 선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17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여기서 ‘하나님보다’는 ‘하나님 앞에서’가 더 나은 번역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리 선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인간은 신뢰하기에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다. 19-20절에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여기서 흙집은 인간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영혼이 거하는 흙집이다. 쉽게 부스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5장에 가서야 알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욥 5:8에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순히 회개하라는 말이다.
- 만약 우리가 욥이라면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일단, 기분이 나쁘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 한편으로, 뭔가 맞는 말이긴 한데 자신의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 주장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엘리바스의 주장에는 자기만의 사고의 틀, 즉 신학적인 체계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 욥의 경우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한다.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사람들을 자신의 침대에 맞추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 엘리바스를 비롯한 욥의 친구들의 신학 체계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1)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통치하신다. 2)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공정하시다. 3)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악인에게 벌을 내리시고 의인에게 복을 주신다. 언제나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이 달리 하신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불의하신데, 이것은 생각할 수 없다. 4) 그러므로 내가 고난을 당한다면, 내가 죄를 지었고 내 죄 때문에 공의롭게 벌을 받는 게 틀림없다.
- 우리의 삶 가운데 인과의 법칙이 성립할 때가 분명히 있다. 잘못된 행동의 결과는 비참하기 쉽고, 선한 행동의 결과는 아름다울 때가 많다. 우리 속담에도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대체로 성적이 올라간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으면 시험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수능이 얼마 안 남았는데, 수능 때 아이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기도가 이렇다. ‘하나님, 심은 대로 거두게 하옵소서.’ 심은 대로 거두면 큰일 난다. 공부를 제대로 안 해도 찍는 것마다 맞게 해달고 기도한다고 한다.
-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잘 생긴 폰 트랩 대령이 젊은 여주인공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여주인공이 기뻐서 노래한다. “어쩌면 난 못된 어린 시절과/ 비참한 사춘기를 보냈어요./ 그러나 그 못되고 비참한 과거 어딘 가에/ 진실한 순간이 틀림없이 있었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지금 나를 사랑해 내 앞에 서 있으니까요./그러니 사춘기나 어린 시절 어느 땐가/나는 착한 일을 한 게 틀림없어요./저절로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그러니 사춘기나 어린 시절 어느 땐가/나는 착한 일을 한 게 틀림없어요.” 무슨 말인가? 당신처럼 멋있고 잘 생긴 분을 만난 건 내가 전에 착한 일을 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잘생긴 남자와 결혼한 것이 행운인가? 그렇다면 못 생긴 남자와 결혼하면 그건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 제가 어렸을 때 이런 유머가 있었다. 너무 심각하게 안 들었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갔는데 거기서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에게 형벌이 주어졌는데 정말 못 생긴 사람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었다. 어떤 방을 보니까 한 여자가 이주일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어떤 방을 보니까 김흥국이 채시라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 때는 채시라가 가장 예쁜 연예인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김흥국이 채시라와 같이 살 수가 있냐고, 뭔가 잘못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김흥국이 잘해서 채시라와 사는 게 아니라, 채시라가 죄를 많이 지어서 김흥국과 같이 산다는 것이다.
- 하지만 세상에서 인과법칙이 언제나 성립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벌을, 의인에게 복을 주시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때로 의인에게 고통을 주신다. 죄 없는 사람들이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거나 무서운 병에 걸리기도 한다. 여기 나오는 욥이 그렇다. 지금도 코로나가 한창 진행 중이지만 죄를 많이 지어서 코로나에 걸리고 죄를 안 지어서 코로나에 안 걸리는 것이 아니다.
- 엘리바스는 지금 중요한 진리 세 가지를 놓치고 있다. 첫째, 사탄이 없다. 그는 사탄이나 영적인 존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저 세상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탄은 실재하며 영향력 있는 영적 인격체이다. 욥이 겪은 모든 비극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벌어진 논쟁 때문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다. 단지 어떤 법칙에 따라서 예외 없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가 싸울 상대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와 싸워서 될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만 잡는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 배후에 영적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다.
- 둘째, 기다림이 없다. 그는 심판은 항상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악인은 지금 벌을 받고 의인은 지금 복을 받는다. 그러나 심판에 대한 약속은 지금을 위한 게 아니다. 갈라디아서 6:8-9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여기서 말하는 때는 바로 마지막 때, 종말의 때를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지막 때에는 누구도 이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 셋째, 십자가가 없다. 7절에서 엘리바스가 이렇게 말한다.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그러나 성경은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 욥이 그런 케이스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 없는 가운데 망한 분이 계신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들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망했다. 클라인스라는 학자가 이렇게 말한다. “엘리바스는 욥을 돕는데 실패한다. 그 까닭은 그의 신학이 욥처럼 의로운 사람, 곧 올바른 경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잃은 채로 좌절감에 빠진 사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 엘리바스의 치명적인 결함이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경험세계에 갇혀 있다. 자신이 경험하고 관찰하고 배운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아마 엘리바스는 욥과 같은 고난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욥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자신이 당한 고통이 크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헨리 나우웬이 쓴 책 제목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도 있다. 자신이 입은 깊은 상처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통로가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내게 그런 아픔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위로할 능력이 없다.
- 어제 말씀을 준비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정말 모든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아실까? 예수님은 부모 잃은 슬픔을 알고 계실까? 그렇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이 어렸을 때 죽은 것으로 본다. 예수님이 배신당한 적이 있으셨나? 돈을 떼인 적이 있을까? 물론이다.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다. 아마 그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사용했던 돈도 횡령했던 것 같다. 나중에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다.
-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적인 수치심을 느낀 적이 있을까? 그런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면 옷이 거의 다 벗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주님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을 그린 성화에서는 차마 예수님이 완전 나체로 있는 모습을 그릴 수 없어서 중요한 부위는 가렸는지도 모른다. 십자가형이 정말 끔찍한 이유는 그렇게 나체의 상태로 죽을 때까지 며칠이고 나무에 매달아둔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온갖 조롱을 다한다는 것이다. 요즘 디지털 성범죄라고 해서 찍어서는 안 될 것들을 찍어서 유포해 버리는 악질적인 범죄가 많다. 그런 일을 당하는 피해자의 고통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다. 자신을 찍은 영상이 버젓이 인터넷과 SNS에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런 일을 당한 분들을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점점 갈수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목회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밖에 없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친히 겪으신 그분이 우리를 친히 위로하실 수 있다. 히브리서 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