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것

로마서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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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사도의 정체성 1-4(3-4절 당시 성도들의 신앙고백)
로마 성도의 정체성 5-7
유대의 조그만 골, 베들레헴의 사상과 문화가 로마를 정복함. -> 언어는 헬라어이며, 표현도 헬레화 되었지만, 사싱과 믿음은 헬라화 되지 않았다.
그 큰 제국을 이룬 헬레니즘을, 유대 조그만 나라에서 일어났던 소소한 사건들이 이긴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하셨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서두에 시작하며, 이 정체성을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소유라는 것을 말하며 시작한다.
아직세상에 물들어 있든지, 구약이라는 율법에 물들어 있든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물들어 있는 로마 교인들을 향해 우리는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의 소속역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며 시작한다.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인이라는 정체성.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 아내였다.
그러나 그들은 간음했고 하나님을 버렸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신부이자, 자녀로 부른다.
왜 그리스도 예수의 ‘것’인가.
신부도 남편의 소유다. 자녀도 아버지의 소유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주장하신다. 이중으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결합 2개를 모두 써서 우리를 주장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군가? 그리스도다.
기름부음을받은 자이다.
그러나 제사장, 선지자같은 자가 아니다.(다 기름부음받음, 우리로 따지면 안수받음) 시무집사, 장로, 목사..
‘그리스도’ 로마서는 이 단어를 60번 사용한다. 분량상 2배는 되는 마태복음은 16번 사용한다.
그리스도는 왕이다. 선지자다. 메시아다. 모든 것을 포함한다.
세상 모든권세보다 높으시다
그러나 그들, 유대그리스도인과 이방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 세상에서 받고 형성된 프레임으로 인해 서로 갈등하고 다투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아무리 다름을 받아들이라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편치 않는 것이 우리다.
그런 우리 성도, 하나님의 자녀이자 신부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정체성이다.
한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는 정체성이다.
이미 부르심을 받았다는 정체성이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가진 우리가 구ㅐ야 할 것은 은혜와 평강이다.
신부가 남편의 사랑을 구하듯이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구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
자녀이자 신부. 신부이자 자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되어야 하는 우리의 정체성.
모여야 하는 정체성. 예배드려야 하는 정체성
교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로보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 또한 한 사람 한사람. (고전, 살전, 살후는 서두에 ‘교회’라고 명시한다)
그 한사람을 위한 메시지.
자녀, 신부.
그러나 동시에 종.
노예이자 신하.
그 모든 것을 합쳐 ‘예수 그리스도의 것’
내 위치는 내가 결정한다. 누구도 내 마음을 건들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가 더이 있다.
내 위치는 하나님께서 결한다. 누구도 하나님의 결정에 반박할 수는 없다.
은혜와 평강.
로마시민이 황제의 은총과 호의를 구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헤세드와 샬롬을 구하는 것이다. 사랑과 평강.
설교
서론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본문의 내용은 바울이 로마서라는 서신을 쓰면서 처음으로 문안인사를 하는 부분입니다. 알다시피 로마서는 편지입니다. 그리고 보통 편지에는 형식이 있습니다. 처음에 누구에게부터 시작해서 인사를 하고 내용을 적는 식입니다. 요즘은 편지를 잘 쓰지않고, 형식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편지의 형식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형식에 따라 첫 인사말을 적었습니다. 그 내용이 우리가 오늘 본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실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과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서로 얼굴을 본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회는 요즘처럼 사역자가 있는 교회, 개척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회로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중 누구와도 관련없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마교회는 처음에는 유대 그리스도인이 많았지만, 나중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보다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중간에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의해서 로마시에서 유대인들이 모두 쫓겨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로 어떤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민족도 달랐습니다. 그에 따라 사상도 달랐습니다. 같은 말을 써도 각자 다른 의미로 말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로마교회를 향해서 바울은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교회를 향해, 그리고 그 주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편지를 쓰며, 가장 먼저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친분은커녕 얼굴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같은 정체성을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잘 나타낸 표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왜 바울은 로마서를 쓰며,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부터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체성,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라는 의식이 우리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자식간에는 호적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했던 행동들의 발자취들이 항상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했고, 어떤 회사에 있었고, 어떤 사업을 했든지 모두 그 흔적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세상에서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어내더라도,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인지 그 정체성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고, 우리 각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체성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지도 모르는데, 교회를 다니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만 다닌다고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세상이 계속해서 우리를 흔들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부분도 바로 이 정체성에 대한 부분입니다. 너의 근본은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직장이 중요하냐. 신앙이 중요하냐. 돈과 명예등 세상의 부귀와 안락을 구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냐,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냐. 더 구체적으로, 고3이된 내 자식을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 주일에 학원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예배를 드리게 할 것인가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면 세상의 한 구성원, 대한민국의 한 평범한 시민이냐는 정체성이 우리의 선택을 좌우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의 서두에서 바울은 정체성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1-4절까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로마교인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신분이자 정체성, 예수 그리스도의 종을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도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면 종은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우리 모두를 단순한 종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한번더 말합니다. 이 종이란게 이방 사람들이 생각하는 단순한 노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종은 단순한 노예부터 시작해서 왕의 신하까지 모두다 ‘종’이라고 칭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마인들에게 종은 노예시장에서 돈주고 산 ‘자신의 재산’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자, 사도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신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3-4절에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지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3-4절은 바울의 신앙고백만이 아닙니다. 학자들은 3-4절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었을거라고 추측합니다. 즉, 사도신경이 나오기 전에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했던 신앙고백이 바로 3-4절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3-4절의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사도인 바울이 지금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똑같은 신분, 똑같은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종이고 너도 하나님의 종이다. 단순히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하다.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하나님 안에 있는 자로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지어가는 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것이 사도의 직분, 복음의 부르심이라면, 다른 방면이지만, 로마성도들 역시 똑같은 하나님의 종,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 특별히 이방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종, 노예였습니다. 지금도 노예로 있거나, 노예인 상태에서 돈을 지불하고 풀려난 자들이었습니다. 다르게 말해, 노예이거나 해방노예인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아리마대 요셉같은 부자들도 있었지만 많은 부분은 이런 노예나 해방노예들이 차지했습니다.
그런 종들, 노예들에게 바울은 그들의 정체성을 바로잡고자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인이 있거나, 아니면 예전 주인의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있는 그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보내는 우리의 구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아직도 주인의 아래에 있는 종이거나, 주인과 같은 지역인 로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신하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들에게 심어주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무엇을 알기 원했습니까.
이 대제국을 이룬 로마도 그들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문화와 문명을 번성시킨 헬레니즘이라는 사상도 그들의 삶을 책임져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 바로 ‘메시아’임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계속해서 세상을 향해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이렇지 않습니까. 내가 무엇을 했는지 증명해야 합니다. 하다못해 시장통의 장사할 자리도 내가 계속 장사하던 자리임을 외쳐야 합니다. 회사에서 실적을 보여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다못해 집에서도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할머니로서, 할아버지로서, 자식으로서 잘했다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조건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 사랑이 어디에 나타나있습니까.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단순히 왕과 종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보다 신랑과 신부로 비교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한탄하며 간음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자녀입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열처녀 비유도 그렇고, 계 19장은 아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잔치를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 혼인잔치의 하객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혼인잔치의 주인공 신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신부를 넘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으로 우리를 끌어안고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이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혼인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우리에게 결혼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녀라 합니다. 결코 끊을수 없는 천륜, 피로 맺어진 사이인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향해 나를 증명하고 나를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내게 생명을 주신 분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잘 사는 길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생명의 길, 살아있는 길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때, 신부, 아내는 남편의 소유였습니다. 자녀도 남편의 소유였습니다. 앞서보았던 종은 당연히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사도도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와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체성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온갖 이방인들, 그 넓은 지방, 각 나라에서 모인 다 다른 출신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하나로 모은 로마보다 더욱 위대한 것을 제시했습니다. 로마는 그들에게 주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제 그들이 구해야 할 것은 로마 황제의 은총과 호의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거룩한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세상의 인정과 높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강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잊지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코로나다 뭐다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잊게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욱 교묘하게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당장 시국이 이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정체성은 잠시 접어놓으라고. 버리라는 게 아냐. 잠시만 접어두라 합니다. 기도도 잠시 접고 찬양도 잠시 중단하고, 모임도 중단하라 합니다. 그러면서 너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인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 정체성은 우리의 근본입니다. 잠시 접어둘수 있는 종류가 아닙니다. 어떤 선생님이 그 아이보고 네 부모가 누구라고 절대 말하지 말라면, 그 선생님이 선생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신랑이신, 또한 부모이신, 또한 주이신 구주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잊지 맙시다. 잘사는 길이 아닌 살아있는 길로 갑시다. 그리하여 바울처럼 서로 격려하며 권면하며,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시간 다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게 하소서.
축도
지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성도들의 머리위에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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