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왔더라

전주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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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늘 설교의 흐름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후반부에 나오는 본문을 먼저 살펴보려고 한다.
조금은 뜬금 없지만, 르호보암의 가족들이 등장한다. 이 내용들의 중심은 수많은 아내들과 자녀들 사이에서
르호보암이 보여준 ‘지혜’에 대한 것으로 보여진다. 앞서 10장에서 민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를 범했던 모습과 다르게
자녀들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서 ‘견고한 성읍들에 흩어 살게 하고, 양식을 후히 주고, 아내를 많이 구해주었다.’
그리고 역대기 저자는 이를 ‘르호보암이 지혜롭게 행하여’ 한 행동으로 본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는)돌이키는 용기

김남준 목사님의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책이 있다.
신학생들이 읽고, 자신의 소명을 구체화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실제로 저 책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진 동기들도 꽤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의 결정이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결정의 잘못되었음을 알고, 번복할 수 있는 것은
보통 용기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그 결정에 힘과 권위를 가지는 직책에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르호보암에게 회복된 나라를 주기 위해서 일어난
18만명의 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다와 베냐민 족속에서 모인 이들이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했다.
그리고 스마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무리에게 전했다.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8만명의 군사들은 여로보암을 치러 가던 길에서 되돌아왔다.
여로보암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래서 군대를 일으켰겠지만,
그리고 그것은 다윗의 왕조에 반역을 일으킨 10개 지파의 형제들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내린 결단이었겠지만,
하나님의 뜻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뜻을 돌이키는 것은 더 큰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했다.
되돌아왔더라는 ‘그곳에서 벗어나 돌이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키는 것

하나님께서 왜 그들의 전쟁을 막으셨는가?
4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한다.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웃사는 법궤에 손을 대었다가 죽었다.
웃사는 법궤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칭찬 받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혀가시던 밤, 그 앞을 막아섰다.
베드로는 그것이 예수님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히야 선지자를 여로보암에게 보내셔서 이 일에 대해 예언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의지를 보이셨음 이었다.
반역으로 분열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나라의 분열에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 분열에 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분열과는 조금 다른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역대기의 저자는 ‘모든 이스라엘 무리’라고 청중을 설명하고 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게 속한 사람이 아닌 유다와 베냐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성경은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가야를 통해 분명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유다와 베냐민 지파,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대항만으로도 집안 싸움이었지만,
실제적으로 같은 지파의 사람들끼리도 전쟁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분열이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너희가 형제임을 잊고 싸우라는 뜻이 아님을 알아야 했다.
역사를 살펴볼 때에 르호보암의 아집으로 벌어진 분열이었지만,
북이스라엘의 우상의 역사 속에서 다윗의 왕조를 지켜내려는
하나님의 분투가 이 분열 역사 가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당시에는’ 아직 드러내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후에 나오는 성읍을 건축하고, 방패와 창으로 방비한 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본문의 위치로 인해 북 이스라엘로부터의 전쟁을 준비한 것으로 보기 쉽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베들레헴과 에담과 드고아, 벧술은 동쪽을,
십, 아도라임, 라기스, 헤브론은 남쪽을,
소고, 아둘람, 가드, 마레사, 아세가, 소라, 아얄론은 서쪽을 방어하는 성읍들이다.
(더 자세한 지역적 설명까지는 의미가 없기에 생략한다.)
즉 북이스라엘을 견제하기 위한 성읍들의 건축은 없었고,
오히려 본문은 북 이스라엘과의 형제임을 상기시켜주신 하나님에 대한 반응으로 보는 것이 맞다.

(죄악 중에 약속의 말씀에 서서) 돌아오는 소신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여호와를 찾는 레위사람들과
마음을 굳게 하여 여호와를 찾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사람들’
땅을 소유하지 못한 레위지파의 사람들은 각 지파에 흩어져 머물고 있었다.
여로보암이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직접 제사장들을 세웠고,
레위사람들은 자신들의 제사장 직분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레위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레위사람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른 사람들이 있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레위 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대하 11:16)
그 사람들은 마음을 굳게 지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었다.
지도자의 바른 결정은 따르는 이들에게 길을 제시하며, 그들에게 용기를 준다.
죄악 중에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뒤로 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하기 위한 선택을 했던 무리가 있다.
이 ‘무리’가 3년동안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을 때,
르호보암은 강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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