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로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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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방주로 오셔서 심판의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Notes
Transcript
추수 감사절 설교
창세기 6장 13-17절(창세기 6-4)
방주로 오신 예수님

S1 축복 및 인사

반갑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우리 좌우에 계신 분들에게 ‘복된 추수 감사절 되세요’하고 인사 나누십시다.
네 감사합니다. 오늘은 한해 동안 지켜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한국의 절기와는 조금 시기적인 차이가 있는 시간이긴 하지만, 성도들이 한해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예배하는 것은 의미가 큰일입니다. 어떤 면에서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요즘 먹고 사는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에 대해 어색해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를 만난 세계를 보면 무역이 중단되고 생산과 교역이 줄어든 상황 속에서 직업을 잃거나 소득이 감소하여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인생은 생각만큼 안정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도 우리의 머리 속 기대만큼 평안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먹고 산다는 것은 단순히 뭘 먹느냐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 안전과 평강 가운데 거하는 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평강 가운데 생명을 이어가고, 나아가 부르심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 추수감사절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S2 본문의 주제 제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부패하고 타락한 불안전한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세상과 그 세상을 사는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서 멸망을 당하게 될 존재로 전락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몰락하는 세상에 구원의 길을 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세상이 심판으로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그 선을 넘어 스스로가 부패와 타락으로 파괴를 일삼았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심판의 대상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심판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 주십니다. 대홍수의 심판을 직면한 인생을 향해 하나님은 홍수의 심판을 이겨낼 수 있는 방주를 짓도록 하셨고, 그 양식과 재료들을 알려 주시면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구원의 방주로 오신 예수님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심판의 세상에 서 있는 우리들을 영원한 구원의 길로 부르신 하나님의 방주로 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깊이 붙들고, 그 풍성한 은혜를 감사하는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모세는 세상이 심판으로 인해 멸망당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은 죄악과 포악으로 인해 그 끝이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을 심판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 13절의 말씀을 같이 봅시다.
Genesis 6:13 NKRV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사람의 포악함이 땅에 넘쳤기 때문에 그 끝날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땅에 관영하여 심판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이 두시기로 하신 마지막 끝의 상황에 이르렀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땅과 함께 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멸망을 하실까요? 17절을 봅시다.
Genesis 6:17 NKRV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창조주께서는 홍수를 통해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을 땅과 함께 멸망케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창조의 역사를 돌이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이 깊에 드리워진 당시의 상황에서 창조 둘째 날에 하나님은 물 사이에 하늘(궁창)을 두어 하늘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셨고, 셋째 날에는 아래의 물을 한곳으로 모으시고 땅을 드러나게 하심으로 땅과 바다가 생기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누어진 땅에 사람을 지어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다시 물들을 하나로 합치게 하셔서 땅과 바다의 구분이 사라지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궁창 위의 물을 아래로 쏟으시고, 불어난 바다로 땅을 덮어 땅에 있던 모든 육체를 죽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 계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홍수 심판 계획이 세상을 다시 처음의 혼돈과 공허만이 있던 상태와 비슷하게 되돌리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공허의 세상에 빛을 주시고, 질서를 허락하시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온 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시고 에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임하지 못한 상태에서 역사는 하나님이 보이신 방향과는 달리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되돌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주인이 되고 자신이 선악의 기준점으로 정착된 삶을 살게 되면 그 결과는 하나님의 빛과 질서와 다스림이 없는 혼돈과 공허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를 죽이고 헐뜯다 못해 결국은 그 악으로 하나님도 무시하게 되었을 때 심판주 되신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되돌리시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 상태와 같은 물만이 남아 있는 혼돈과 공허가 찾아 온 것입니다.

S3 우리는 이런 형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인간을 혼돈과 공허의 땅에 내몰아 놓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역사인데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에게만 어떻게 역사를 맡겨 두시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삼자가 되셔서 인간을 심판만 하시는 분이십니까?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방임은 아닙니까?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역사를 파국에 이르게 하실 수 있습니까? 등등 우리는 많은 질문과 함께 사실은 영적인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상황 자체가 완전한 원점 복귀는 아닙니다. 다시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Nothing의 시대가 윤회적으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비록 혼돈과 공허가 물의 통합을 통해 다시 찾아왔지만, 이것이 처음으로 되돌아간 윤회가 아닙니다. 역사는 이미 하나님의 손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심판의 상황으로 역사를 끌어온 인간의 삶이 끝에 달하였지만, 하나님은 이 끝을 다시 처음으로 회귀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끝,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만나는 혼돈과 공허를 명백하게 드러내시면서 처음의 혼돈과 공허를 이기신 그 능력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끌어 온 이 새 혼돈과 공허도 해결하시고 계십니다.

J1. 우리 하나님은 한 사람 노아에게 은혜의 눈빛을 흘려 보내셨고, 그를 통해 세상에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방주는 배를 말합니다. ‘테바’라고 하는 히브리말은 이집트어에서 온 말이라고도 하는데, 선박(아니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불러 선박을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14절 말씀을 같이 읽어 봅시다.
Genesis 6:14 NKRV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으로 가져오실 홍수를 이길 배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우선 고펠나무(잣나무, 측백 나무)로 만들어라고 재료를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칸들을 막으라고도 말씀하시며 내부 구조를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바깥에는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료와 내부 구조와 물로부터 배를 보호하도록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또한 15, 16절 말씀을 보면 전체 구조도 알려 주십니다.
Genesis 6:15–16 NKRV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한 규빗을 50cm로 하면 배의 길이는 150미터 정도, 넓이는 25미터, 높이는 15미터가 되고, 위에 창을 내고 배 옆에는 문을 내고, 3층으로 된 배를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정확한 크기, 내부 구조, 외적 모양 등등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을 사진으로 보면 이 정도가 됩니다.
아라랏 산 화석
켄터키 지역 방주 제작 동영상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모양과 크기보다도 이 배가 하나님께서 제작하라고 하신 배로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행하시기 전에 구원을 얻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노아에게 주신 방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간 인간, 갈 수 있는 선까지 다 간 인간을 심판하셔서 다시 혼돈과 공허의 세계로 역사를 윤회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히려 심판을 앞두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멸망의 길을 걷게 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과연 이 배가 홍수를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한가 하는 것입니다.

J2.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셔서 심판을 대신하실 수 있으십니다.

만약 우리에게 오신 구원의 메시야가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노아에게 하나님이 알려주신 이 방주 만드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내실 홍수의 강도를 아시기 때문에 크기는 어떻게 하고, 내외부의 구조를 어떻게 하고, 어떤 재료를 쓰고, 그 바깥을 역청으로 발라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는 것이고, 그 결과 노아와 짐승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역청으로 번역된 ‘코페르’라는 단어는 이후에 구약 성경에서 ‘대속 제물’이라는 단어로 사용이 됩니다. 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봅시다.
Genesis 6:14 NKRV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배에 방수 공사를 한다는 의미의 ‘카파르’라는 동사는 ‘덮는다’, ‘가린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특별히 짐승의 피를 흘려서 자기 백성의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Isaiah 43:3 NKRV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우리 하나님은 노아에게 구조선의 재료와 모양, 내외부 구성을 알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심판의 물줄기가 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코페르’, 곧 대속의 방법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방법으로 오신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이길 수 있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J3. 또한 우리 예수님은 온전한 사람이 되셔서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십니다.

사람의 죄를 사람이 갚는 것이지 사람이 아닌 이가 사람의 죄를 갚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스스로가 죄인과 같이 되셔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우리 마태복음 3장 13-15절 말씀을 같이 봅시다.
Matthew 3:13–15 NKRV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여기에서 우리 예수님이 왜 요한의 세례를 받아야 했을까요?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인데 왜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 세례를 받으셔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다른 의미들도 많이 있지만, 한 가지 중요한 진리가 나타난 세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시기 위해 받으신 세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어서 인간과 같이 되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받아야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대표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참 대속자가 되신 것입니다.

W1.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신·인으로 오신 방주가 되셔서 홍수의 심판 아래 있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심판으로 멸망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보내신 바로 그 방주입니다. 온 인류가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홍수를 만났을 때 방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은 심판에서 생명을 얻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W2. 놀라운 진리는 바로 이 구원의 방주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지칭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인 우리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우리 사도행전 11장 25, 26절의 말씀을 봅시다.
Acts 11:25–26 NKRV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성도의 이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는 것이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죠. 기름부음 받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닮아서 그랬다는 등의 이유는 많이 있지만, 그 뜻은 교회가 바로 기름부음 받아 세운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바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W3. 우리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교회를 통해 세상을 심판과 파멸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는 세상 구원을 위한 방주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방주로 말입니다. 그냥 우리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참 구원의 방주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T1. 노아는 이 소명을 일차적으로 부여받아 시대를 구원하는 방주 만드는 사람이 되는 복을 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따라 만든 방주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대로 만들어진 방주입니다. 내 지식이나 내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방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주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현대주의의 문명에 의해 일그러진 그런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경이 전하는 바로 그 예수님, 바로 그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내 영을 하나님께로 다시 되돌려 살게 하시는 그 방주를 전하는 복이 노아가 누린 복입니다.

T2. 세상은 이 복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심판 아래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있기 때문에 복음을 알 지 못합니다. 그들이 믿고 신뢰하는 지식과 능력과 힘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이해된 진리들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믿음 안에서 방주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영으로 알고 깨닫는 길 외에는 어느 것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T3. 그러나 성도인 우리들만이 바로 이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 소망과 생명의 회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이 다 심판으로 끝이 난다 해도, 믿음의 사람들은 방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혼돈과 공허가 온 세상을 뒤덮는 홍수와 같이 엄습할찌라도 성도는 참 방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그 어떤 분노와 심판도 결코 통과할 수 없도록 우리를 완전히 보호해 주시는 능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L5.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구원의 방주로 모신 삶을 항상 감사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돈이 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옆집보다 좀 못살 수도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 왔을 때 양반들보다는 평민층이 복음에 더 수용적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우리가 좀 약하고, 못해도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살고, 그 분 안에 거하고 있는 이 구원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항상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꼭 이기지 않아도, 꼭 내가 인정을 다 받지 않아도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내 마음은 항상 감사가 넘치는 삶을 수 있는 것입니다.

L6. 그러므로 이제 추수 감사절, 한 해의 마지막 절기를 보내면서 주님을 더 깊이 소유하기를 갈망하고 합시다.

세상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예수님을 내 맘에 더 깊이 모시고 살도록,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 주시는 은혜의 방주이신 예수님 더 알기를 원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시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항상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충만한 감사로 살고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우리를 대속해 주신 그 은혜의 감사 제목들로 인해 구원의 하나님을 더 찬양하고 감사하는 추수감사절 절기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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