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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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고라는 게임이 출시되었습니다. 증강현실을 기반으로 한 게임으로 출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게임입니다. 핸드폰을 가져다 대면 현실에 포켓몬이라는 캐릭터들이 나타나고, 그것을 잡기도 하고 키우기도 하는 게임입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세계적으로 이슈냐면요, 한국에서는 속초에 포켓몬들이 나타난다는 소식이 돌자마자 포켓몬 원정대라는 여행상품이 나오고, 직장인들은 휴가를 내서 속초를 간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포켓몬 잡으러 독도까지 갔더군요. 심지어는 포켓몬 잡으러 지뢰밭에 들어갔다거나 지명수배자가 게임하다가 경찰서에 자기 발로 들어가서 체포되기도 하고, 몬스터 잡으러 차도에 들어갔다가 교통사고가 나기도 했습니다.
뭐, 이런 게임에 이렇게 목을 메는 것일까요? 전문가들은 두 가지를 이유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컨텐츠입니다. 다양한 컨텐츠와 귀여운 캐릭터들이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직접 경험입니다. 게임 속에서 벗어나와 실제 현실을 배경으로 해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게임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요.
포켓몬고에 대한 이슈들을 접하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복음도 같은데요. 왜 사람들은 복음에는 열광하지 않을까요? 복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엄청난 컨텐츠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하나 남은 것… 그것이 직접 경험입니다.
본문에는 열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도마가 등장합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전해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다.” 하지만 도마는 믿지 못합니다. “내가 주님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내 손을 그 옆구리의 창자국에 넣어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도마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 같이 봐야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했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39절 이후를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손에서 빠져나와서 요단강편 동쪽으로 건너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1장에 보니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소식을 예수님께서 듣게 되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유대땅으로 들어가시기로 하십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말립니다. “안됩니다. 유대인들이 선생님을 죽이려고 했던 그 곳으로 돌아가시겠다니요. 큰 일 나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가겠다는 뜻을 밝히셨을 때,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도마의 한 마디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입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마치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병사들에게 대항했던 베드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도마도 베드로 못지 않게 예수님을 사랑했던 제자였던 것입니다. 그랬던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도마는 큰 상심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었던 예수님의 죽음에 배신감도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8일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도 문이 잠겨있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 서계셨습니다. 그리고 전에 나타나셨을 때와 같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인사를 전하십니다. 그런데 전에 나타나셨을 때와 차이가 있습니다. 전에는 제자들을 위해 나타나셨다면, 이번에는 도마를 위해, 단 한 명을 위해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집중하십니다.
그리고 도마가 의심 중에 했던 그 말 그대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누구 한 사람도 믿음 없이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한 명의 불신자를 위해서 나타나셔서, 그 한 명의 불신자에게 믿음을 넣어주시려 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손에 있는 못자국과 옆구리에 있는 창자국을 기꺼이 내어주십니다.
도마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아주 짧지만 강렬한 드라마입니다. 의심으로 가득했던, 상실감과 배신감에 떠났던 도마의 입에서 나온 고백은 엄청난 반전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은 요한복음에 더 존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은 단 한 번, 도마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수준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저자인 요한이 기록한 것이 전부입니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자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도마는 자신의 요구대로, 혹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곧장 이런 엄청난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을 직접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무엇을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손에 못자국을 만져봐야 믿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자국을 만져봐야 믿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얼굴을 봐야지 그제서야 믿음이 생길 것 같으십니까?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도마는 최소한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소망이 되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입니다. 보지 못하지만 믿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께 ‘복되다’라고 칭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