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 교회

계시록 일곱교회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48 views
Notes
Transcript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칭찬 받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사데는 소아시아의 태풍의 핵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태풍이 핵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무언가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사데는 지역 최대의 사금생산지였습니다. 따라서 금세공과 같은 금과 관련되어있는 제조, 가공업이 발달해있었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사데 지역이 금화와 은화의 최초로 주조된 도시라고 되어있을 정도니까요. 이런 상황 가운데 사데는 당연히 돈으로 인한 전쟁이 끊이지 않는 도시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지역주민들의 종교심은 불이 붙었겠죠. 그래서 로마 황제 신전 건축에 열을 올렸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역할은 서머나 지역에 빼앗겼지만요.
사데의 도시는 원래 산 위에 있었고, 삼면이 천연 암벽으로 이루어진 요새였습니다. 역사상 딱 두 번 침략을 당했는데, 한 번은 주전 6세기경 페르시아의 고레스에게 점령되었습니다. 한 병사가 떨어진 자기의 투구를 주우러 내려오는 길을 정탐대가 봐두었다가 그 길로 공격해서 점령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레스의 승리 후에 사데는 페르시아의 수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천연요새이며, 부했던 도시라는 것이겠지요. 그 후로 안티오쿠스 3세 때에 똑 같은 방법으로 침략을 당했습니다. 군사 몇 사람이 도시에 침입한 후에 성의 문을 열어서 함락했습니다. 그 후에 로마의 속령이 된 이후에 주전 17세기 소아시아 대지진에 황폐해진 성을 로마의 지원을 받아 재건하였습니다.
구도시에 더 이상 늘어난 인구를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산 밑에 신도시를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도시에는 극장과 경기장, 그리고 아르테미스의 신전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완공시키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의 사자들에게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로 소개하십니다. 일곱은 완전한 수입니다. 여기에서 일곱 영은 1장 4절에서 설명하는 바대로 "성령"을 말하며, 일곱 별은 1장 16절과 20절에 나오는 것처럼 "일곱 교회"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시며, 일곱 교회의 지도자가 되신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를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의 행위를 알고 계셨습니다. 즉 그들의 삶을 알고 계셨습니다. 지난 주에 두아디라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셨던 것처럼 불꽃 같은 눈으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통찰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 통찰력으로 보건 데, 사데는 '그리스도의 이름은 가졌으나', 혹은 '교회의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어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섯 가지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첫째는 "일깨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깨어 있음을 증명해 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다고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데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부와 난공불락의 요새로 안일해져 있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사데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점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사데교회에는 이단의 세력이 드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그들은 안일해진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굳건하게 지켜내라는 명령 앞의 수식어는 이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가 온전하지 못함을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원어에서 '속이 비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언가 부족하고,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데 교인들은 이 비유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교보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완성되지 못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그들의 눈 앞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아르테미스 신전을 짓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완성되지 못한 이 신전은 그냥 공사장일 뿐,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데 교인들이 살았다는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그 행위가 온전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저 그리스도인의 이름만 존재할 뿐인 것입니다.
셋째와 넷째는 "생각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것은 "기억하라"는 뜻이고, "지키라는 것"은 "순종하라"는 입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지켜야겠습니까?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기억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만 있지, 무엇인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기록되어있는 "받다"와 "듣다"의 동사의 용례가 많기에 학자들은 공통된 의견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그들이 받은 것은 "사도의 전통"입니다. 또한 그들이 들은 것은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 사도의 전통과 교회의 가르침을 합쳐서 "기독교 진리"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가 어떻게 사도들과 그들이 세운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는지" 기억하고,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데 교회는 "회개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깨어있음을 증명하고, 굳건하게 하며, 기억하고, 지켜내었다면, 이제 그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돌이켜야 합니다.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고 예수님은 사데 교회를 협박하십니다. 사데 시민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협박이 없습니다. 전쟁의 처참함을 경험한 이들에게, 그것도 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라고 믿다가 기습을 받아 나라를 빼앗긴 이들에게 이보다 위협적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신데요. 그렇지만 사실 지상에 이처럼 고마운 협박은 없습니다.
오직 이 사데 교회의 소수 만이 예수님께 합당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대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말한 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소수의 결단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소수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공동체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힘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 합당한 자들이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을 넘어서는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책망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칭찬을 하십니다. 최소한 그들은 그 옷을 더럽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축복의 말입니까?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저희 집 강아지는 아주 작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우리랑 같이 다니면 큰 개한테도 겁 없이 덤빕니다. 지난번에는 코끼리한테도 짖더라구요. 천국에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영광 말이죠.
오늘 본문에서 "이기는 자"는 그저 "옷을 더럽히지 않은" 이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앞선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회개하고 돌이킨 자" 모두를 말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흰 옷을 입고, 똑같은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곧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결코", 이 두 글자에서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국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이겨내는 것" 역시 예수님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