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am I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48 views
Notes
Transcript
오늘 특송이 청년부라는 말을 듣고, 어떤 설교를 해야 하나 무척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금요기도회 설교했던 내용을 이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욥기 설교를 통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가치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대한 위험성을 전했습니다. 그 대상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판단과 정죄가 아닌 위로와 격려라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가수 양희은이 부른 ‘엄마가 딸에게’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한때는 딸이었던 엄마가 딸에게 전하는 노랫말이 가슴을 울립니다. 그 후렴 가사가 이렇습니다. ¡°공부해라! 아냐, 그건 너무 교과서야. 성실해라! 나도 그러지 못했잖아. 사랑해라! 아냐, 그건 너무 어려워. 너의 삶을 살아라.¡±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들이 결국에는 자신도 하지 못했던 것들이었고, 너무 어려운 주문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해주는 위로의 말이 ‘너의 삶을 살아라’입니다. 마치 지난 설교에서 ¡°oo처럼 살아라¡±와 같은 맥락입니다.
¡°Oo처럼 살아라¡±, ¡°너의 삶을 살아라¡± 그래요. 좋습니다. 여기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럼 너는, 나는 누구입니까?
본문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Çϳª´Ô²²¼­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아주 흔하게 들었던 말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 흔하게 들었기 때문에 그 감격이 많이 퇴색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 입니다. 또 때로 우리는 너무 인본주의에 갇혀있는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은 누구는 택하시고, 누구는 택하시지 않느냐의 관점으로 택하신 족속이 된 것에 대해 오히려 반감을 갖는 경우도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선택하는 권리를 주신 적이 없는 것처럼, 선택의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선택에 의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Ù¸¸ 우리가 가진 의무는 한 영혼이라도 더 하나님의 선택범위 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심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택하신’의 원어적 의미는 “특별히 사랑하는”입니다. 쉽게 말해서 ‘편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편애’하고 계심에 감사합니다.
Çϳª´Ô²²¼­´Â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구약에 ‘왕이며 제사장’이었던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 있었습니다. 신약에서는 멜기세덱의 반차인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며 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영어성경에 ‘a royal priesthood’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왕족 제사장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신분을 회복시켰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물려받을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족”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붙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제사장’입니다.
±¸¾à 내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9장 6절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사야 66장 6절과 21절에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제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나는 그 가운데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½Å¾à¿¡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했던 ‘여호와의 제사장’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통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만인제사장’이라는 교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혈육으로 레위지파에게만 이어져왔던 제사장 직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어왔던 대제사장의 직분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레위지파가 아닌 모든 열방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배자로 서게 된 것입니다.
±×·±µ¥ 가끔 대화를 하다보면 순간순간 놀랄 때가 있습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자신의 제사장권에 대해서 변호하십니다. 사역자들만이 제사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역자들이 자신을 제사장의 특별한 직분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제가 놀라는 부분은 여기가 아닙니다. 제사장의 직분이 사역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 잘 아시는데, 그 직분의 권리는 요구하시는데, 그 직분대로 사는 것은 사역자들에게만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역자이니까 고난의 길을 가시는 거죠. 사역자이니까 사랑으로 품어야죠. 사역자이니까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쳐야죠. 사역자이니까 희생해야죠.”
¿©±â¼­ 말라기 2장 5-7절을 보겠습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됨이거늘… 이렇게 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제사장의 역할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Çϳª´ÔÀ»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 입에는 불의가 없고, 진리의 법이 있었습니다. 화평과 정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죄에서 돌이키게 하였습니다. 입술로 지식을 지키며, 입으로 율법을 구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장의 의무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왕 같은 제사장”들의 삶이 이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왕과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나라로 부르십니다. 그냥 나라가 아니고 거룩한 나라입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거룩하시기에 우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게 구별하셨습니다. 신명기 7장 6절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였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거룩이 구별이라면 무엇으로부터 구별되어야겠습니까? 물론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악한 나라”로부터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도님들, 그리고 청년들,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를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와 세상의 모임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술이 없고, 식후에 구름과자가 없는 것 말고 무엇이 다릅니까? 서로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주기 전에 세상과 동일한 시기와 질투가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여러가지 이유들 중에 일부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교회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똑같다는 것입니다. 똑같은데 무엇하러 교회에 출석하냐는 겁니다. 그냥 있는 자리에 있으면 되는데 말이죠. 메스컴에서 교회에 관련되어있는 사건이 터지면 꼭 이 말이 붙습니다. “목사 아무개”, “어디에 있는 무슨 교회”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교회들이 세상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음이 마음이 아픕니다. 그보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굳이 묘사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덧붙여서 기사를 써내는 이면에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는, 목회자는, 장로와 권사는 무언가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렇게 구별되고, 구분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갖다 대는 잣대와 나에게 대는 잣대는 달라야 합니다. 보통은 다른 사람에게는 타이트한 잣대를 대면서, 나에게는 느슨한 잣대를 댑니다. 하지만 그렇게 달라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느슨한 잣대를 대면서 넓은 마음으로 포용을 해준다면, 나에게는 타이트한 잣대로 눈물의 회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나라가 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어떤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유하셨습니다. 우리는 원래 죄에 속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들이셨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의 ‘슬레이브’라는 책에 보면 자세히 적혀있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종의 개념은 노예의 개념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노예는 값을 지불하고 사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노예는 주인의 신분에 따라 같이 신분이 상승되고, 때로는 주인의 양자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을 치르고 사들이셨습니다. 그 값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피 값으로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노예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자 삼으시어 기업을 이어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마치 출애굽한 백성들이 애굽을 그리워한 것처럼, 그 노예의 시절로 돌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 곳에서 불러내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죽음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