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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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특별히 그 지역의 특성을 이해해야 그 편지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라오디게아라는 지역의 특성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실크로드의 중심지역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람과 물류들이 모여들었고, 그들과 함께 돈이 모이는 도시였습니다. 돈이 모여드니 그에 관련된 금융업이 발달했고, 은행도 생겨났습니다. 얼마나 부유한 도시가 되었는지, 주후 강력한 두 차례의 지진에도 로마의 지진보수 지원을 거부하고, 자력으로 회복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옷감과 의류제조업에도 일가견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특히 이 지역에서 나는 면과 검은 양모는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또 라오디게아가 유명세를 탈 수 있었던 것은 '부르기아 안약'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안약을 제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도시 안에는 유명한 의과대학이 있었고, 이곳 출신의 의학교수가 동전에도 새겨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유한 도시에도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생활용수, 즉 수자원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후에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시작은 항상 수신자와 발신자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이며, 개교회의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발신자는 항상 예수님을 수식하는 표현들로 등장하는 데,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등장합니다. 우리는 그저 아멘을 기도가 끝났을 때 다같이 외우는 구호나 표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멘의 원래 의미는 '진실', '진리'를 뜻합니다. 기도가 끝날 때, 우리가 아멘하는 것은 "그 기도가 진실로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혹은 "저도 같은 마음으로 기도합니다."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이 원어로 이 아멘이 사용될 때, 그 뜻은 "진리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진리이시며, 진실하십니다. 아들이신 예수님도 같은 속성을 지니심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고, 믿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증언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내용 중에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이신 예수님을 증언하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증언을 받는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며, 증언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증인이 아니라 죽기까지 충성하셨던 증인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 되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 예수님께서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동역하셨습니다. 일곱 교회를 살펴오면서 매 편지의 머릿글을 통해 살펴본 예수님께서는 능력과 권세가 풍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친히 편지를 쓰십니다. 우리는 이 편지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서신에 집중 해야 합니다. 그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의중을, 그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께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 책망의 내용이 시작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5절) 어떤 분은 "차가운 것은 나중에 깨달을 수라도 있는데, 미지근하면 자기의 죄를 깨달을 수 없어서 예수님께서 싫어하신다."라고 말씀을 전했더군요. 그분 이번에 구속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에서 정확하게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십니다. 차가운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차가우시길 원하십니까, 뜨거우시길 원하십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뜨거운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그래서 "그럼 우리는 뜨겁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건 이 "차갑거나 뜨겁거나"가 신앙을 수식한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앞서 라오디게아가 부유한 도시였지만, 생활용수의 부족함이라는 결핍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그 내용입니다. 생활용수가 부족하고, 부유했던 라오디게아는 근처 지역에서 생활용수를 공급받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두 도시가 히에라볼리와 골로새입니다. 히에라볼리는 라오디게아에서 북동쪽으로 9km 정도 떨어져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파묵칼레라고 지금도 터키에서 유명한 온천지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수로를 통해 온천수를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골로새는 라오디게아에서 동쪽으로 14km 정도 떨어져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만년설이 있을 정도로 높은 '바바'라는 이름의 산이 있는데, 이 만년설이 녹아 내려오는 차가운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골로새로부터 이 차가운 물도 역시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뜨거운 온천수나 시원한 만년설이 10km 남짓의 수로를 따라오다 보면 그 원래의 성질을 상실한 그냥 미지근한 물이 되는 것에 있었습니다. 물이 부족했던 라오디게아에서야 이게 어디냐 싶겠지만, 사실 큰 손실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라오디게아를 책망하시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책망이 지금 우리에게 향한다 해도 우리는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없을 것 같습니다.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6절) 우리의 원래의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창조의 모습의 그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첫 신앙의 그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뜨거우십시오! 그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서십시오!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으십시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예수께서 하나님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살기에 자신의 삶을 내어드렸습니다. 그 사랑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승전보를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차가우십시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잠 25:13)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추수하는 농부에게 얼음이 동동 떠있는 시원한 냉수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얼음 냉수와 같은 이가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강렬합니다. "미지근한 너희를 입에서 토하여 버리리라." 예수님께서는 견디실 수 없으신 것입니다. 본질을 상실한 그를 견뎌낼 수 없으실 만큼 증오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의 미지근함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이 상실한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내용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자기들을 부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이 많았기 때문에, 먹고 살기에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면 다 되는 것 같은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다른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해봐야합니다. 이 편지는 라오디게아 시민들을 향해서 쓴 편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작에서 분명히 수신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였습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이렇게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호 2:8)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15절에 예수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정작 이들은 자신들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으로 세 번에 걸쳐 반복되는 것은 이들이 믿고 있었던 물질에 관한 내용입니다. 눈 먼 것은 또한 그들에게 큰 자랑이었던 부르기아 안약과 관련되어있습니다. 벌거벗은 것 역시 그들의 자랑이었던 직조산업에 관련됩니다. 그들에게 큰 자랑이었던 그것들이, 그들에게 때로는 신앙의 대상처럼 여겨졌던 그것들이 그들을 채워주거나 눈을 뜨게 해주거나 벌거벗음을 감추어주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경고의 메시지를 남깁니다. 디모데전서 6장 9절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부하다고 생각하나 정작 가난한 자들,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가지지 못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주어지는 명령은 그분의 사랑입니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너희들아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해지라"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정금"을 말합니다. 불순물이 들어있지 않은 깨끗한 금을 말합니다. 벌거벗은 너희들아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흰 옷 역시 정결함을 상징합니다. 제사장들은 대속죄일에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갈 때, 하얀 세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계시록에서도 "흰 옷 입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와 어린 양 앞에" 서는 모습을 그립니다. 눈 먼 너희들아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눈이 멀어있으니 분별하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니 깨닫지 못합니다.
세 번에 걸쳐 반복되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더욱 주의해서 봐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연단한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어디에서 가지고 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본질을 회복하는 방법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질을 회복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께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 되신 그분께서 우리를 A/S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반복되는 동사는 "사서"입니다. 무언가 대가를 지불하고 사오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거저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시겠지만, 말씀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이 누워있으면 누군가가 먹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불로 연단한 금을 소유하는 것과 흰 옷을 입는 것과 안약을 구하는 것이 거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들어갑니다. 이 자리에서도 말씀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자리에서 미지근하게 앉아 있어봐야 예배 후에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주일을 지켰다는 뿌듯함도 아닌 안도감에 떠나는 것 밖에 남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Laodicean"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현대에 "냉담한 사람"으로 번역됩니다. 우리의 냉담함을 보십시오. 설교의 청중으로 가장 어려운 세대가 중학생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씀을 전해도 냉담한 그들은 설교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내가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데 실상 중학생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배에 나올 때, 친구들을 만나러 혹은 간식을 먹으러 혹은 부모님께 등을 떠밀려 온 것처럼 지금 이 예배의 시간에도 같은 마음으로 나온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냉담한 심령으로 영적인 귀를 닫고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고 나온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책망과 징계는 부모님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너무 사랑하셔서 "열심을 내라" 권면하십니다. 무엇에 열심을 내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회개하라"라고 강렬한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그 회개의 결과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 기다리셨는지 알 수 없지만, 그분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누군가가 나와서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바로 "회개하라"이며, 문을 여는 것이 바로 "회개함"입니다. 문을 열었을 때, 예수님께서 들어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을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저는 정말 이 은혜의 감격이 너무 커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대체 우리가 그분께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가 문을 닫고, 우리가 나오지 않는데, 왜 그분께서 문 밖에서 우리를 부르시며, 문을 두드리십니까? 대체 우리가 그분께 어떤 의미이기에 친히 우리와 먹고, 교제하시기 위해 우리를 방문하십니까? 그분은 그냥 토해내시면 끝인데, 굳이 왜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음의 기회를 제공하셔서 회개하기를 요청하십니까? 이게 은혜이고, 이게 사랑입니다.
굳이 죄의 노예 되었던 우리를 십자가 보혈의 값을 지불하시고 속량하셔서, 굳이 노예의 신분인 우리를 양자 삼으셔서, 굳이 그분의 보좌에 함께 앉을 수 있게 하시는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겨내십시오. 성도님들의 매일의 전투에서 승리해내십시오. 지켜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