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 교회

계시록 일곱교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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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 교회에서 황제의 신전을 지음으로 황제의 숭배가 시작되었다면, 버가모 교회에서는 황제의 숭배가 꽃을 피웠습니다. 버가모는 처음 황제의 신전을 건축하지는 못했지만, 아우구스투스, 트라야, 칼리굴라 등을 위한 신전을 줄줄이 건축해나갔습니다. 또한 이렇게 황제의 열렬히 지지한 결과로 로마로부터 여러 혜택을 받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버가모에게 자치권과 재판권, 심지어 사형까지도 집행 할 수 있는 법의 집행권까지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버가모에 로마의 최고 법정을 지어주었고, 사람들을 버가모를 "정의의 칼" 그리고 "검의 권세"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사자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버가모 사람들은 로마가 준 권력을 가지고 우쭐해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며 정의의 칼이라고 부르니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이 교만해있었습니다.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 노릇 한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검을 드시는 순간 세상의 권력들은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분께서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버가모 교회가 있는 곳이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버가모가 얼마나 썩어있는지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특별히 버가모는 우상숭배에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우스, 아테네, 디오니수스와 아스클레피오스를 숭배했는데, 그 중 아스클레피오스가 버가모의 주신이었습니다. 그는 의술의 신으로 여겨졌는데, 뱀이 휘감긴 지팡이를 들고 다녔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과 마치 아덴에서 바울이 보았던 것과 같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비문이 데메테르 신전에서 발견된 것을 보아도 그들의 우상숭배가 극에 달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머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버가모 교회에도 순교의 피가 흘려지고 있었습니다. 순교자 안디바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을 통해 예수님께 "내 이름을 굳게 잡은 충성된 증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런 명예로운 이름을 얻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것이 사실상 제자도의 끝입니다. 선생이신, 먼저 살아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한 믿음을 따라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는 죽음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믿음을 포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생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의 길을 따라 간 것은 안디바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뒤를 따르며, 믿음을 잃지 않았던 버가모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도 책망 받을 거리가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발람은 민수기 22장에서부터 25장까지 나오는 이야기의 핵심 인물입니다. 모압의 왕인 발락은 자신의 영토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짓밟히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발람을 시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시킵니다. 발람은 처음에는 거부하였지만, 물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 일을 수락합니다. 길을 가는 중에 발람이 탄 나귀가 세 번이나 길을 이탈해서 발람을 다치게 합니다. 발람이 나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범죄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이 본문에서는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민수기 31장 16절에 그 배후세력이 밝혀져 있습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결국 발람은 이스라엘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을 만들어둡니다. 서머나 교회가 칭찬을 들은 것은 이런 안디바의 죽음을 보면서도 그 믿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같은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위협을 이겨냈던 그들의 믿음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이 딱 우리 인생 같습니다. 그들을 넘어지게 했던 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검도 아니었습니다. 태산처럼 거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넘어지게 한 것은 우상의 제물과 행음이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이나 행음이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던 버가모 교인들을 넘어뜨린 것이 이상합니다. 그 이면에 발람의 교훈이 있었습니다. 발람의 계략이 아니라 발람의 교훈이라고 기록되어있는 것은 그가 어떠한 가르침을 버가모에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교훈이 어떤 것이었는지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힌트를 더 주십니다. 15절에 보니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발람의 교훈이 니골라 당의 교훈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에서의 발람과 신약에서의 니골라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발'과 헬라어 '니골'은 둘 다 '전염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히브리어 '람'과 헬라어 '라(오스)'는 둘 다 '백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둘은 "백성을 전염시키다"는 같은 뜻의 단어입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니골라 당에 대해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칭찬 받았던 내용이 니골라 당을 미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6절입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 당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구원 받은 자로써 살아가야 하는 삶이 없습니다. 야고보서에서 그렇게 강조했던 "삶으로 살아있는 믿음을 보이라"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덕폐기론을 주장합니다. 무율법주의를 외칩니다. 이들은 영지주의와 섞여서 육체는 더럽고, 영은 깨끗하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 받기 때문에, 육체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교묘한 거짓은 버가모 교회를 내부에서부터 썩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 딱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딱 방콕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갖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는 이 곳에서 살면서 우리는 분명히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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