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시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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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때, 이휘재라는 신인 개그맨을 스타로 만들어줬던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BGM만 들어도 추억에 잠기게 만드는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인생의 문제 앞에서 "그래 결심했어"하면서 결정을 내리면 다른 결정에 대한 결과는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두 결정 모두에 대한 결과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죠.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때론 결정을 내리기가 참 힘들고, 그러다 보니 '결정장애'라는 단어까지 생겨났습니다. 오늘도 힘겨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애굽 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핍박과 노역을 당하는 중에도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점점 많아지자 바로는 태아가 남자일 경우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 와중에 레위 가족 중에서 잘 생긴 아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를 3개월동안 숨겨서 키웁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나면서 울음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자칫하면 가족들이 전부 몰살 당할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몰래 키울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 아래에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참수를 당했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맹수의 먹이가 되고, 어떤 이들은 산채로 로마의 밤을 밝히는 횃불로 태워졌습니다. 이런 만행들이 로마인들에게 오락거리처럼 여겨졌는데, 이를 키르쿠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이 오늘 날 우리가 사용하는 서커스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조롱거리가 되었던 사람들은 당장 내일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두려움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경 안에서도 이런 상황 가운데 있었던 인물들은 얼마든지 등장합니다. 포로시대를 살았던 다니엘은 간신들의 계략에 의해 사자굴에 던져졌고, 페르시아의 여왕이었던 에스더 역시 하만의 계략으로 인해 동족 이스라엘의 몰살이라는 위기에 놓여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애굽의 압제 아래에서 그들은 선택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은 이후에 모세라는 인물을 만들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결정적인 인물이 됩니다.
이들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사자굴의 다니엘은 밤새 사자와 함께 있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털끝 하나 상치 않고 생환됩니다. 에스더 역시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삼촌 모르드개와 하만을 몰아냅니다. 모세 역시 그랬습니다. 모두 해피앤딩입니다. 하지만 로마의 키르쿠스 아래에 희생되었던 이들에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그대로 겪어내야 했습니다. 그냥 죽음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차이가 이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는 죽음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어떻게 믿음의 선조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는 데 도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는 명언을 남깁니다. 사면초가, 독 안에 든 쥐.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때로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의 정신을 보입니다. '어차피 죽기 밖에 더하겠어?' 뭐 이런 거죠. 세상 사람들도 같은 상황이라면 똑같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의 핍박에 죽임을 당했던 그리스도인들은 과정 가운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아직 결과가 아닙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10:22) 이 말씀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이며 위로가 되겠습니까?
죽음의 위협이 없더라도 그들의 자세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큰 격려가 됩니다. 우리는 이곳에 나그네로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돌아갈 본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예전에 구원론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서 "이미" 받은 구원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에 대해서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이 원리는 적용됩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는 오늘 새벽 설교와 앞으로 말씀을 통해서 계속 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아직'입니다.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직이지만,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당당하게 죽음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결국 모세의 부모는 최후의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3개월 된 아이를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한 나무상자에 담아서 나일 강가에 있는 갈대 사이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아이는 바로의 딸에게 건져져서 모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고, 공주의 아들로 이집트의 왕족이 받는 교육을 받게 됩니다. 모세의 부모는 몰랐습니다. 공주가 모세를 건져내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상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최상의 시나리오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 애굽 병사의 눈에 띄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저 갈대 사이에 상자를 두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 있는 가족들의 품을 떠날 때, 하나님의 음성을 신뢰하며 순종으로 나왔습니다. 어디로 가라는 구체적인 지시가 없었지만,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흐름에 삶을 맡겼습니다. 자신이 세워서 가지고 있던 명예와 지위를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전하는 삶에 평생을 내어바친 바울도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불확실한 미래에 두려웠겠지만, 최소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고, 순종하며 매달릴 하나님의 보증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달랐습니다. 대안이 없었고, 말씀도 없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은 대부분의 아브라함이나 바울보다는 모세의 부모입니다. 아브라함과 바울처럼 알려주셔도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필요한데, 우리에게 당장의 고민은 그 믿음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그 결정이 어떤 결과를 만들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 상태에서 결정을 어떻게 내리십니까? 가끔 저희에게 오셔서 이런 일들에 대해서 묻는 분도 계십니다. 목사에게 나오는 답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답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그냥 말씀을 이야기 해드립니다.
자, 질문은 하나님의 음성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가입니다. 우리는 참 식상한 대답을 듣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이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지에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말씀에 전문가가 되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생터사역원의 전문강사 수준까지 가시길 원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모두가 가서 가르치시라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좋겠죠. 근데 그게 지금 드리는 말씀의 본질은 아닙니다.
성경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답이 보입니다. 무엇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행동을 하면 아내가 좋아할지 저는 압니다. 아내를 아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지를 알기 위해서 말씀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가끔 우리가 듣는 말씀이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하지 못한다고 그랬지요. 그렇습니다. 이 생각에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속을 시원하게 해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충성된 사자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나님께서 좋아하실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결정이든 하세요. 선택하시고 기도하십시오. 모세의 부모가 그랬을 것입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모세의 부모에게 최선을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실 것으로 믿고 숨겨서 키우는 것과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을 믿고 나일 강에 띄우는 것 중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런 문제에 있어서 성경에는 답이 있습니까? 이런 문제는 솔로몬의 재판과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요게벳의 노래"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마치 모세의 어머니인 요게벳이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는 것 같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작은 갈대 상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 어떤 맘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말 보고 있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 흔들, 흘러내려 가는 그 상잘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릴 수 밖에 없는 결정 앞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입니다. "내가 내린 결정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을 때, 언제든 돌이킬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혹은 "이것이 제가 아는 가장 가까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후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걱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합당한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건져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불확실한 시대에서 입니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지혜를 저는 이렇게 정의해봅니다. "불확실함 속에서 불확실한 것을 쫓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지혜" 요게벳의 노래의 후렴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이 찬양의 가사는 픽션입니다. 성경에 이 가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이 정신은 수도 없이 나옵니다.
성경을 보며, 기도를 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참 많이도 물어왔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심에 좌절도 하시고, 답답해하시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가르치다 보면 이런 부분이 참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만약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것들이 성경에 없다면, 여러분의 질문이 잘못되어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등부 아이들의 질문을 듣다 보면 참 참신한 질문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제가 아는 한에서 모든 것을 알려주려 합니다. 아직 배우는 과정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에 우리 권사님들, 집사님들께서 저에게 똑 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 겁니다. "불분명한 것을 쫓지 마시고, 분명하게 주어진 명령에 순종하세요." 성경에 주님께서 주신 명령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당장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 하나 지키기도 힘든데,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이 명령을 수행하기도 버거운데, 말씀 하신 적도 없는 문제들에서 허우적거려야 합니까?
라틴어에 "Carpe Die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와서 유명해진 말이죠.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 대한 "욜로"로 하기도 합니다. "You only live once." '한 번 사는 인생 즐겨라' 뭐 이런 뜻인데, 저는 까르페 디엠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모여서 우리의 미래가 만들어집니다. 그렇다면 불확실함 속에서 불확실한 것과 불완전한 것과 썩어져 없어져 버릴 것들이 아니라, 확실한 것과 완전한 것과 영원한 것을 쫓으며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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