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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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도시 중에서 규모로는 제일 작은 도시인 두아디라는 철제 병기를 제조하는 도시였습니다. 또한 옷감 염색 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자색옷감장수 루디아가 이곳 두아디라 출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를 신봉하는 도시였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시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대장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불꽃과 금속입니다. 가장 피부에 와닿는 비유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불꽃 같은 눈은 예수님의 통찰력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 빛난 주석과 같은 발은 심판을 실행하는 예수님의 힘과 능력을 나타냅니다. 즉 그분께서 가지고 계신 능력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이러한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것이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여기에 한 번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이 역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를 섬기는 두아디라에서, 진짜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두아디라 교회에 칭찬과 격려를 하십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여기에서 네 사업이라는 것은 '비즈니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행위를 말하는데, 주목할 것은 이 사업이라는 행위가 복수형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또 뒤에 나오는 "사랑, 믿음, 섬김, 인내"는 각각 단수형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즉 이 본문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라는 너의 그 행위들을 내가 안다"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런 행위가 처음보다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 첫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한 책망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받았지만,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으로 칭찬을 받았던 교회였습니다. 딱 그와 반대되게 두아디라 교회는 거짓 선지자를 용납한 것으로 책망을 받습니다. 두아디라의 교인들은 나름 기독교 신앙을 알고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책망을 받는 사실이 아폴로를 신봉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칭 선지자를 따랐기 때문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 자칭 선지자를 성경은 여자 이세벨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여자"라는 단어는 "~의 아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학설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납득할 만한 것은 그녀가 목회자나 감독과 같은 영향력이 있던 누군가의 아내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아무리 로마령 아래에 있다고 하더라도 여인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쉽지 않은 시대였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래도 남편이 어느 정도 직책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실 두 번째 이유가 더 설득력이 있는데, 그녀를 이세벨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세벨은 본명보다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당시 두아디라에 대한 역사 기록 중에 이세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페니키아의 공주였으며, 이스라엘의 왕비였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로 바알과 아세라 종교를 들여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하게 한 여인이었습니다.
두아디라의 이세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두아디라의 교인들을 꾀어냈습니다. 그가 꾀어낸 방법은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인들은 그 가르침을 용납했습니다. 그가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그 가르침의 결과는 행음, 즉 간음과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행음은 신 앞에서 행하여졌고, 그 자리에서는 우상의 숭배와 바쳐진 제물을 먹는 행위가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까지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의 기회를 잡지 않았습니다. 회개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첫째는 그를 침상에 던지시는 것입니다. 침상에 던져지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와 더불어 간음한 자들이 당하는 심판을 보면 그것이 "큰 환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잡지 않은 이세벨에게는 이미 심판이 확정적이지만, 그와 더불어 간음한 자들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반대로 그의 자녀들은 사망으로 죽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의 자녀들은 육체의 자녀가 아닌 영적 자녀를 말합니다. 즉 이세벨을 신봉하며, 따르던 무리들을 말합니다. 이들 역시 영적 어미인 이세벨을 쫓아 회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자녀'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환난과 죽음의 형벌은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치러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교회가 예수님이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시려" 이 일들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앞서서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분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합니다.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분께서 그분의 공의로, 즉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이세벨을 용납한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성도로서 구별된 신앙을 유지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했던"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다른 짐을 더 지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이기는 자에게" 주어졌던 상급이 이번에는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철장은 강철로 되어있는 홀을 이야기합니다.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것이죠. 나무 몽치로만 때려도 깨어질 질그릇을 철장으로 깨뜨리듯이 다스릴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받은 권세와 동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30장 14절 "그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부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 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예레미야 19장 11절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또한 새벽 별을 그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새벽 별은 동이 트기 전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말합니다. 즉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가장 일찍 알려주는 별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즉 이기는 자에게, 끝까지 지키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권세를 그대로 주시겠다는 같은 뜻을 갖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는 말씀으로 거짓을 드러낸 것으로 칭찬을 받았지만, 사랑이 없어서 책망 받았고, 두아디라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로 칭찬을 받았지만, 거짓 선지자를 용납해서 책망을 받습니다. 그러면 칭찬 받는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지기 바라는 우리는 교회를 어떻게 세워가야 할까요?
공의와 사랑은 서로의 극점에 있지 않습니다. 반대의 개념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