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를 지나는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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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로 인해서 여러 모양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계실 겁니다. 이 기간에 자연이 회복되는 순기능이 보여진다는 소식은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어느 때보다 친밀한 가정의 달을 맞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빠들은 재택근무를 하기도 하고, 엄마들은 삼시세끼 가족들의 식사를 챙겨줘야 하고, 자녀들은 유치원과 학교 수업을 온라인으로 대체하다 보니, 심하게는 24시간을 계속 같이 있는 가정도 있을 겁니다. 정말 지쳐가는 시기이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본다면 저희가 언제 이런 시간을 가져보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이런 시간을 40여년동안 보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처음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금방 도착할 걸로 예상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40여년이 걸렸고, 심지어 출애굽의 1세대들은 전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 아이였던 자녀들도 있을 것이고, 당시에 태어난 아이들도 있을 것이고, 또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으로 치면 중년에 이르기까지 광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광야에서의 삶을 직면한 현실 속의 가정에 적용해보려고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외출에 제약들이 생겼습니다. 중고등부 친구들에게 간식배달을 가서 만나보니, 저를 만나러 콘도 밖으로 나온 것이 몇 주 만에 집밖으로 나온 것이라 하더군요. 어떤 분들에게는 단순히 제약이 아니라 고립되어있는 지경인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이 참 광야 같지요? 그런데 굳이 코로나가 아니어도 과거의 우리는 광야를 걸어왔고, 가까운 미래의 우리도 계속해서 광야를 가게 될 것입니다.
단순하게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노예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내시고, 홍해를 건너 구출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이들에게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지 않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삶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우리의 인생에 대입해보겠습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랬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강권적인 은혜로 자유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보혈이었습니다. 그렇게 구원 받은 우리는 이 땅에서의 남은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땅에서의 여정이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고난의 삶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도 목적지가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굳이 코로나가 아니어도 우리는 광야를 살아가는 나그네들입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가족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은 어떠했을까요? 이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보이는 하나님을 자기들의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금으로 만든 송아지였습니다. 애굽에서 보았던 신의 모습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고, 그 우상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우상이 바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우상입니다. 어제 전주새에도 비슷한 말씀을 드렸었는데, 오늘은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의 믿음을 키워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이 커지면 우리의 구원이 확정됩니까?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그렇게 경계는 율법주의로 가는 겁니다.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구원은 믿음의 크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의 크기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결정적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그들은 수 차례 불순종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 입구로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중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용납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열 두 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게 됩니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정탐꾼 중 열 명은 가나안 정복을 비관적으로 보았습니다. 그 땅 거민들은 강하고,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을 뿐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와 그 보고에 의해 통곡하는 이들은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들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2-3절)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의 의견을 달랐습니다. 민수기 14장 9절입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결국 하나님께서는 14장 30, 31절에서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후 광야를 유리하면서도 이들의 불순종은 계속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이 오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배고프면 그곳에 먹을 것이 많았다고 하고, 목마르면 모세에게 득달 같이 달려듭니다. 수 차례 말씀 드렸지만 인간은 죄로 회귀하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끊임 없이 깨어있으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새로운 세대는 그런 부모님들을 보고 자랐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끝나지 않고, 그들의 다음 세대를 향합니다. 오늘 우리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을 반면교사 삼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고난이 왔을 때, 원망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까지의 여정은 온갖 난관과 걸림돌들이 있을 겁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을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걸림돌들을 넘어서는지, 어떻게 고난을 이겨내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갖은 방법으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곧 우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우상들에 대해서는 워낙 자주 들으셨으니, 짧게 읊어본다면 돈, 자녀, 자아, 신념 등등. 하나님의 말씀, 명령 앞에서도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는 그것들이 우상입니다.
저는 아직 육아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 농사가 제일 어렵다는데, 지금도 얼마나 어려운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전에 청년시기의 교사생활부터 지금 주일학교 사역까지 한다면 중고청을 양육하는 사역은 20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이거랑 육아랑 어떻게 같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보고, 느낀 것들을 주일 설교의 기회가 왔을 때 성도님들께 전하고 싶습니다. 또 이 부분은 제가 맡고 있는 부서들을 목회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작년부터 시작한 것이지만, 수련회나 MT를 갈 때,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시간 되면 바로 출발합니다. 걱정들이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30분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늦은 친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잘합니다. 그래서 '늦으면 니 손해'입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주일 예배 와달라고, 수련회 같이 갈 수 없겠냐고 애원하지 않습니다. 올 수 있는데, 안 오겠다는 친구들에게는 그냥 이렇게 말합니다. '너 안 와? 그럼 나는 이제 너 기도 안할꺼야.' 유치해 보이시죠? '안오면 니 손해입니다.' 아이들이 수련회나 행사에 올 때 기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냥 노는 거요? 재미있는 거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재밌으면 더 좋겠지만, 설문조사를 해보면 말씀과 기도의 은혜를 누리는 것을 기대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 부분이 충족되면 이후에는 오지 말라고 해도 옵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역하면서 경험하는 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부모님들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주일학교는 온라인으로 예배합니다. 그냥 핸드폰 갖다 놓고, 클릭 한번이면 들어올 수 있는 온라인 예배도 안들어오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속상한 건, 학교 수업은 지각 안하고, 코로나 사태에도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예배에 소홀한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이 모습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 같으십니까? 아이들은 부모님을 봅니다. 아이들은 교회의 어른들을 봅니다. 지금의 우리의 자녀교육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도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과 교육은 사라지고, 이 땅에서의 삶만 남는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또 이렇게 말씀 드리면 어떤 분들은 집에 가셔서 자녀들에게 말씀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대를 잘 이해하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관점에서 조언과 잔소리의 차이입니다. 첫째, 자신이 모범을 보이면서 하는 말은 조언이고, 자신도 안하면서 하는 말은 잔소리입니다. 둘째, 밀접하게 잘 형성되어있는 관계가 깔린 상태에서의 말은 조언이고, 그냥 남보다 좀 나은 관계에서 던지는 말은 잔소리입니다. 셋째, 자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은 조언이고, 자녀 덕에 내가 어깨에 힘주고 살고 싶어서 하는 말은 잔소리입니다. 이 중에 하나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중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결국엔 잔소리가 됩니다.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점검해보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부모가 하나님을 어떻게 거역하는지, 어떻게 불순종하는지, 어떻게 대적하는지를 보고 자랐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은 자녀교육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른 세대로 만드셨습니다.
결국은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는 느보산에서 모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부모님의 삶과 하나님의 섭리를 비교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 자신을 형성해온 모든 것들과 모세를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의 통치와 비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해서 여리고에서 전리품을 챙겼던 아간으로 인해 아이성 전투에서 대패하는 불순종의 대표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정탐꾼의 보고에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원망하였던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온 회중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아간을 처벌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광야의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우리는 광야에서의 삶을 살 것입니다. 또한 좁은 의미에서 코로나 사태라는 광야를 지내고 있습니다. 끝날 것 같으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광야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내느냐 입니다. 그 모습을 우리의 자녀들이 보고,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에 소홀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광야에 평생 머무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광야는 지나가는 곳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입니다. 우리 태국한인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교회들이 광야를 잘 견뎌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