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 지혜

야고보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444 views
Notes
Transcript
우리가 야고보서에서 살펴보고 있는 다섯 가지 주제는 따로 떨어뜨려놓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믿음과 인내와 지혜와 행위는 모두 유기적인 관계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여서 관계,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갑니다.
퀴즈를 하나 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지혜로운 왕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화가 있습니다.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우기는 장면이 그 시작입니다. 지혜로운 솔로몬 왕은 칼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아이를 반으로 나눠 반씩 여인에게 나눠주라 명합니다. 그랬더니 가짜 어머니는 그렇게 하라고 하고, 진짜 어머니는 차라리 아이를 살려서 다른 여인에게 주라고 하죠. 그래서 진짜 어머니를 찾아주었다는 예화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지혜를 보여주는 예화라면 지금 이 시대에는 얼마나 더 지혜가 필요할까요? 진짜와 가짜가 존재하는 상황, 옳고 그름이 분명한 상황은 차라리 쉬운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 옳고, 그름이 모호하지 않습니까? 솔로몬보다 지혜로운 이들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를 살펴보기 전에 지식과 지혜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습니다. 지식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해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입니다. 지혜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지식은 '인식과 이해'의 범주이고, 지혜는 그 지식을 활용하기 위한 '처리 능력'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1,000조각의 퍼즐을 지식, 그 퍼즐을 맞추는 능력을 지혜라고 보며 맞습니다. 지혜가 지식보다 낫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런데 퍼즐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퍼즐이 없으면 쓸데 없는 능력일 뿐입니다. 지혜와 지식은 따로 떨어뜨려서 딱 구분해놓을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퍼즐이 되어주고,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퍼즐을 맞추는 능력이 되어주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맞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1장 52절에 보니,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식의 열쇠는 율법, 즉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잠언 1장 7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 즉 그분의 퍼즐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9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이 두 구절에서 지식과 지혜는 각각 다른 원어로 적혀있습니다. 번역 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뭔가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상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퍼즐도 성경에 있고, 그 퍼즐을 맞추는 법도 성경에 있으니, 결국 하나님의 여호와되심,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며, 스스로 계신 분이시며, 만왕의 왕이심을 믿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혜의 영역 안에서도 두 가지의 지혜를 구분 지어서 말합니다. 첫 번째는 세상의 지혜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명확하게 대비하고 있는 성경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알다시피 고린도는 아테네와 함께 아가야 지역, 즉 그리스 지역에 속한 큰 도시입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모여 서로의 지식과 지혜를 뽐내기에 일생을 바치고 있었던 곳입니다. 이런 철학사상가들을 '지혜의 스승'이라 하여 '소피스트'라 부릅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행 17:21) 그들은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 지역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대조하며 가르치는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기 쉽도록 편의상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눠보려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로 본다면 또 하나의 지혜는 '구원 받은 자로 살기 위한 지혜'로 구분 짓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은 하나님의 지혜가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는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 드러난 것을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즉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숨기셨다가 드러내신 것을 깨닫는 지혜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숨겨두셨던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 3장은 지혜로운 건축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건물의 터를 닦아놓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터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결국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혜가 되어주십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리석음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8) 세상의 지혜에 대해서 어리석은 자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서로 완벽하게 대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뭐 이런 류의 지혜를 꺼내어 놓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지혜는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아를 죽이고, 자신의 정욕을 죽이고, 자신의 주장을 죽이고, 자신의 높아짐을 죽여야 예수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패배해서 승리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어리석은 모습이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5)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다 한들 하나님의 어리석음에 미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고전 1:27) 세상의 지혜를 아무리 자랑한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로도 그들을 부끄럽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세상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지혜를 따라 예수께서 가셨던 죽음으로의 길, 패배자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들어 죽음에서 부활로, 패배에서 승리로 옮기셨듯이, 우리도 약속하신 구원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7장에서도 건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으로 등장하는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이 지혜가 구원 받은 자로 살아가기 위한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습니다.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죠. 지혜로운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지혜로운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결국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반석 위의 집은 견딜 수 있었고,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반석이 지혜라면, 그 위에 세워지는 건물도 지혜입니다. 반석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지혜라면, 그 위에 세워지는 건물은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지혜입니다.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는 그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온유합니다. 이렇게 보려고 하니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음절을 보면 됩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그러니 시기와 다툼으로 자랑하는 것, 진리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는 것은 온유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시기는 비교에서 시작되고, 자신을 갉아먹습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잠 14:30) 또한 잠언은 거만하여, 다른 이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자들의 미련함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이 거만과 교만이 표출되는 하나의 방식을 야고보는 자랑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툼은 용납하지 못함에서 시작됩니다. 특별히 이 다툼은 이기심으로도 번역이 됩니다. 즉 시기가 다른 사람과의 비교라면, 다툼과 이기심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에서 벌어지는 문제입니다. 나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와 시기를 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원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들이 자랑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 할 것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자랑 할 것이 없는데, 자랑을 하려니 그 자체가 곧 거짓이 되고,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안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드러내어 자랑하는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약 3:15-16)
위로부터 난 지혜는 이들과 다릅니다.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가득한 선한 열매,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 마치 성령의 열매를 보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의 열매와 지혜의 열매는 결코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17절과 18절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두 가지에 집중하려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성결은 자신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내부로부터, 외부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즉 거룩하게 지켜내는 것이 성결입니다.
또 야고보는 지혜의 사람을 화평하게 하는 자들로 정의합니다. 야고보서의 지혜는 특별히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서 집중합니다. 시기와 다툼을 경계하며, 화평을 강조합니다. 이 관계는 구체적으로 다음 주에 더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위로부터 난 지혜로 화평을 이루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갖기를 원하시는 지혜입니다. 화평은 '화목하고 평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또한 온유입니다. 또한 이것이 인내, 즉 용납할 수 있는 삶입니다.
앞서 고린도전서 3장에서의 지혜로운 건축자는 그리스도의 터를 닦아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건축물을 쌓아가는 것은 '다른 이'로 등장합니다. 건물을 짓는 데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가지만 티가 나지 않는 일이 터를 닦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굳은 일을 다하고, 결국 건물을 짓는 것은 다른 이에게 양도한다니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지혜의 핵심은 이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관계의 지혜를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합니다. 주실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다음 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