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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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님께서 회복의 시간을 가지시는 동안 제가 다섯 주에 걸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번에 걸쳐서 성도님들과 함께 야고보서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5장으로 구성되어있는 야고보서를 매주 한 장씩 살펴보는 방식은 아닙니다. 야고보서의 전체 내용을 다섯 가지의 주제로 재구성해서 살펴보는 것이, 이번 야고보서 강해설교의 방식이 될 것입니다. 다섯 가지의 주제는 이러합니다. “믿음, 인내, 지혜, 관계, 행함”
먼저 야고보서의 배경을 같이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는 누구인가? 사도행전 12장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2장 2절에 보니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라고 야고보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 17절에 보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게 하라…” 야고보는 좀비입니까? 앞서 2절의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 즉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야고보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13장 55절에 보니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여기에 나오는 야고보가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형제이며,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처음부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복음 7장 4절을 보면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며 예수님께 조롱 섞인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랬던 야고보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 보면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라고 바울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야고보를 찾아오시고, 부활을 보이시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인 야고보가 성경의 한 권을 적게 되었다는 것은 별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 때문에 이 책은 아주 긴 시간동안 논쟁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로 이 본문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4)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의 구원교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한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한쪽은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하니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던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서 성도님들께서 정리가 되어가시는 부분이실 것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4주 후에 다시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행함보다는 믿음에 집중하려 하거든요.
오늘의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 여기까지만 나가보겠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고,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면 완전히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을 야고보서 강해의 첫 주제로 잡은 이유는 후에 살펴볼 “인내, 지혜, 관계, 행함”의 모든 내용이 믿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든다고 하고”, “지혜를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고 전합니다. 그런 야고보가 믿음을 가볍게 생각하고, 행함만을 강조했다니요. 그래서 오늘 야고보서를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누군가가 소원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믿음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소원성취에 대한 믿음과 보이지 않지만 이루어질 것에 대한 믿음 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바라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성취하시는 그 대상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라는 것들 너머에 있는 그 실상입니다. 가령 아이가 부모님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부모님이 분명히 그것을 사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 아이가 장난감이 자신의 손에 쥐어질 것을 믿는 확신을 넘어, 부모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봅니다. 따라서 믿음은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 역시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니 믿음의 선배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선배들이 얻은 증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신뢰하였고, 또한 그 신뢰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실행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의 결과로 이들은 역사적 증거들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믿음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가실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믿음은 도구이며, 목표입니다.
종종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갈급해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도 하나님을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아요.” 그때 우리는 뭐라고 그들에게 말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믿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것이 틀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적용을 하곤 합니다. ‘아, 나는 믿음이 생기지 않아. 아직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아서겠지. 하나님께서는 언제 나에게 믿음을 주실까?’ 여러분의 마음을 솔직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아서입니까, 아니면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던 도마에게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가 되라.”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성소의 휘장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깊은 교제를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나의 믿음 없음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하고 엠마오로의 여정을 떠난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와주셨습니다.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 말씀하셨지만, 그들에게 말씀을 풀어 설명하셔서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간구는 이러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 24절에 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아버지는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것이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17장 5절에서의 예수님을 향한 사도들의 간구를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근거를 보이시고, 은혜의 손을 이미 내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것은 구원이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에 대한 면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문 밖에까지 오셔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그저 우리가 문을 열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밀어 주신 그 은혜의 손을 어떻게 마주 잡을 수 있을까요? 바울은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는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는 자리를 사모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제 다 이루었으니 말씀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아도 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자의 삶, 의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끝났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직 이 땅에 우리를 남겨두셨습니다. 아직 우리의 경주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배를 향해 오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인 베드로가 자신도 물위를 걷고 싶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려오라고 말씀하시지요. 베드로는 몇 걸음 걸은 후에 바람소리에 놀라 물에 빠지고 맙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물위를 걸으실 수 있는 분 계시면 손 한번 들어보세요. 그런데 베드로는 이것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위협에 마음에 의심을 품었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여, 마음에 의심을 품었으니 죽어 마땅하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물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인들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매주 예배에 나오시는 많은 성도님들이 우리 교회에 계십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중에 얼마나 바라는 것들의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말씀이 심기어지는 자리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손을 내밀어 주셨고, 우리가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마시고, 믿는 자가 되십시오. 그 손을 잡으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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