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 관계
Notes
Transcript
차별하지 말라.(2:1-9) 아주 유명한 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일화의 진위여부에 대한 말들은 많지만, 분명히 교훈하는 바가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교회에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부임하는 주일예배시간에 노숙자 복장을 하고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예배 전에 교회의 이곳 저곳을 돌아보았지만, 안내를 해주기는 커녕 인사를 건네는 성도님도 한 분 없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니 안내하시는 분께서 제일 뒤 구석자리를 안내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이 되고 목사님의 부임을 담당하시는 장로님께서 강단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소개했습니다. 성도님들은 박수를 치며 환영했습니다. 제일 뒤에서 노숙자 복장을 한 목사님이 강단으로 나오는 모습을 본 성도님들의 박수소리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도님들에게 오늘 자신이 겪은 일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한주동안 이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시고 전하며 강단을 내려왔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하신 임금께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마 25:35-36) 묻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임금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45)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 상황입니다.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는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2:2-4)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7) 예수님께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 첫째 계명이며,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 12:30-31)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우리의 이웃은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들 뿐입니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이 누구인지 가르치십니다. 율법사의 질문은 "누가 이웃입니까?" 였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방인은 당연히 이웃의 자격이 없었고, 창녀와 세리, 죄인들은 유대인일지라도 이웃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의 질문을 바꿔드리겠습니다. "누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말을 조심하라.(3:1-12) 말을 타고 달릴 때, 말을 제어 할 수 있는 것은 큰 말의 작은 입에 물린 재갈입니다. 큰 배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것도 작은 키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 역시도 혀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말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샘이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을 동시에 낼 수 없습니다. 무화과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저주하고, 욕하고, 죽입니다. 야고보는 이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혀가 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작은 불씨가 큰 산을 태우듯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온 산을 태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가 축구팀에서 골키퍼를 합니다. 골키퍼는 참 외롭고, 쓸쓸한 자리입니다. 공격수는 10번의 기회 중에 9번을 실수해도 한 골을 넣으면 찬사를 받지만, 골키퍼는 9번을 막아도 한 골을 먹으면 욕도 같이 먹습니다. 말이 그렇습니다. 100마디를 해도 문제가 없다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는 게 말입니다.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3:8)
야고보에게도 역시 대안은 없습니다. 성경에도 혀가 내뱉는 말과 지혜로운 자의 말과 어리석은 자의 말에 대한 것들을 주의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조심하고, 조심할 뿐입니다. 분명 말을 뱉는 자의 주의가 첫째입니다. 하지만 혀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100마디 중에 한번의 실수가 튀어나온다면, 우리는 듣는 입장에서의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몇 일 전에 재미있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1)
비방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4:11-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비방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만들고, 재판하는 자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만들고, 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비방하거나 비판하지 말하는 것이 야고보의 설명입니다. 조금 비약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종종 예화로 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가요? 예수님께서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1-2) 누군가를 비방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자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은 성정의 죄인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자격은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계십니다. 죄인인 우리가 누군가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죄인인 우리가 재판장의 자리에 앉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서로 원망하지 말라. (5:7-11) 원망하지 말라는 본문의 위치가 참 재밌습니다. 앞으로는 주의 강림이 가깝다는 본문이 있고, 뒤로는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욥이 보았던 하나님의 결말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원망하지 말라는 본문과 함께 물 밖에 서 계신 심판주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인내 중에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서의 인내를 말씀 드렸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거리 경주를 오래 참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야고보 시대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견디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재림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재림의 소망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소망의 사라짐은 원망과 불신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모두가 원망과 불신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을 굳건히 하며, 욥과 같이 견디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욥도 중간에 하나님을 원망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완주하여 하나님의 복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을 것 같으십니까? "서로"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악한 것은요, 죄악은요, 참 무섭게 전염되는 속도가 빠릅니다. 전에 한번 말씀 드렸었습니다. 혼자 짓는 죄도 더럽고, 추악합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함께 짓는 죄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돕는 공동체로 누군가 죄를 범하고 있을 때, 그 길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의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5:19-20) 이게 우리 동역자의 역할입니다. 판단하고, 비방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를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눈에 소망이 없어 보인다 하여 서로 원망하는 것은 원망을 전염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고린도전서 3장 본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자가 그리스도 예수의 터를 닦은 본문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공동체는 13-18절 같아야 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서로 고백하며, 서로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 허탄한 것의 자랑(4:13-16)
야고보서 1장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관계의 지혜를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합니다. 주실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다음 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