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 행함

야고보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77 views
Notes
Transcript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여자친구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은 하는데 하는 행동을 보면 이건 남보다 못합니다. "여보 그 동안 수고 많았어. 내가 오늘은 맛있는 식당 예약해뒀어. 나가서 맛있는 것들 사줄께." 하고선, 자기는 스테이크 시키고, 아내에게는 물 한잔 시켜주면서, "사랑해." 하면, "아, 나는 정말 사랑 받고 있구나. 저렇게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잖아."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남편이 일주일 출장 간다고 하는데, "어, 너무 보고 싶을 것 같아. 일 잘 보고 빨리 와요." 하면서 짐을 한 2년치 싸주면, '아내가 날 정말 그리워하겠구나.' 할 남편이 있을까요?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그래서 분명히 하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은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먼저 구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야고보는 여기에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첨언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에는 구원의 유익이 없다. 행함이 따르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라고 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처럼 믿음은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라고 백 날 얘기해봐야 내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예화가 있습니다. 집주인이 문을 닫은 후에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주여 열어주소서." 주인이 말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밖에서 다시 외칩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다시 주인이 말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주인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행악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행악을 단순히 '악을 행하는 자들'로 풀이하시면 안됩니다. 행악은 선을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행악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최면을 겁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진짜인 것처럼 믿고 살아갑니다. 이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진짜 구원을 받았는지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결정되고, 우리가 진짜 믿고 있는지는 우리가 행하는 삶의 모습을 통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심지어 본문 19절에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마태복음 8장에 보며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자 두 명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귀신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마 8:29) 귀신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없습니다.
진짜 믿음을,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자들의 삶을 야고보는 설명합니다.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아들과 두 종을 데리고 번제에 사용할 나무까지 챙겨서 모리아로 향합니다. 무려 3일 길을 걸려서 멀리 모리아가 눈에 들어옵니다. 거기에서 종들을 기다리게 하고 이삭과 함께 나머지 여정을 떠납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결박하고,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 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려 했던 아브라함은 진정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을 '순종의 조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왜 그럴까요?
종들을 기다리게 하며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했던 말을 보겠습니다. 5절입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분명히 "우리가 돌아오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산을 오르는 중에 이삭이 묻습니다. "번제에 필요한 칼과 나무와 불이 모두 있는데, 정작 제물이 될 어린 양은 어디있습니까?" 다시 아브라함은 뭐라 답합니까? 8절입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보여주기 쇼를 한 것일까요? 아니요. 아브라함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는 죽은 이삭을 다시 살리시던지, 어떠한 방법으로건 그 약속을 이루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히 11:17)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표현해야 그 사랑을 믿습니다. 행위로 믿음을 드러내야 그 사람이 믿는 지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중심을 통해 그 믿음을 보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12절입니다. "제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6절입니다. "네가 이 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하나님께서는 그 행함을 통해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을 위함이십니다. 행함을 통해 믿음이 드러남은 그 사람을 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훈련시키시고, 세워가시는 방법입니다.
라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탐할 때에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래서 라합의 가정은 여리고가 무너질 때에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6장 2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히 11:31)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으로 불리웁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단순히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그 믿음을 증명한 사건들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적극적인 행함입니다. 방관하지 않는 행함이며, 관계를 향한 행함입니다. 15-17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형제와 자매가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구원만을 바라는 것도 살아있는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고린도전서 3장 본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자가 그리스도 예수의 터를 닦은 본문입니다. 그 위에 다른 이가 와서 건물을 짓는다고 지난주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건축자는 갖가지 재료들로 건물을 짓습니다.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들"로 짓는데, 시험이 날이 오면 불로써 시험을 한다고 합니다. 14, 15절을 보니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라고 말합니다.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공적에 따라 상과 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본문을 마저 읽으면 이렇습니다. "해를 받겠지만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건물을 지은 이는 어찌되었던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 가운데서 자신만 간신히 구원을 받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에 말씀 드렸지만, 터 위에 건물을 지은 사람은 행함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행함은 있었으나 온전한 행함이 없었던 이들을 말합니다. 온전한 행함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역시도 본문에 힌트가 있습니다. "자신은 구원을 받되"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서 살아온 이들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구원은 간신히 건질 지 모르겠지만 해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죽기 전에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것은 저는 그날에 상을 받고 싶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15-17절을 본다면 확실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관계 가운데 적극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필요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면 예수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남자만 5천명이 유월절 디베랴 들판에 모였습니다. 유월절에 유대인이라면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했지만,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갈 여비도, 제사비용도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을 고치시고, 주린 그들을 먹이십니다. 이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18절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야고보는 믿음을 보여주라고 하지 않고, 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여주는 것과 보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가령 악기 중에, 제가 드럼을 연주하니까 드럼을 연주할 때, 하나의 리듬을 치기 위해서 수많은 연습을 합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리듬이 완전히 몸에 익으면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그냥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완전히 자신의 것을 습득하여 보이기 위해서는 보여주기는 훈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22절 본문에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함께 일함으로 믿음을 온전하게 세웁니다. 1장 3절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2장 1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믿음을 가졌으니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5장 15-16절에서는 "믿음으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합니다. 모두 믿음이 수반된 행함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행함을 이루셨습니다.
지난주 주일 설교에서 성도님들께 기도제목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보내주신 분들이 열 분 정도 계셨습니다. 이번 한 주, 새벽마다 기도제목들을 보며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들으신 분이 300여분인데, 어찌하여 문자는 10개 밖에 안 왔을까요? 문자 보내는 것을 잊으신 분도 계실 것이고, 다른 분들 기도하시기도 바쁠 텐데 저까지는 괜찮아요 하시는 분도 계셨을 것입니다. 문자 보내는 것을 잊으신 분도 계실 것이고요.
성도님들, 제가 오늘 교회식당에 만 바트가 들어있는 돈봉투를 숨겨놓았습니다. 먼저 찾으시는 분은 그냥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선물입니다. 아무도 안 일어나시네요? 제 말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만약에 여러분이 제 말을 믿었다면 바로 일어나셨겠지요? 아니면 예배 시간에 일어나서 찾으러 나가는 낯뜨거움을 감수하기엔 금액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한 10억하면 움직이실까요? 아니죠. 제가 그만한 돈이 없다는 믿음이 더 크시겠죠.
지난주에 성도님들께서 보내주신 기도제목들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제목들을 새벽마다 꺼내어놓고 같이 기도했습니다. 제가 진짜 이렇게 기도했다는 것 믿으십니까? 진짜요? 저를 믿으세요? 근데 여러분이 저를 믿는다는 사실을 제가 못 믿겠습니다. 아까 아무도 안 나가셨잖아요. 저를 진짜 믿는다면 아까도 식당으로 가셔서 봉투를 찾아보셨어야죠. 네, 없습니다. 그런 봉투 없어요. 있다가라도 찾아보려고 하지 마셔요.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