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징계는 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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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자식을 둔 부모님이라면 자기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할 때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부모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길이 파멸과 죽음의 길이라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으려 할 것이지요. 타이르고 설득하다가 안되면 매를 들어서라도 돌이켜 세우려 할 것입니다.
지금을 가정에서나 학교에서의 체벌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져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희 어렸을 적에는 선생님께서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매를 드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부모님들은 자기 자식이 선생님께 매를 맞고 온 것을 알면 선생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다음에도 자기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더 엄하게 벌을 주시라고 당부하셨지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선생님과 부모님의 체벌은 미움의 발로가 아닌 사랑의 증거였지요. 자식이 제자가 바른 길로 가길 원하시는 애정의 적극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행하였던 징계는 세상적인 복을 위할 때가 대부분이었지요.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세월을 아끼고 미래를 철저히 준비하라는 것이지요.
가령 공부를 열심히 하라든지,유용한 기술을 철저히 습득하라든지,아니면 대인 관계를 잘 형성해 두라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은 장차 우리가 자라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남을 부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와는 다르시지요. 하나님은 곧 썩어 없어질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영원토록 변함없는 영적인 복을 위해 우리를 벌하시는 것이지요. 즉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 풍요롭고 부요 하도록 하기 위해,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곳까지 다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장차 우리에게 예비된 그리스도의 영광을 충분히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징계 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함으로 그분의 거룩하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12장은 소망을 13장은 사랑을 다루고 있지요. 11장에서 나열한 과걱 믿음의 옛 선진들을 소개하고 나서 다시 현재로 돌아와 자신들에게 당면한 고난에 대처하여 인내함으로 거룩에 이를 것을 권면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영생의 보상을 기대하였지만 사실상 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질 때까지 영생의 상급은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곧 다시 오신다 하시던 주님은 소식이 없지요, 자신들을 향한 박해는 날로 심하여 지지요. 그들의 신앙으로는 그들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성경을 통채로 볼 수 있기에 성경 속의 고난의 인물들을 바라보며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하며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탓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가운데 겪어야 하는 시련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빨리 해결받기를 원하지요.
기독교를 떠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자신에게 닥친 시험과 고난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이지요.
자신보다 훨씬 악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은 버젓이 잘 먹고 큰 소리치고 사는데 왜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는 시련만이 지속되는가?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교회를 떠나고 있지요.
7절에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우리가 부모님의 꾸짖음을 들을 때에 철들기 전과 후는 그 받아들이는 자세가 천지차이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때에는 그저 섭섭함과 반항심이 앞서지요. 그래서 그 꾸짖음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지요.
그러나 철이 들어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실 때에는 죄송한 마음이 앞서고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신을 고치려 애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기에 저와 여러분들을 아들로 받아들이셨기에 징계 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을 달리 말하면 징계받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징계가 주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힘들어 하고 억울하기 전에 우리가 징계를 받고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왜 나에게 지금 이 징계가 주어졌는지 헤아려 보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이고요.
왜냐하면 살면서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들은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무관하게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하게 일어나지요. 즉 많은 사건들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섭리에 지배를 받지는 않으나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일반적인 법칙과 현상에 영향을 받습니다. 똑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면서 동일한 자연 환경에 처하여 살기에 자연 재해나 사고 질병 등의 모든 위험 요소를 함께 안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안 믿고 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하면 갑자기 그의 인생 가운데에 기적과 같은 일이 매일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인생이 저절로 평안과 행복으로만 가득하지 않지요. 물론 분명히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면 달라지지요.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어제까지는 지저분하게 보였던 길가에 잡초도 아름답게 여겨지니까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에는 오히려 어떨 때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지요. 더 많이 인내하여야 할 때도 있고요. 더 많이 양보해야 합니다. 더 많이 용서하고 더 많이 손해를 봐도 화내지 말아야 하기에 한 마디로 예수 제대로 믿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에 반드시 내가 확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시139편의 시인인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아멘, 아멘.
말 그대로 ‘징계’는 어원상 “어린 아이를 훈련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징계의 어려움이 여러분들께 닥쳤다면 먼저 들을 귀를 열어 주시길 기도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가 나를 훈련시키기 위함임을 깨달아 참음으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징계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시겠지요.
그것은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성과 죄가 많은 세상과 영원한 형벌을 받게 하지 않게 하시려 우리가 날마다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의 마음이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결코 죄악의 길에 머물게 하지 않게 하시려는 그분의 사랑의 징표임을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선지자를 보내셨고 사사를 보내셨고 왕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렀을 때, 그의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를 위하여 그를 죽음에 넘기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닥치는 모든 문제 앞에서 심지어 내가 내 자신을 대적할 때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일으키시는 사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징계로 인해 마냥 슬퍼하기만 하거나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의 의견대로 결정하고 따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할 그곳을 향해 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영혼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8절에서 말하지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징계가 너희에게 없다면 그것은 너희가 사생자거나 친아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말인지요? 내가 살면서 한 번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영적 자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니면 자녀일지라도 젖먹이와 같은 철부지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단계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넘어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9절에 말하지요.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당시 사회에서 아버지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과 징계받는 자녀가 그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굳어진 매우 자연스런 현상임 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도 감사히 여겨 그들을 공경하였는데 영적 아버지에게는 더욱 복종하고 더욱 감사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징계는 영적 아버지께서 궁극적으로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가르침이자 훈련이십니다.
10절을 봅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 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아멘, 아멘.
대부분 육신 부모들도 자식을 위해 벌을 주지요. 그러나 때로는 부모의 체면이나 위신때문에 혹은 자기 화를 참지 못하여 자식에게 벌을 주는 경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징계하시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어질 육신의 복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징계하심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라고 성경은 말씀하시지요. 즉 주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시련으로 훈련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고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에 복종했던 것보다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징계 앞에 복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을 우리가 너무 가까이서 바라본다면 오히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바른 시각을 가질 수 없지요.
적당히 물러서서 그것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정확히 그 사물의 특징과 생김새를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인생도 그 당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도 지나고 보면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당장은 받아들이기에 결코 즐겁고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히브리 기자는 말합니다. 저는 연단이라는 기독교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성경 사전에는 이렇게 연단을 풀어 말하지요. “스스로 단련된 신앙의 성격”이라고요. 고난을 통해 자신의 심령과 믿음이 단단하여 지는 것이지요. 오랜 수련을 거친 무술인의 손과 발은 굳은 살로 돌과 같지요.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게 되기 전에 포기하거나 물러서지요. 그만큼 고난과 징계는 견디기 쉽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징계의 의미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물리적인 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징계’로 번역된 ‘파이데이아스’의 원형 ‘파이데이아’는 주전 6세기의 헬라어 문헌에서 ‘교육’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내지요. 훈련의 의미입니다.
주의 징계는 우리를 위해서 부모가 자녀들을 훈계와 매로 양육하듯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양육하시는 과정 중에서 사용하시는 방법이십니다. 죄 많고 불완전한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훈련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알게 하시려는 통로인 동시에 우리의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 잡으시려는 것이지요.
본문의 히브리 성도들에게 직면한 그 시련과 가해진 핍박들도 하나님이 그들을 성숙시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허락한 교육의 과정인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파이데이아의 의미는 단순한 훈계가 아닌 인생의 고통스러운 시험 속에서의 인내, 오래 참음에 대한 요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문의 주의 징계는 영적 자녀가 된 성도에 대한 진정한 하나님의 부성애의 표시이지요.
그분의 징계는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임하기 때문에 주의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임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육신의 부모도 사랑하는 자식에게 좋을 것을 가르치고 물려주고 싶어하지 나쁘고 못된 것을 남기려 하는 부모는 없지요.
지금 겪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 그분만을 신뢰하고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는 결코 멸망하는 악에 빠지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릇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부모는 실상은 진정으로 그들을 위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나 혹은 불의에 가담하고 있음에도 하나님이 전혀 상관 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셨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지요.
우리를그냥 내버려두시는 것보다 더 참혹한 벌은 없습니다. 그것은 징계가 아니라 버림받는 것이니까요. 유기된 자가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5절과 6절은 잠언3: 11-12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아멘, 아멘.
이 말씀은 만약 우리가 지금 징계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버려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로 여기신다는 증거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의 육신적인 안목은 현재 처한 상태에만 집착할 수 밖에 없지요. 그리하여 그 고난이 지니고 있는 깊은 의미와 유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쉽게 말하지요. 물론 고난은 결코 즐겁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지요.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또 그 고난은 우리를 훈련시켜 더욱 절대적인 신앙으로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킴을 또한 믿습니다.
즉 고난을 통과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유익에는 받은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지속적이며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큰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인간이 가지 고 있는 근시안적인 성향을 벗어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지금보다 더 멀리 바라보는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장이라 일컫는 히브리서 11장에서의 과거의 성경의 선진들이 보여준 믿음의 증거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위에서의 인내하심의 본을 달게 받아 이곳에 모인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이라 여김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 그 믿음의 자녀들을 그들의 유익을 위해 징계하신다는 것을 알아 반드시 그 믿음의 경주를 인내하며 달려가야 함을 확신합니다.
11장의 모든 믿음의 영웅들이 과거에 뛰었던 바로 그 경주에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자신의 순서가 되어 그 바통을 이어받아 뛰는 것이며 이 경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저희의 자손에 자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우리 후손에게 그 바통을 이어줄 때까지 고단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인내해야 할 것을 믿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합니다.
주의 징계가 당시에는 고통스럽지만 참고 인내함으로 연단 받으면 영원한 영적 열매를 맺을 것이므로 지금 지치고 피곤하고 연약해진 손과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워 하나님을 의지하여 끝까지 견디어 실족하지 말고 곧은 길로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고난 가운데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징계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선하고 놀라운 뜻을 깊이 발견하시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징계를 감사함으로 받으시는 용기와 지혜가 임하시길 또한 기도 드립니다. 징계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하며 선한 데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징계 중에 있다고 여겨질때 징계를 내리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그분의 공의로움을 찬양하는 것은 더 고결하고 더 강하고 더 건강한 신앙을 가졌음을 알리는 한 증거입니다. 또한 그 감사와 찬양의 고백으로 다른 사람들은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자기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남을 탓하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부디 이 귀한 증거의 태도와 세상과 구별된 태도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자녀답게 이 땅의 인생을 사는 청담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주님, 지금도 저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저희는 그것이 왜 일어나야 하는지 전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기쁜 일이며 좋아하며 하나님께 감사 드리지만 그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라면 하나님을 원망하면 살아감을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닥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함인 것을 믿음으로 확신하게 하여 주십시오.
또한 우리 앞에 놓여지는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주시어 하나님 안에서 인내하여 이겨내도록 힘 주시고 그저 연약한 저희를 긍휼하게 여겨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도 저희를 주의 징계로 훈련시키시어 우리로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여 단단한 식물을 먹게 하려 하심을 믿습니다.
감사 드리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