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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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배경을 이야기하고 읽기에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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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로마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에게해를 건너서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한동안 마게도냐에 머무르게 된다.
이 유모(1-3)는 믿음(4-5이 앖어서 죽부인(6-7)을 끓어안고(8-견인) 잔다. 유모(9-11도 구원받고 새생활(12) 안하면 사형선고 (사(사랑빚지고)형(제사랑하고)선(선한일 하고)고)(고해라 _서로 안부를 묻고13-16)를 받은것과 마찬가지다
56-57년 사이 겨울을 고린도에서 보냈는데 거기에서 로마에 들를 것을 예배하며 편지를 보낸다.
1:8~16 / 15:14~29 내용을 정리하면 - 자주 당신들을 방문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렇게 할 수없었다. 우리 서로 영적인 축복을 나누기 위해 당신들을 보기 간구한다.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하나님게서 당신들의 신앙과 변함없는 충성을 전 세계에 걸쳐서 알리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그동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약간의 결과를 보게 되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런 성과를 얻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로마에 정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기초 위에 집을 짓는 것을 나는 항상 피하고자 했다. 또한 선생이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당신들은 서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선포했고 교횔ㄹ 개척했다. 나의 사역은 완성되었고 다음으로 서바나(스페인)으로 가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먼저 예루살렘에 가야만 한다. 그리고 서바나를 향할 것인데 도중에 잠깐이라도 들르고 싶다. 그리하여 성도들 가운데서 새로운 힘을 얻고 이를 통해 여행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로마 교인들을 만나게 되기 3년 전에 썼다. 편지를 보면 로마의 교회는 방금 시작한 미숙한 상태가 아님을 알수 있다. 바울이 말하는 ‘다른 사람'이 기초를 놓았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10 ‘로마로부터 온 나구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때는 주후 30년에 오순절을 축하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찾아온 군중들 가운데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 당시 유럽의 전체 인구의 20% 정도의 인구가 로마로 집중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로마로 유입될 수밖에 없다. (지중해 특성상)
주전2세기경 로마 시내에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거주지역이 존재했다. 주전62년 품페이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지방으로부터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에 의해 그 수는 더 증가하게 된다. 그들은 자유인으로 해방된다. 주전 59년경 키케로는 아시아 지방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보내진 유대인들의 성전세를 금지하여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 한 관리를 변호한다. ‘여러분들게서는 그들(유대인들)의 수가 얼마나 많고 이들이 잘 단결되어 있으며 공적인 집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ㅇ잘 알고 계십니다'라고 변호했다. 이런 가운데 주후 49년경에는 유대인을 로마에서 축출하기 위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마도 이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로마로부터 쫓겨나 고린도까지 오게되고 이때 바울을 만나게 된다.
당시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을 보면 ‘유대인들은 다시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수가 너무 많아 난동을 거치지 않고는 이들을 시내에서 쫓아낼 수가 없다. 실제로 폭력을 사용하여 축출해내는 대신 그들의 조상적으로부터의 전통에 따른 집회를 갖는 것을 금지시켰다'
주후 52년 디베료 황제 때 노예 출신 탈루스는 이미 역사서 3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던 날, 초자연적 암흑이 발생한 일등을 설명한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의 죽에 관한 이야기가 로마의 비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때론 로마 장군의 아내와 같은 신분에 있는 이들이 외래 종교(기독교)를 믿거나 그와 유사한 행동을 했다는 기록등도 있다. 특히 바울은 로마서에 기록한 개인적인 안부를 묻는 이름들을 보면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세부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안드로니고스와 유니아를 가리켜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했다. 로마교회의 시작 또는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고 (창립멤버 ?)
루포의 경우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구레네인 시몬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라는 추측도 있다. 롬16: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고 했는데 막15:21 구레네인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안디옥교회에서 바울이 어머니처럼 보살폈을 것이다.
바울은 실제로 주후 60년 2월 경에 로마에 도착한다. 아마도 이때 많은 로마의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그의 도착을 미리 알고 만나기 위해 꽤 멀리까지 마중을 나왔다고 본다. 죄수의 신분으로 성전을 더럽혔다는 중대한 죄목으로 고소를 받았고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오게 된다. 그때 산헤드린 지도자들의 요청에 따라 유대 총독에게 넘어갈 것을 알고 로마 시민권을 주장해서 로마의황제에 의해 직접 재판을 받을 숭 ㅣㅆ도록 항소한 것이다. 그렇게 도착후에도 최소 2년간을 재판을 기다리면서 동행했던 ‘누가와 아리스타쿠스'등과 교제를 나누었고 ‘마가' 역시 함께 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마가는 55-60년 사이 베드로와 마가가 로마를 방문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때 마가는 로마에 남았고 이들에게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으로 추측한다. (마가복음의 기원) 그리고 60년 경의 누가와 바울은 이 마가의 기록을 기초로 기독교의 기원과 벌전에 대한 복음서를 기록했다.
그후 2년 후 바울은 로마에서 석방되었다. 떠난 직후 베드로는 로마를 방문했고 이곳에서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베드로전서'이다. ‘함께 택하심을 입은 바벨론의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말미에 ‘내 아들 마가'로 부터의 문안을 첨가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에게 닥칠 ‘불같은 시험'은 곧 로마를 통해서 시작되는 시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로마법은 엄격하게 유대교 그리고 그 안에서의 한 분파로 기독교를 보고 이를 합법적 종교로 인정을 했다. 따라서 내부의 분파적 싸움보다 합법적 종교로 인정하고 보호했지만 60년대 들어서면서 더이상 기독교를 유대교의 일파로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할례와 율법의 거부는 서로가 분명히 다른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오론테스 강의 쓰레기들이 테베르 강 물 속으로 흘러들어온다'는 식으로 로마인의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로마 사회를 분열시키고, 혁명적 기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로마의 사회에서 가혹한 제한을 받기 시작한다. 유대교는 법적으로 보호를 받았지만 기독교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후 64년 로마의 대화재에 책임이 기독교로 돌려졌다. 네로 황제에게 화살이 돌려지고 방화법으로 지목을 받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속죄양을 구하게 되었다. 역사가 타키투스 - 죽임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했다. -
로마의 세계와 예수의 세 계
누가복음 2장 아우구스투스의 호적령에 따라 요셉이 베들레험으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63년 부터 서기 14년의 시기이다. /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평화라고 말할 정도로 안정과 질서를 확립했다. 국가의 관리를 위해서 호적하라고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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