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뉴얼 (Renewal)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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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 년 전에 이집트로 선교훈련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호텔에 투숙하려고 로비에 기다리다가 한 젊은 이집트 여성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집트는 공식적으로는 기독교가 허용되지만 회교국가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절대로 금기 사항이었고 전도하다가 발각되면 바로 추방을 당하였지요. 그러나 그날의 대화는 전도라기보다 토론에 가까웠기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요점만 말씀 드리면 그 이집트 자매에게 아무리 이야기하여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와 예수님의 신성 그리고 성육신이었습니다.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고 어떻게 신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냐는 거였지요. 아무리 설명을 하여도 소용이 없었고 더구나 서로의 짧은 영어 실력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의 소통은 무리여서 안타깝지만 거기서 멈추고 그만 둔 일이 기억나네요.
여러분, 이 이집트 회교도 자매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주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교리가 바로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며 특징적 교리이지요.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의 신성, 이 두 가지를 부정한다면 다른 어떤 기독교 교리를 모두 지키고 살지라도 그것은 기독교가 인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성탄의 신비를 ‘거룩한 연약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아기 예수와 고통 받고 굶주리며 멸시당하는 사람들 안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이처럼 묵상을 하였는데 무척 공감이 가는 표현이지요.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아기 예수님을 우리 마음으로 기념하지요. 여기서 기념한다 함은 단지 옛 일을 회상하고 기린다는 뜻만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을 오늘 여기서 다시 새롭게 경험하는 것을 뜻하지요. 성탄절은 단지 이천 년 전의 사건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절기가 아니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여기서의 사건을 경험되어야 하지요.
무엇 때문에 모든 것에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는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땅에 오심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아는 것이 기독교의 영적 깨달음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의 전체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러니 영적으로 눈과 귀가 가로막힌 그 이집트 자매는 열 번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 중에서 4-7절은 하나의 문장이지요. 하나님을 구주로 부르면서 시작이 되지요. 영어성경에는 ‘But’으로 시작되지요. 그래서 이전 3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인간을 사랑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구세주가 되어 죄에 물든 인간의 역사(3절) 속에 들어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절이지요.
5절의 중생의 씻음-영어로 ‘rebirth’-은 세례를 의미하고, 세례를 통해 날마다 거듭나는 인생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됨을 설명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건물을 부시지 않고 다시 고치는 것을 리뉴얼(renewal) 한다고 하지요. 새롭게 함이란 그 리뉴얼을 의미하지요.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은 허름한 단독주택을 리뉴얼하여 회사로 사용하고 있지요. 아주 오래된 집이라 다 부수고 새로 지을까도 생각하였지만 너무 돈이 많이 들어서 리뉴얼을 하여 쓰기로 하였습니다. 기둥과 벽과 지붕은 그대로 두고 말 그대로 리뉴얼 공사를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새로 짓는 것보다 더 힘이 들더군요.
어쩌면 우리 인간도 영적으로 거듭난다는 것, 즉 리뉴얼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도 아니지요. 아니 아무나 리뉴얼할 수 있지 않지요. 그것은 어마어마한 축복이지요.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4절에서는 성부 하나님을 ‘우리 구주’라고 부르고 또 6절에서는 성자 예수님을 동일하게 ‘우리 구주’라고 부르지요.
이것은 바울이 성부와 똑 같은 신성을 예수께서도 동일하게 지니고 계심을 분명히 하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위대성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입니다.
3절에 나열된 인간의 죄된 현실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의 결과가 구약의 히브리어로 ‘소테르’-‘구주’의 의미이지요.
구원은 철저하게 성부와 성자로부터 주어지며 성령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시는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주셨다고 바울은 6절에서 말합니다.
성탄절은 바로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된 날이라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기념하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이천 년 전의 성부와 성자의 성육신을 오늘 우리 안에서 현재화 시키고 확장시키십니다. 성령의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과거 속에 한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미래도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까지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롬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됨이니” 아멘. 아멘.
오늘 우리에게 성탄절이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도저히 구원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사람이 되신 날이기 때문이지요.
한 생명의 탄생은 신비이며 환희와 기쁨 그 자체이지요. 하물며 이천 년 전 오늘 태어난 아기 예수는 하나님께서 아주 오래 전에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실 분이였고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고 온 세상에 빛과 소망을 가져오신 분이셨지요.
사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지요. 설명을 해도 이해가 잘 되질 않고요.
기독교 신앙이 그대로 믿어지면 그것은 가장 큰 복이지요. 그러나 지적인 사고를 가지고 세상을 사는 현대인일수록 신앙 생활은 하면 할수록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기독교 철학자였던 쉬렌 키에르 케로르는 신앙을 갖는 경험을 이렇게 비유로 설명합니다.
"어떤 언덕 위에 신앙에 관하여 방황하는 사람 하나가 있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인생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여 계속 방황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더듬어 찾아도 그 하나님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찾고 있습니다. 그에게 어느 날 한 줄기의 빛이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 빛이 언덕 위에 있던 이 사람에게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 줍니다. 한줄기 빛으로 인해서 그 길을 발견한 그 순간, 그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이 있지만, 자기에게 다가온 한 줄기의 빛을 보고 지적인 방황의 언덕에서부터 그 길을 향하여 자기의 몸을 던지듯이 뛰어 내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 믿음의 결단이 참된 신앙의 경험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아무리 부족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께는 저와 여러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지요. 오히려 하나님의 눈에 비쳐지는 우리는 매우 중요한 존재들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빛은 아무리 작더라도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요. 작은 불빛이라도 어두운 곳을 환하게 비치는 역할을 다 할 수 있지요. 어두움은 절대로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그 삶이 고단하고 힘들다고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주어진 삶 속에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사는 것이 곧 빛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다가도 살기 어려워지면 언제나 우리는 그 하나님께 또 다시 의문을 품고 살아가지요. 신앙생활이 길어질수록 그 의문은 깊어질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걸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색을 할 수도 없지요. 왜 나는 아직도 온전히 하나님의 음성에 전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며 자꾸 죄 가운데로 빠지려 하나? 어째서 죄의 유혹을 담대히 물리치지 못할까?
그러나 오늘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라 하시며 한 줄기 빛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주어진 삶 속에 주저하지 말고 뛰어들어라’고 하십니다. 나를 믿고 가라. 의심하지 말고 나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여러분, 하나의 촛불로 또 다른 불을 초에 붙이려고 할 때 자신의 빛을 나누어준다고 해도 잃는 것이 없지요. 오히려 불은 나누어 주어도 자신의 것을 잃지도 않고 나눈 촛불로 인해 오히려 그 밝기가 두 배로 늘어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빛을 어두운 구석구석에 나누어 줄 때도 이와 마찬가지이지요.
지금의 내 자신의 모습이 아무리 부족하고 보잘것없다고 초라하더라도 관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극히 어여쁜 자들이지요. 빛은 아무리 작더라도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지요.
아무리 짙은 어두움도 아주 작은 빛으로 물리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빛을 반사해서 내는 그 빛을 당신에게서 요구하십니다. 당신은 조용히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삶으로써 그 빛의 역할을 해내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순종으로 성실하게 수행하는 삶이 곧 빛의 역할이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이유가 되시며 그러기에 우리는 성탄절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리뉴얼이 새로 짓는 것보다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제가 집을 수리할 때에 기존의 방과 방 사이의 벽을 허물고 새로이 하나의 넓은 방으로 개조하고 싶었지만 그 방과 방 사이의 벽이 온 집 안의 기둥 역할을 하여서 절대 없앨 수가 없었지요. 우리가 이제까지 세상적으로 살다 보면 고치기 어렵거나 고쳐지지 않는 아니 고칠 수 없는 심각한 자신의 단점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렇다고 자신의 단점이 많다고 하여서 우리 스스로가 자신이 다시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삶을 살기를 포기할 것인지요?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저도 예전에 몸을 돌보지 않아서 남은 삶은 간경화라는 병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라도 간암으로 악화가 될 수도 있지요.
저는 제가 남은 삶을 설교자의 삶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제 병을 바울이 말한 그를 평생 괴롭힌 가시처럼 여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과 마찬가지로 제가 또 교만하여지거나 포기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배려라 여기고 살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에는 그런 저희의 허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으시어 더 이상 드러나지 않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어쩌다 저와 여러분들의 새로이 살아가는 삶을 가로막을지라도 그보다 더 큰 소망과 지혜와 능력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에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이제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우리가 진정으로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죄와 이웃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하며 나의 마음에 진정으로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시간이 되시기 소망합니다. 또한 참으로 깨끗한 양심과 마음의 청결이 나의 마음에 심겨져 있는지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진정 나에게 평화가 있으며 살아가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진정 나는 진리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질문하여 보아야 하지요.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더 어렵고, 행동하는 것보다 기다리는 것이 더 어렵지요. 내가 하나님을 앞서 행동하고 소리치는 위치에 서 있기보다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성탄절을 맞이하며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성탄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심을 잊으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비록 병원에서 맞이하는 성탄절이지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어렵고 안타까운 시간들이 반드시 여러분들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기간이 되어 더 이상 젖먹이 어린 아이로 남게 하지 않으시고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분량으로 거듭나 우리 구주 예수님과 함께 남은 삶을 리뉴얼하여 새롭게 살아가게 할 것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오늘 기쁜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 드립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하심으로 저희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새롭게 하시어 저희를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 이제 저희로 비록 육신의 죄성이 우리를 어지럽히고 또 다시 죄에 빠트리질 라도 회개하여 반드시 하나님 안에 머무는 삶이 되도록 하시어 구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가 되도록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시길 간절히 사모합니다.
감사 드리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