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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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소아시아 일대에 흩어져 살던 성도들을 위해 썼습니다. 당시 모든 성도들은 이방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애매한 고난을 많이 겪고 있었지요. 즉 드러내 놓고 그리스도인 임을 밝히기 어려웠던 당시 정황상 그들은 여러 가지 경제적.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수의 이방인들 중에서 소수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이들의 형편은 마치 낯선 환경에 처한 이방인이자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들과도 같았습니다. 더욱이 로마에서 발생했던 대 박해의 소식은 이내 이들에게도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 성도들로서는 로마 대 박해의 소식은 커다란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지요. 소아시아 일대에 흩어진 성도들은 그야말로 ‘불 같은 시험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기록된 서신으로서, 불 같은 시험에 직면한 흩어진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굳게 서서 고난을 극복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격려의 서신서인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베드로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그들의 신세를 영적으로 승화시킵니다. 즉 그 당시 성도들은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이방인과 나그네들로서 어려운 삶을 살아가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족속’이며 영 원한 기업인 천국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가는 ‘거룩한 나그네들’이라고 하는 신분적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나그네라는 신분적 정체성을 가지고서,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고난에 대해 어떤 인식과 자세를 가지고 극복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지요. 제일 먼저 태어나는 것은 우리가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되지만 죽음은 극단적으로 본인이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선택의 죽음은 고귀한 것이지요.
태어남과 죽음, 얻는 것과 잃는 것, 그렇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움켜쥐는 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무언가를 던져 버리는 것은 많은 경우가 자신의 결단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였던 빅터 프랭클도 말하기를 “사는 것은 수난 당하는 것이며, 생존하는 것은 수난 가운데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의미 없는 고통을 없다고 하였지요. 유대인이었던 이 사람은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강제수용소인 아우츠비츠에 갇혔다가 살아남았습니다. 고통은 그 의미를 찾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현재 처한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은 고난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너무나 쓴 잔이기 때문에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훈련입니다.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영적 훈련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죄인에 대한 사랑이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내 혈육이기 때문에, 내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그 동안 받은 게 많아서 내가 되돌려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인간을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그 사랑의 절정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지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아멘, 아멘!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베드로의 표현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사신 것 자체가 고난 받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면서 고난을 받는 것이 마치 신앙이 없어서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몸을 가지고 사는 삶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고 누구나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때에는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 하지요. 그리고 성취감을 얻기도 하고 좌절감을 얻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삶의 희비가 교차된다고 할 것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에는 그렇지 않지요. 풍부와 비천 그 모든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은 믿음으로 순종하기에 성공에 교만하지 않으며 실패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지요.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우리 앞에 기쁘고 풍요로움을 기대하지만 오히려 우리의 앞에는 역경과 좌절이 더 많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처음 지나가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참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그 터널의 끝은 있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우리의 이전의 살아온 삶에서 이미 학습하였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려주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가 만일 성공을 미리 안다면 분명히 나태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자신의 불행을 미리 안다면 역시나 실망하고 좌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인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사단의 공격으로 인한 고난이 있으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고난을 감당하고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거듭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세력을 꺾고 승리했다고 말씀하면서도 한편으로 성도들에게 ‘그러니 너희는 이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쉬라’고 하지 않고 이처럼 갑옷을 입고 무장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단과의 싸움이 있을 때 성도는 그리스도와 같은 자세로 싸워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싸우실 때의 모습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말씀과 성령으로 그것도 한치의 타협이나 양보나 후퇴도 없이 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서 몸까지 온전히 드리심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따라서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본 절의 말씀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나를 못 박아 매달 각자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각오로 끝나지 말고 실제로 십자가를 짐으로써 두려워하지 마시고 예수님과 함께 짊어진 십자가에 이제까지의 모든 죄와 정욕을 함께 못 박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 갑옷을 입으셔야 합니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며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시지요. 아마도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요구를 들을 때 ‘왜 당신은 가만히 계시면서 우리에게만 이런 멍에를 맡기시는가’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틴에서 사용되던 멍에는 두 마리의 소나 나귀가 한 조를 이루어 메는 것으로 홀로 메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둘이 메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요구하신 것은 ‘너 혼자 멍에를 메라’는 말이 아니라 ‘나와 함께 멍에를 메자’는 의미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라가면서 메어야 할 멍에는 우리가 혼자 힘겹게 메는 1 인용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메는 2인용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연히 우리의 인생길을 동행하시게 됩니다(마 28:20).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게 되면 예수께서는 우리가 지치고 힘들 때 암탉이 병아리를 품어 주듯이 우리를 품어주기도 하시고 때론 말씀으로 격려도 하시면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멍에와 짐을 감사하게 함께 메고 살아간다면 세상의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나가리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혹 잘못 판단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요.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사단을 꺾고 모든 죄와 고난의 문제를 해결 하셨으니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의 고난은 없으며,따라서 그 주시는 복을 즐기기만 하자. 이러한 주장이 온당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지요.
2절을 보면요,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이유를 다시는 사람의 정욕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하셨지요.
육체의 남은 때란 그리스도를 믿어 살게 된 우리의 이 땅에서의 나머지 삶을 의미하지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위한 롤 모델로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 같이 몸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무엇을 하고 살지를 알아 그 뜻을 따르며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고 그리스도의 짐을 함께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리고 함께 하는 이유는 물론 아프고 상한 심령을 서로 위로하는 시간도 있지만 세상에 나아가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동기와 욕망은 하나가 아니지요.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새로운 욕망이 일어나기 때문에 결국 욕망을 따라 사는 삶에는 결코 만족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욕망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욕망이 없다면 오늘날 인간 사회에는 아무런 의미도 발전도 없었겠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어릴 때는 과자와 장난감을 좇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나이가 들면서 재물,권력,명예 등으로 대상이 바뀌며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찾아 헤매다 결국 빈손 들고 무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를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남은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내 재물을 쌓아 둘 곳간을 걱정하는 자에게 오늘 내가 너를 데려가겠노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요?
베드로는 1절에서 고난 받거나 핍박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할 것을 권면한다. 이 권면을 위하여 베드로는 두 가지 타당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끊으셨다는 것이지요.
그 고난의 목적은 2절에서 기술되었듯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이후에 3절과 4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에 빠져 있었던 안 믿던 시절의 사람들의 세상적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롭게 바뀐 삶의 방식으로 인해 그들을 학대하고 저주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지켜야 합니다.
3절에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이방인처럼 살지 말고 택함 받은 백성처럼 살라는 권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전의 세상적 욕망을 좇아 살던 때는 지금 이전으로 족합니다. 족하다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하니 더 이상 뒤 돌아보지 말고 미련 갖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아주 단순한 누구라도 다 알고 당연한 말씀이지요. 우리가 죄에 빠져 살아온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기간이 얼마이든지 간에 그것으로 족합니다.
여러분들의 입술로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세상의 욕망을 따라 살던 것은 이제 족하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을 이 서신서 맨 처음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의 삶의 신분으로 말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이전의 모든 시간은 그저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지요. 후회도 미련도 갖지 마시길 바랍니다.
지나간 때는 지나간 대로 족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저와 여러분의 육체의 남은 때를 살기를 기도합시다.
지금 내게 있는 것을 나보다 어려운 이에게 나누려는 마음을 주기시기를 사모합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함께 해야만이 그 가치와 존재가 인정받는 것들이 있지요.
우리 앞에 아주 비싸고 아름다운 흔히 말하는 명품 구두가 놓여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 켤레가 아니고 한 짝만 있다면요. 신발은 한 짝만 있어서는 그것이 아무리 비싸고 멋진 신발이어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이지요. 두 짝이 한 켤레를 이루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신을 수 있는 신발로서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인생은 짝이 없어 아무런 가치도 쓸모도 없는 신발 한 짝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우리의 남은 삶이 누군가의 삶 가운데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아주는 인생이라면 앞으로 남은 시간 한 번 살아볼 만한 필요가 있지 않는지요?
이제 2020년이 열흘 남짓 남았네요.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19도 언젠가는 지나간 일로 회상할 과거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포스트 코로나의 때를 계획해야 할 때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겪는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에게는 장차 어떤 의미로 이 고난의 시간이 기억될 것인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입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의 자랑을 위해 행하던 것은 이전으로 족하다는 선포가 우리의 입에서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게 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작은 것부터 사랑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이 땅에 생명과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고, 화해와 용서 그리고 정의와 사랑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게 하옵소서.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참된 용기를 주옵소서.
선하신 주님처럼 저희들도 선한 마음을 품고,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나가는 주님의 참된 제자로 살게 하옵소서. 고난의 의미를 잊지 않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 드리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