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9)

사도행전 강해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57 views
Notes
Transcript
사도행전 강해(9)
사도행전 2장 42-47절
지난 시간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에 마음이 찔려 괴로워하던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는 베드로의 복음선포를 살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이심을 설교했고, 절망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구원을 받는 것을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된다는 말씀을 함께 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은 그렇게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며 신도가 된 삼천 명이 어떠한 모습을 보였는지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살피는 말씀은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들을 살피면서 우리 교회의 모습을 살피고, 우리는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가 3천 명이었고, 그들이 곧 초대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이 초대교회가 있었던 지역이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이를 예루살렘교회라고도 부릅니다. 42절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기록된 내용을 살피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특히 42절 마지막에 “힘쓰니라”라는 표현은 “어떤 일에 계속해서 전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기록된 모습은 초대교회가 매우 크게 신경을 쓰고, 힘을 쏟았던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라고 되어 있어서 마치 기도를 하는 것에만 힘쓰는 것처럼 이해가 되는데, 원문의 의도는 가르침과 교제와 떡을 떼는 것과 기도를 포함한 모든 일에 힘썼다는 의미입니다. 즉, 여기에서 소홀히 여기고, 가볍게 여기고, 뒤로 미뤄야 할 모습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특징으로 세례를 받은 수천 명의 신자들 모습을 처음 표현한 말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들은 가르치는 일을 주된 임무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들은 처음 믿을 때도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후에도 사도의 가르침을 계속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자들은 가르침을 받은 것을 실천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예수님께 배운 말씀들,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이후 사도들의 가르침이나, 서신에 기록된 말씀들을 보면,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데, 아마도 사도들은 신자들에게 이러한 점들,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구약의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지,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었고, 성취될 것인지에 대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쳤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따라서 살아가려는 모습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서도 분명 실천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교제입니다. 교제는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단순히 친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그리고 형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같은 주님을 섬기고, 같은 성령님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더욱 쉽게 교제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교제는 문맥상 44절부터 묘사된 신자들의 모습과도 연결이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제가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임이나 놀이 활동과는 분명 달라야 합니다. 물론 성도들도 서로 취미생활을 같이 하고, 재미있게 놀기도 할 수는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즐거움을 나누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도 간의 교제는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교제는 성령님으로부터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개념은 곧 우리의 교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더욱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면서 나누는 교제는 성령님의 임재가 없는 세상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교제는 어떠해야 한다는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의 존재들 가운데 가장 완벽한 교제를 보여주는 관계가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일체이자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세 분은 한 분 하나님으로 연합되어 서로를 가장 완벽하게 위합니다. 가장 완벽한 교제 가운데 가장 완벽한 사랑과 섬김과 돌봄이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삼위 하나님의 교제에는 자신만을 위한 욕심이나 속임, 위장, 위선, 거짓, 시기, 질투, 부러움, 무절제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자들은 삼위 하나님의 교제를 모범으로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를 위하시듯 성도들 간에 서로를 위해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시듯, 성도들도 사랑해야 하며, 삼위 하나님이 서로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듯 성도들도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서로의 경건을 위해서 섬겨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에 거짓된 교제가 없듯이 성도들도 거짓으로 위장하고, 꾸미고, 속이는 헛된 교제는 없어야 합니다. 오직 진실함 속에서 교제가 이뤄져야 합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설교한다고 해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절망하거나 서로를 정죄하거나 스스로를 책망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들의 모습이 이러해야 한다는 목표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노력할 따름인 것이지, 불완전한 우리가 완전하신 하나님처럼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교제가 삼위 하나님을 닮은 교제가 된다면, 그러한 교제가 이뤄지는 교회는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영광을 우리가 누리기를 바랄 뿐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떡을 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주님의 만찬, 즉 성만찬을 기억하며 행한 것이라고 말하고, 다른 학자들은 그냥 평범한 식사를 말한 것으로 교제의 연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만찬 자체가 평범한 식사 중에 있었던 일이고, 신자들이 가르침과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식사를 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예수님과 그 분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성찬을 기념하기도 하고, 성도들 간에 함께 먹고 마시면서 기쁨을 나누는 것은 친밀한 교제를 이뤄가는데 매우 훌륭한 수단이 됩니다.
네 번째 특징은 신자들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신앙생활의 원동력입니다. 기도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것은 여러 번의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기에서 기도가 공동기도인지, 개인기도인지는 표현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공동의 기도와 함께 개인 기도가 활발하게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개인 기도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고, 교회가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공동 기도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우리에게 개인 기도와 함께 교회가 시간을 내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이 네 가지 특징은 교회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우선순위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 올바르고 참된 가르침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같은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은 교제로 함께 받은 은혜를 나누고, 가르침을 확인하면서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떡을 떼면서 한 가족,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생각과 경험이 성도들 사이에 있어야 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43절을 봅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기사와 표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약속의 메시아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것은 사도들의 사역과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는데, “두려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번역된 단어는 무서워한다는 의미와 함께 경외, 존경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기적이 심판의 기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려움이라는 의미보다는 경외, 존경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다는 단어가 미완료형인 것을 보면, 존경했던 감정이 계속해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경하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자세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갖게 되고, 그 경외심은 사랑과 순종이라는 모습으로 확장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책 중에서 “신앙감정론, 또는 신앙과 정서”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다루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참된 믿음은 참된 정서, 감정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된 신자라면 여러분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하고 경건하면서도 열정적인 감정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정이 계속되기를 소망하십시오.
연인들이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는 감정이 뜨겁다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무뎌져서 감정이 밋밋해지게 됩니다. 그럴 때 두 사람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처럼,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과 그 가운데 발생하는 올바른 감정이 약해진다면, 신앙생활의 활력은 사라지고, 믿음은 의심되며, 구원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 사도들의 기사와 표적이 우리 사이에 없을지라도,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정서가 뜨겁게 나타나기를 소망하십시오.
사람들이 경외심을 품었고 그에 따른 결과가 44절부터 나타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44절부터 나오는 모습은 교제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44절에 “믿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약속의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과 신자들을 구분 짓는 구별점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은 “다 함께 있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 함께 있어”라는 말이 같은 곳에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46절의 표현처럼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은 쉽지만, 마음이 하나가 되어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같은 성령을 받은 신자들에게는 가능한 모습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이 어떻게 삶에서 나타났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것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말씀처럼 사용되는데, 그러한 개념은 아닙니다. 개인의 재산은 계속 있지만,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기꺼이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를 보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물건이나 재산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해도, 소유권은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기록된 표현을 보면, 당시의 개념을 뛰어넘어,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통용하고”로 번역된 단어는 “가지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아서 다른 사람이 가지도록 해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45절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나눴습니다. 여기에서 팔았다는 단어가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재산을 한 번만 팔아서 나눈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팔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이것은 강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근거로 공산주의가 초대교회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틀린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강제하는 것이지만, 초대교회는 자발적인 모습을 가졌습니다. 또한, 신약성경 어디에도 자신의 물건을 내놓고 함께 소유하고, 사용하라는 명령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명령이 없더라도,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성도들은 서로를 위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눠주었습니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과 함께 나눠서 함께 살아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자칫 초대교인들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다고 이해하기가 쉬운데, 이러한 개념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재산과 소유를 포기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형제들이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자신의 것을 나눠주거나, 그것을 팔아서 필요한 것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재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보다 형제를 더 귀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고, 함께 구원을 받은 은혜입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서 나눌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하나된 뜨거운 일체감과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감과 사랑이 식어버리면, 재산과 소유를 나눴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성령의 충만함으로 얻게 된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충만함을 잃어버릴 때, 교회를 망치는 가장 강력한 독이 됩니다. 그러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교회는 계속해서 충만한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46절에서 “날마다” 모였다는 기록은 모든 신자들이 매일 성전에 모여서 모임을 가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신자들의 모임이 매일 성전에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전부가 매일 모인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이 항상 성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이 함께 기도하는 오후 3시의 기도 시간에는 대부분의 신자가 성전에 모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자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집에서 모여서도 떡을 떼며 교제를 나눴습니다.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게 되면, 단순히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상황을 나눠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렇게 또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모습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는 일은 억지로 하거나 불편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했습니다. 여기에서 특이한 분위기가 드러납니다. 기쁨이 넘치는 잔칫집을 보면, 장터처럼 시끌벅적하게 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기쁨과 함께 순전한 마음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순전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소박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초대교회는 넘치는 기쁨과 함께 절제된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쁨이 넘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가득해진다고 해서, 절제되지 않는 모습, 무질서한 모습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고, 그것이 소박한 마음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47절에서 신자들의 모습이 찬양으로 이어졌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즉,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하고 존귀한 자들로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은 47절의 마지막 기록처럼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서도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아름다운 교제는 전도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개인의 집에서 모이며 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습은 너무도 큰 매력이었을 것이고, 그들도 이 공동체에 속하게 되기를 원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신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매우 훌륭한 전도의 도구가 됩니다.
그렇지만, 누가는 바로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위치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신자들의 모습 때문에 구원 받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기록하지 않고,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 초대교회의 모습은 전도에 좋은 도구였지만, 그 결과로 구원 받는 사람이 늘어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설교를 한 모습부터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다는 설명이 없었는데, 47절에 하나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셨다는 기록으로 계속해서 사도들과 초대교회 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설교와 아름다운 성도들의 모습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성과도, 아무런 영광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예루살렘교회, 초대교회는 너무도 아름다운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모습,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팔아 함께 필요한 것을 나누고 섬기는 모습,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된 모습은 너무도 닮고 싶은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리 안에 나타나기를 가장 원하는 모습은 “주께서 더하시는 것”, 즉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믿는 사람을 더하여 주셔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나타내보이시는 것입니다.
사도전통의 가르침을 받기를 힘쓰고, 교제와 떡을 떼며 기도하는 모습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나타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전부 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하늘의 은혜와 십자가의 공로와 성령님의 충만케 하심이 넘치도록 드러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교회는 오늘 읽은 말씀처럼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에 비해 우리의 모습은 너무도 형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은 우리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2000년 전의 그들을 변화시켜서 참 교회의 모습을 보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정하신 때에 정하신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얼마든지 초대교회와 같은 모습을 보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각자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전부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기를 전심으로 기도합시다.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전설과 같은 교회의 모습이라면, 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능력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여,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되기를 소망합시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삼위 하나님께서는 가능케 하시며, 우리에게 허락하실 터이니 그것을 간절히 바라며, 아름다운 초대교회의 모습이 우리 안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기를 소망합시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