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말씀
Notes
Transcript
- 묵도하심으로 수요기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 기도: 기도하시겠습니다.
- 성경 본문: 히브리서 4장 12~16절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설교 주제: 살아있는 말씀
히브리서 3장과 4장의 주제는 ‘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뒤에 누리게 될 ‘안식’을 말합니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생과 수고를 더 이상 겪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던 것처럼, 우리도 진정한 쉼을 얻게 됩니다.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누렸는데, 그 안식보다 더 뛰어난 안식을 우리는 누리게 됩니다. 진정한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안식이라는 결승점에 도달할 때까지 견디며 달려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안식의 약속이 남아있는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안식과 순종이라는 주제 속에서 12절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갑자기 언급된 이유는 순종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깊은 곳을 꿰뚤어보시고 그 사람을 심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켜 떠나간다면 반드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은 그 심판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언급하는 말은 이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시편 95편이 말하는 ‘오늘'에 대한 안식의 약속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주어진 가나안 안식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안식이 아님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식이 여전이 남아있다고 다윗은 말한다. 실제로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들어가게 된 가나안 땅의 안식은 새로운 여호수아, 곧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게 될 안식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여호수아가 준 안식보다 더 뛰어나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영원한 안식이며, 이 세상의 수고와 고생을 그치는 쉼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우리는 이 안식을 누리게 된다. 끝까지 견디며 달려나간 자들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처럼 안식은 상으로 주어진다. 따라서 신자들은 끝까지 견뎌야 한다. 광야 세대가 불순종한 것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기에 이 안식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우리 삶의 가장 깊은 비밀한 것들까지 꿰뚫고 들어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인지 아시며, 우리가 그로부터 돌이켜 떠나간다면 우리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도 된다.
12-13
왜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지 말한다. 왜 불신앙과 불순종을 피해야 하는가. 불순종은 치명적이다. 하나님의 말슴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우리는 살아있고 활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추상적 실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조상들의 불신과 불순종의 죄악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심파하셨던 살아있는 말씀이시다. 그런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같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있고 활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어느 것도 막아설 수 없는 본유적인 능력과 역동성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언급하는 말은 이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살아계신 분인 것처럼 그의 말씀 또한 살아 있는 말씀이다. 또한 그의 말씀은 활력이 있다. 활력이 있다는 에네르게스라는 형용사는 활동적이고 강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문자처럼 가만히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문맥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에 초점이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일반에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 초점이 심판에 있든 구원에 있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하신 것을 이룬다.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은 구약성경에 한결같이 말하는 주제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대로 이룬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 55:10-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좌우에 날선은 양날 검을 말하는데 찌르게 좋은 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양날을 가진 검에 비교한다. 심판하는 말씀의 역할에 중점을 두는 대목이다. 지금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그들을 쳐서 파한 아말렉과 가나안 사람들의 검을 떠올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민수기 14:39-45.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를 누구나 예외 없이 쳐서 파한다.
그 예리한 말씀의 칼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혼와 영 및 관절과 골수는 그 자체가 쉽게 분리되지 않는 영역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구분을 하도록 제안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해서 관절과 골수가 분리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혼과 영의 구분 역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혼과 영을 구분하는 것을 옹호하기 위해 이 절을 사용하기도 하고, 혼과 영과 몸을 분리하는 삼분적인 이해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람이 혼과 영과 몸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말하는데 있지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효력을 강조한다. 이 말은 인간 상태에 대한 심리학적이고 해부학적인 분석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고 들어가는 것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판단의 능력이다. 그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뜻을 잘 판단한다. 사람은 글이나 말로 표현된 것을 판단하는 일도 잘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표현되지 않은 생각과 의도의 영역까지도 잘 판단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마음을 관통해서 그 중심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 하나님께서는 실체를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순종하는지 불순종하는지 아신다. 하나님은 마음 속의 생각과 태도를 아신다.
나타나지 않다는 단어 아파네스는 숨겨진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숨겨진 상태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피조된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진 것이 없다. 온전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판단은 항상 진리와 부합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아신다. 욥기 26장 6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고 말한다. 또한 욥기 28장에서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라고 말한다. 또한 시편 33편 13절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판단은 결코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은 발가벗긴 채 드러난다. 모든 것을 아시고, 마음을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느 인생도 예외 없이 결산된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계락과 책략에 속지 않으신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떨어져 나가고도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드러난다는 단어는 원래 목을 잡다는 의미의 동사인데 이것이 완료 수동태 분사가 ㅇ되어 누군가에게 목이 잡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생생한 은유의 표현이다. 과거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방 선수에게 목이 잡혀 그 약점이 노출된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가 모든 것을 결산해야 할 하나님의 눈 앞에 만물이 다 노출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14절은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것의 종합적인 결론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이야기할 것들의 요약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큰 대제사장이요 승천하신 이이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승천하신 이는 문자적으로 하늘들을 통과하신이라는 표현으로 큰 대제사장을 수식한다. 이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무 수행이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나타낸다. 그는 이미 하늘로 들어가셨고 또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예수님께서 많은 약점과 한계를 가진 인간 제사장이 아니라 흠과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대제사장이시다. 이 사실은 우리가 믿는 도리 곧 우리의 신앙고백이며 우리가 굳게 붙잡고 나아가야 하는 확실한 이유이다. 탁월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선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신자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데리고 가신다. 예수님께선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길을 확보하셨다. 다른 방편으로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또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신 분이다. 우리가 혈과 육에 속한 존재인 것처럼 예수님도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능히 동정하신다. 동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남의 약함과 아픔을 공감한다는 것을 넘어 적절한 도움을 기꺼이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이 무엇인지를 잘 아실 뿐 아니라 그 약함 너머로 우리를 능히 이끌어 가실 수 있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예수님께선 우리의 약함과 비통함을 잘 아신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비통함과 연약함에 무관심하고, 초연하신 분이 아니라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으신 분이다. 예수님은 온전히 시험을 겪으셨고, 죄의 악한 쾌락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죄의 능력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약점과 연약함을 동일하게 갖고 계시지만 예수님은 죄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우리는 자주 시험에 넘어지는 자들이지만 예수님은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셨지만 조금도 죄가 없으시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위엄있는 대제사장이실 뿐 아니라 또한 자애로운 대제사장이시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고난당하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분이다.그리고 우리를 승리로 이끄시는 승리자시다.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구원자시다.
이런 대제사장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혜택인가.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우리를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힘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담대히를 표현한 파레시아는 일반적으로 말의 자유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친구들 사이의 거침없는 대화를 가리키기도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이런 파레시아를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이런 놀라운 특권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누려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자비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다. 또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시간을 잘 맞춘 도움의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참 놀라운 표현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그 때에 우리가 받는 도움만큼 귀한 것이 없다. 우리가 그런 도움을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우리가 자비로운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진노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를 누리는 자들이다.
히브리서는 만물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들이 되며 목 잡힌 것들이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는 가려진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가리려고 하지않는 것이다. 자신의 약함과 실수와 허물을 하나님 앞에 숨기지 않고 내어 놓으면 된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다 고백하면 된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며, 우리의 죄를 덮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경험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는다. 그를 통해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는다 우리가 기도를 토하여 ㅇ겅험하는 크고 작은 응답들이 다 여기에 해당한다. 기도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건 기도 안해도 일어날 만하니까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순간에 일어날 수 있었던 그 일이 왜 ㅇ하필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응답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도움이 항상 우리 앞에 놓여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신자들 역시도 인간의 상황에 수반하는 모든 시험과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돌보시는가? 그들을 돕기위해 할수 있는 것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답을 준다. 우리에겐 온전한 인간이신 대제사장이 계신다. 그분은 시험을 온전히 겪으셨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아신다. 우리의 가진 모든 연약함 역시도 예수님께선 다 알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비통함을 경험했지만 결코 죄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죄의 꾀는 것과 미혹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아시고 그것을 돌보신다. 자애로우시며 초월적이시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가진 죄책과 수치를 해결하셨다.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피해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담대하고도 즐겁게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의 모든 삶의 환경에 하나님의 능력이 미친다는 것을 알기에,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를 따라 은혜와 긍휼을 베푸실 줄 알기에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간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주께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안식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참여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 여정 속에 지치지 않게 하시고, 죄에 굴복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새 힘을 공급해주시옵소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돌보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가 206장 주님의 귀한 말씀은
주기도문: “주기도문으로 수요기도회를 마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