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임재를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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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6:1–11 NKRV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8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주님의 임재를 사모합니다
새해 첫 토요 비전 예배를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립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 585장 입니다.
이 곡은 5백년 전에 종교개혁을 주도하여 오늘날 개신교가 있게 한 마틴 루터가 작곡한 곡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가의 배경이 바로 시46편이지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누군가 그러셨죠. 10대의 시간은 시속 10킬로미터로 지나가고 20대는 20킬로미터 50대는 50킬로미터 60대는 60킬로미터로 지나간다고요. 이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의미지요. 그러니까 나이가 들수록 작은 시간이라도 소중하게 보내야 할 것입니다. 저희 집에서는 아직도 많이는 아니라도 11월이면 김장을 제 어머니께서 하십니다. 젊은 부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는 이제는 거의 김장을 하지 않지요. 20년 전쯤에는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어른들께서는 월동준비를 하셨지요. 그것이 가장 큰 집안의 연례 행사이기도 하지요. 그때 가장 중요하고 큰 일은 바로 그 당시 주 연료인 연탄을 사서 광이라 부른 연탄 창고에 쌓아 두는 것과 김장 김치 담그기였지요. 목돈을 들여 연탄 몇 백장을 창고에 쌓고 김장 김치 몇 백 포기를 힘들게 수고하여 장만해 놓으면 그 해 겨울나기 준비는 다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옛 말에 집안 금고에 금은보화를 감추어 둔 사람은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하였지요. 언젠가는 없어져 버릴 수도 있는 것들에게도 이처럼 위로를 받고 믿음을 갖고 사는 우리네 인생들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가 아닌지요?
백년도 거의 못사는 인생들이 달랑 옷 한 벌 지니고 죽을 인생들이 마치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세상의 것에 집착하며 사는 것이 연약한 우리 인생이지요.
그런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영원한 위로의 증거가 됩니다.
‘피하다’와 ‘도망하다’라는 단어를 구분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구분하시나요?
저의 구분은 이렇습니다. ‘피난하다’와 ‘도망치다’의 가장 큰 차이는 피하는 것은 저를 지켜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고 도망치는 것은 그 고난이나 환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행위이지요.
지금 이 어려운 세상의 상황 가운데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여 줄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야 할 것인지요, 아니면 지금 처한 고난으로부터 무작정 도망할 것인지요?
히브리어 중에 ‘짜르’라는 단어가 있지요. 지금의 상황과 너무도 딱 맞는 단어이지요. 사방이 모두 막힌 갇히는 것입니다.
바로 ‘환난’이라는 단어입니다. 시련과 고통, 숨이 막혀 죽을 것은 지금의 상황이지요. 눈에 보이지 않아 더 두려워 아무도 믿지 못하고 그저 나만 믿는 참담한 상황이지요. 적, 원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에쩨르’라는 헬라어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큰 도움’이라는 단어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하와를 ‘돕는 배필’이라 하지요. 이때의 ‘도움’이 에쩨르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그저 도와주는 도움이지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라는 ‘에벤에셀’이 ‘에벤 에쩨르’, ‘도움의 돌’이라는 뜻이지요.
몸의 일부가 다쳤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상상해 보세요. 모든 신경이 그곳을 도와 빨리 낫게 하려고 집중하지요?
그런데 오늘날 언젠가는 없어져 버릴 수도 있는 것들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믿음을 갖고 사는 우리네 인생들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가 아닌지요?
‘짜르’에 힘들어 하는 그런 인생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에쩨르’와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어떤 관계일까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란 무엇인지요?
정작 성경에 ‘임재’라는 단어는 에스겔37:에 딱 한 번 쓰입니다. 영어로는 presence-현재라는 단어와 동의어로이지요. 공식적인 어학사전에는 등록 조차 되어 있지 않지요. 제가 많이 말씀 드렸던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 가장 적절한 해석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임마뉴엘’-‘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기를 사모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삶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으로,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주의 천사’로 나타났습니다. 주의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이스라엘을 돕는 자였습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밝혔습니다(창 31:11,13) 여기서 천사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났습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로써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출 29:4), 후에 성막에 충만하게 임함으로써(출 40:34-38) 성막을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로서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느꼈을 때의 인간의 하나님을 인식함의 총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실체가 임재하시면 그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더럽고 추한 것과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소멸하시는 불이십니다. ‘불’이라는 표현도 사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죽지 않고도 당신을 인식할 수 있는 형태나 상황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성도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온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분에 대한 경외와 소망과 믿음과 사랑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장하게 됩니다.
반드시 거창한 종교적 의식이나 업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분의 뜻이 세상에 구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듯이 사탄의 미혹된 영혼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여 죄에서 구원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얼굴’로 나타났습니다(창 32:30).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은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우신다는 것은 그 분의 은총을 거두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출 33:14).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한 후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축복의 이름을 받은 곳을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뿐만 아니라 그분의 공생애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산 돌’(벧전 2:5)로 이루어진 ‘영적 성전’(엡 2:22)으로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머무는 곳이며, 구약의 지성소를 훨씬 능가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마 27:50,51).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마음속에 거하고 계시면서, 또한 그 분의 임재를 통해 마음을 정화시켜 성전이 되게 하십니다.
시편 46편은 현대의 불확실성 속에서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간에 신앙과 경험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들의 신뢰를 고백하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노래입니다.
전체의 주제는 한 문장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1절과 7절과 마지막 11절에서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이시다”가 올바른 해석입니다.
‘우리의 피난처’라고 말하면 이 말은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지요. 내 집, 내 차, 내 재정.
그러나 우리를 위한 피난처는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어 나를 위해 행하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여 주신 집, 차, 그리고 재정.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있는 나를 발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피난처로 인도하십니다.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성경구절 6가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열매를 맞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마태복음 18장 19~20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시편 27편 4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16편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창세기 28편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의 인생의 질서와 혼돈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2021년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말씀인 시편46편을 통하여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 느끼기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마치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일들로 인해 정말 죽을 것 같이 여겨져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포기하고 도망가려 했던 적이 부끄럽게도 여러 번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하기도 싫은 치욕적인 순간들이, 끝날 것 같지 않던 고통의 시간들이 다 지나가고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쓰나미와 같았던 그 상황에서 살아남아 다시 살고 있는 지금의 나의 모습을 거울에서 발견하고는 자신이 지금 이렇게 살아 숨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란 것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온전히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게 붙여주신 사람들을 통하여 일으켜 세우셨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의 우리를 위한 피난처이심을 기억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절에서 3절을 읽어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은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발전하는 세상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과학 문명의 발달을 맞추어 가며 살기가 벅찰 정도입니다. 아날로그 세대였던 저희이기에 더욱 그렇지요. 휴대폰만 하더라도 신모델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기능이 나와 거의 이용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안 볼 때는 종이처럼 둘둘 말려져 들어가는 티비 나왔습니다. 평상시에는 보통 자동차의 기능을 하지만 험한 지형을 만나면 바퀴부분이 사람의 다리처럼 바뀌어서 자동차가 걸어갑니다.
이처럼 무서울 정도로 인간은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어내며 세상을 지배하고 살아가지만 순식간에 발생하는 아니 예고되는 것일지라도 자연재해 앞에서는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그 앞에 패배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해마다 겪는 폭우나 태풍 등에는 대비를 하여도 조금만 예상보다 그 정도가 클 때에는 그 힘에 굴복하지요.
그렇습니다. 지나온 우리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지진과 쓰나미처럼 자신의 삶을 하루 아침에 모조리 붕괴해버릴 수 있었던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또 이겨내고 벗어났습니다.
2절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아멘.
여러분,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솟아나고 넘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시편 기자는 자신의 삶 가운데 임마뉴엘의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였기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간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전의 수많은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켜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지나온 삶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확신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온 피조세계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혼돈과 무서운 재앙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지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혼돈의 세력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임재하심에 대한 믿음만을 붙들고 산다면 반드시 다시 회복하여 다시 새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땅이 변하고 견고한 산이 흉포한 바다에 삼키어지는 일이 우리의 인생에 또 일어날지라도 이전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이 아주 오래 전에 로렌스 형제가 쓴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입니다. 이전에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지만 너무나 은혜 받은 이야기라 다시 한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약 4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로렌느라는 지역에 니꼴라 에르망이라는 사람이 전쟁에 부상을 입어 불구가 됩니다. 이후 그는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그의 나이 50세에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로렌스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는 수도원의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게 되는데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힘들고 고달픈 일이었지만 그 일이 그에게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는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짜릿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의 얼굴이 밝게 빛났고 늘 기쁨에 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생활의 사소한 의무를 행하는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며 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믈렛을 구울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에게 묻습니다. 그럼 오믈렛을 굽지 않을 때에는 어떠냐고요? 그는 대답합니다. 자신이 오믈렛을 굽지 않을 때에는 오믈렛을 구울 때를 떠올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또 다시 연습한다고요.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에는 특별한 비결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충실하게 하는 동안 하나님을 기억하면 됩니다. 늘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을 생각하게 되지요. 생각한 것을 우리의 몸이 반응하여 행동하고 그 행동이 반복될 때 그것을 우리는 습관이라 합니다. 우리의 쌓여진 습관이 바로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고 그 형성된 인격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우리의 과거를 현재를 그리고 다가올 예측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미래를 버텨내게 하신 피난처이십니다.
우리의 과거의 쓰나미와 같은 환난을 면하게 하신 피난처이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우리의 현재를 감당하게 하시는 유일한 능력의 근원지가 되십니다.
망망한 바다의 근원을 찾아 그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작은 시내가 그 원천인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지요. 한 없이 넓은 바다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발원지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 발원지는 바다에 비하면 아주 작고 좁습니다.
서울의 젖줄인 한강의 발원지는 검룡소라고 하는 곳입니다. 검룡소(儉龍沼)는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삼수동)죽동에 있는 분출수로 대덕산과 함백산 사이에 있는 금대봉(해발 1418m)자락의 800m 고지에서 시작됩니다. 그야말로 ‘민족의 젖줄’로 불리지요.
성경에 나오는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의 발원지는 헐몬산입니다. 그 물줄기는 사해로 이어지지요.
가이샤라 빌립보라는 곳에 위치한 헐몬산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물 공급처인 갈릴리 바다를 거쳐 요단강을 따라 사해로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에덴에서부터 흘러나온 강물이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을 흐르는 강이 됩니다. 이처럼 작은 한 시내가 큰 강의 원천으로 되듯이 우리의 기쁨과 평강의 원천지인 오직 하나님의 임재하심에서 비롯됩니다.
4절부터 7절을 읽어볼까요?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을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공급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그의 성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지금 우리의 인생에 어떠한 악의 나라들이 침범하여 우리를 에워 쌓아 위협할지라도 모든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성에 거하는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해발 880미터 고지인 산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이러한 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노래한 ‘한 시내’는 사실적 묘사라기보다는 상징성을 가진 표현으로 보아야 하지요.
즉 이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임하는 하나님의 풍성한 영적 축복을 가리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에 거하는 자에게 공급될 마르지 않는 생수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의미합니다. 이 안식과 평안과 기쁨에 대한 소망을 소유한 자는 지금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 어려움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로렌스 수사의 마음을 떠올려 보시면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지요.
6절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며 땅이 녹았도다” 아멘, 아멘.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를 흔들지라도 나라와 세상이 지금 바이러스로 인해 심히 두렵고 흔들릴지라도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시면 그 모든 것은 녹아버립니다.
우리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가 지나온 과거처럼 도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께로 피하여 지금의 어려움에 맞서 싸워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의 삶에 전부임을 우리의 과거를 통해 경험하였고 인정하였기에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우리의 현재의 삶의 발원지가 되심을 선포합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아멘, 아멘!
우리는 살아갈 때에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삶을 살지 않지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에 모두가 목사로 선교사로 성경교사로 살지 않습니다. 그것은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이 다르고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그리 만만하거나 녹녹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육신은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는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고 살기에 늘 자신의 연약함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분명히 말하지요. 하나님께서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새벽에 나의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현재 육신이 비록 연약하여 여전히 죄인의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 모습을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남아 있는 죄들을 보지 않으시며 그것들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죄가 죽을 때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구함에 따라 우리를 다루시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언제나 경험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 주님, 주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게 해 주세요.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어떤 일이 있든지 항상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늘 신뢰하며 살게 해 주세요. 무엇보다도 주님과 끊임없이 교제를 나누며 살게 해주세요.” 정말 주님을 의식하며 그분과 늘 교제를 나누는 삶,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되게 해주시길 간절히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만이 우리의 삶의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의 현재의 힘이 된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장차 우리의 미래에 승리를 주실 것을 또한 믿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피난처 되시며 현재를 이끄시는 힘이 되시며 우리의 다가올 장래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의 앞날에 장차 행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마음 속에 다짐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갈등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함으로써 비롯됩니다. 우리의 미래에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모든 전쟁들을 영원히 종결하시고 평화의 나라를 도래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삶의 전쟁을 그치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전쟁의 도구가 되는 시기, 질투, 원망, 정욕, 분냄, 배신, 증오 등을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서서 우리가 먼저 우리의 앞날을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임재하심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포로 인하여 흔들리고 요동치지만 하나님께서 소리치시니 그 땅이 녹았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잠시 소유한 그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실 것이며 그들의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실 것이라 선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이 땅의 모든 군대의 가장 위에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적은 모두 무찌르시는 심판자이시며 그분의 백성들은 철저하게 지켜주시는 보호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된 의미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임마누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믿음의 고백입니다. 전쟁에 능하시며 전쟁을 주관하시는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하신다는 이러한 믿음은 어떠한 위기 가운데 처하든지, 어떠한 대적 앞에 서있든지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이 주실 승리를 확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우리의 미래에 승리를 확신케 합니다.
여러분, 9절을 읽습니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여기서 말하는 수레라 함은 그 당시 적인 블레셋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더 철병거를 의미합니다. 철기 시대를 누리지 못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상도 못할 무기이지요. 어쩌면 지금의 핵 미사일과 맞먹는 무기입니다.
그런데 그 철병거도 핵무기도 바이러스도 다 무찌르시고 모든 땅은 쉬게 하신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뵙고 있습니다.
여기서 쉬게 하심이란 표현은 우리가 잘 아는 ‘샤바트’ ‘안식’이란 단어입니다. 지금의 이 어려운 상황도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종식시키시고 그 환란의 원인을 알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그로 인한 경제적 궁핍함이 아무리 우리들을 힘들고 어렵게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함께 하심을 확신합니다.
10절을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줄 알아라.”
멈추어라, 그리고 알라.
여호와 라파. 여러분 이 말의 뜻을 잘 알시지요. 치료의 하나님.
그렇지요. 치료라는 것은 어떠한 상태를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게 막아내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내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라고 쓰고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라고 읽습니다.
할렐루야!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내가 뭇 나라로부터 높임을 받는다. 내가 이 땅에서 높임을 받는다." ‘너희가 잠깐 손을 멈추고” 저는 이 구절에 시선이 갔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뜻대로 행하다가 우리가 좌절하였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현재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앞서 가려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미리 정한 우리의 계획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놀라운 승리를 가릴 것입니다.
우리의 앞에 놓여진 전쟁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우리를 통하여 이루실 것이고 마침내 우리를 통하여 홀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로렌스 형제는 대단한 지위에 있던 사람이 아니고 그저 수도원의 주방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는데도 그는 누구도 갖지 못한 하늘의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우리의 삶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함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느끼며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시편46편은 루터의 시라고 할 정도로 종교 개혁가 루터가 좋아했던 시라고 말씀 드렸지요. 그는 이 시편에 영감을 받아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A Mighty Fortress Is Our God)는 만들고 그는 부패한 로마 교황청을 상대로 끝까지 싸워 종교 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도 본시로부터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의 내용이 롬 1:17이라면, 종교 개혁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도록 루터를 붙들어 준 말씀은 바로 시편 46편이었습니다..
우리이 삶을 옥죄여 오는 세상의 짜르, 환난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에쩨르, 도우심에 의지하길 소망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아멘. 아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언제나 사모하는 삶이 되시길 간절히 사모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남은 삶을 이끄실 능력이 되심을 확신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오직 하나님의 큰 도우심만이 소망이 됩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막연히 도망하는 인생이 아니라 진정한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분의 동행하심과 임재하심을 의지하여 이 고난을 이겨내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임재하심만을 믿고 따를 때에 하나님의 높고 크신 도움심이 우리를 반드시 환난에서 구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심을 이 시간 우리의 입술로 선포합니다.
이 세상이 어떤 환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갈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짜르’의 2020년을 보내며 다가오는 2021년은 하나님의 ‘에쩨르’만을 의지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감사 드리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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