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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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이번 한 주간도 저희들을 주님의 품 안에서 지켜주시고 이제 주말을 맞이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새벽의 첫 시간을 주님의 전에 나와서 기도와 예배를 드립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제 저희들에게 어려운 이 코로나 위기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의 말씀을 내려주시길 사모합니다. 이 아침에 받은 주님의 말씀으로 이후로 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영혼이 늘 그리스도의 빛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죄와 어둠이 없는 깨끗한 영혼이 되게 축복하옵소서. 저희들이 육신의 축복뿐만 아니라 영혼의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쉬지 않게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새벽에 사랑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주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옵소서. 개인적인 문제로, 가정의 문제로, 사업의 문제로, 신앙의 문제로 고민하여 드리는 기도를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크신 축복을 내려 주옵소서. 질병과 재정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힘을 주시길 원합니다. 특히 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유기복권사님을 주님,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오늘 하루의 생활을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시며 깨끗하고 진실된 삶을 살게 하여주시고 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을 알 수 있는 지혜도 주옵소서.
감사 드리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28:10–22 NKRV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대화를 할 때에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전달할 수 있지요.
두 사람이 방 안에서 대화하는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 문이 열려 있네?” 이 한 문장만 가지고 해석을 하면 두 사람의 대화가 어떤 내용인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요?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문이 열려있네”하고 말했을 수도 있고요, 만약 추운 날씨였다면 추우니까 “문 좀 닫자” 하는 의미의 말이 될 것이고요, 날씨가 살짝 더울 때라면 에어컨을 틀려고 할 때, 에어컨 틀지 말고 “문 열려 있으니 그냥 참아보지” 하는 뜻도 가능하지요.
만일 두 사람이 다투고 있었다면 “나가라” 라고 하는 뜻도 될 것이고요, 뭔가 부탁하고 가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와도 된다는 뜻도 되겠네요.
이처럼 동일한 문장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전혀 다르거나 심지어 정반대의 뜻을 의미할 수도 있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도 이와 다를 바 없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성경해석에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은 컨텍스트(본문의 배경)를 먼저 이해하는 겁니다. 컨텍스트는 텍스트(성경의 본문)의 전후의 내용일 수도 있고 또는 성경 전체의 사상일 수도 있지요. 텍스트만 끄집어 내어 내가 원하는 결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강력하게 “이것을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주장하는 것이 전형적인 이단들의 수법이지요. 이런 식으로 하면 정반대의 해석이나 진리의 왜곡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그런데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이단들도 이처럼 성경을 가지고 말하니까 들어도 반론도 하지 못하고 속거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지요. 텍스트(성경의 본문)는 컨텍스트(본문의 배경)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컨텍스트는 텍스트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는 마치 퍼즐의 한 조각과도 같습니다. 전체의 그림에서 보지 않고 한 조각을 떼어서 보면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요. 마찬가지로 컨텍스트를 고려하지 않고 텍스트만 해석하면 별의별 엉뚱한 해석도 가능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에서의 좋은 예가 바로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구절이지요. ‘번영신학’과 ‘번영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용하여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만사 형통, 무사안일의 말씀으로 설교하지요. 그러나 이 구절은 4장의 이전 다른 구절들과 함께 이해해야 하지요. 바울이 어렵게도 살아보고 풍족하게도 살아오면서 자신이 배운 자족함의 교훈과 인내함의 교훈을 그로 인한 소망에 대한 가르침이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감당해 낼 수 있다는 것이 옳은 해석입니다. 현재 고난 가운데 있는 삶이나 견디기 힘든 육체의 고통을 지닌 삶이든지 어떤 삶이라도 하나님과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지 무조건 불가능은 없다 뭐든지 다 된다라는 의미로 바울을 말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야곱이라는 인물만 놓고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에 복을 주시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다시피 야곱은 형을 속였고 아버지도 속인 흠이 많은 인물이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계승자가 되기에는 자격 미달인 자이지요. 야곱의 이후의 삶도 열정적이나 교활하기도 하며 속고 속이고 빼앗고 뺏기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그 성경 역사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25장에서 리브가가 드디어 쌍둥이를 임신하였지요. 22절에서 그녀는 그녀의 아들들이 태중에서 싸우는데 이럴 때 어떡하냐고 여호와께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시길 23절에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여러분, 어떻게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늙은 아버지 이삭은 자신의 뜻대로 큰 아들인 에서를 축복하려 합니다. 물론 에서가 장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법대로라면 당연한 것이지요. 이삭이 에서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축복을 할 것이니 어서 가서 사냥을 해와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오라 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입 속에 있는 사냥한 고기, 그가 좋아하는 별미”가 이삭의 노년을 지배하는 실재가 되었을 겁니다. 고대 근동 지방 사회에서 족장의 축복 기도의 의미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장 큰 권위를 갖지요. 이삭은 분명히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계시와 붉은 콩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일 그리고 가나안 여자들과 결혼한 일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의 내적 통찰력이 무디어져 하나님의 뜻을 잊고 그저 자신의 식욕을 채워주는 장자인 에서에게 언약 계승자로서의 축복을 해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타락하게 되면 영적인 것보다 우선하게 하는 것이 반드시 생깁니다. 가인의 질투가 그렇지요. 노아를 취하게 한 포도주와 그것 인해 보여진 함의 추잡함 그리고 롯을 흔들리게 한 세상의 부도 그렇고요. 사라의 교만과 성급함 등도 동일한 것이지요. 이삭의 그 ‘즐기는 별미’와 말이지요.
그럼 에서는 어땠는지요? 고대 근동 지방 사회에서는 장자가 가족 전통을 계승하니다. 그런데 에서는 그 장자권을 고작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넘기는 자신의 눈 앞의 쾌락과 이익을 위해 미래의 더 크고 위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그 경건한 가치를 경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에서가 야곱을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시는 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물론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야곱 역시 올바른 방법으로 장자의 복과 미래언약의 복을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이다.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너의 아비 이삭의 하나님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아브라함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12:2-3)”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의 말씀이지요.
야곱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계승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야곱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거지요.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함량미달의 인물이지만 야곱에게 주신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시지요. 그대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변화시켜 가십니다. 따지고 보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야곱만큼 그토록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 보기 쉽지는 않지요. 야곱의 인생에는 언제나 고난이 그치지를 않았고, 슬픔과 두려움이 잠시도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런 고비를 하나씩 넘을 때마다 야곱의 못된 성품은 무디어지고 그의 고집도 사그라지고 그의 성품도 점차 온순해져 갔지요. 그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한 마디로 야곱은 하나님 안에서 ‘온유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온유하다’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라우스(Praus)’입니다. ‘프라우스’라고 하는 낱말은 ‘잘 길들여진’이란 뜻을 가진 낱말이지요. 사람들이 기르는 가축이나 짐승이 잘 길들여져 주인의 말을 잘 알아듣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프라우스’, ‘온유하다’라고 하는 말이지요. 그러나 원래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능력이 없어지지 않지요. 좋은 예가 사냥개나 양치기 개이지요. 특히 양치기개는 정말로 사납고 용감합니다. 이스라엘에 갔을 때 선교사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양치기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갈 수 있는 것도 양치기개를 믿기 때문이라고 말이지요. 하나님에게 잘 길들여져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고집도 안 부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는 결코 연약하거나 작은 자가 아닙니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였지요.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모세의 일생을 살펴보면 온유함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창28장은 에서의 분노를 두려워한 리브가가 야곱을 하란 땅에 있는 자신의 오라비 집으로 피신하게 합니다. 가는 도중에 야곱이 돌베게를 베고 자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십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어디로 가든지 지켜주시고 게다가 다시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형을 피해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도망가는 야곱입니다. 그리고 에서의 화살을 피한다 할지라도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도무지 막막하던 상황에서 그의 꿈 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니 야곱은 정말로 감격하였을 것이지요. 아무리 외갓집이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삶에 대한 보장도 없는 곳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의 삶도 보장하시고 땅을 주시고 자손을 번성하게 하시며 그 땅의 백성들이 그의 자손들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시며 끝까지 함께 하시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들은 야곱의 입에서는 저절로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윽고 잠에서 깬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지키시고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내가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저는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을 섬길 것이며 내 집은 영원히 하나님을 모실 것이면 내게 주시는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받칠 것입니다.” 라고 말이지요. 마치 자신을 찾아 오신 예수님을 보고 감격한 삭개오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이 야곱의 서원을 잘못 해석하셔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이것만 해주시면 제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습니다.” 하며 마치 하나님께 조건을 내걸어서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옳지 못한 태도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비록 야곱이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를 속인 인물이지만 여기서 하나님과 어떤 협상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과 대면하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 점 틀림이 없으신 분이지요. 말1:2-3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비록 우리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런 결정을 이해하기 쉽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쌍둥이 형제에게는 분명히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야곱의 이름의 문자적 의미가 상징하는 것처럼 야곱과 같이 비난 받을 만한 성격을 가진 자로서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할 수도 없는 자로 출발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때에 브니엘에서 ‘여호와의 사자’와 씨름하며 ‘하나님과 싸워 이기다’라는 의미의 이름인 ‘이스라엘’ 즉 승리자로 변화하는 것은 야곱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가 장자권을 받은 것도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여 간 것도 성공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에서와 화해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지요. 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훌륭한 특성이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인간적인 죄를 극복하고 인간적인 본성을 변화시키는 은혜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두려움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시어 아브라함에게 말씀과 환상으로 역사하신 것과 동일하게 야곱의 믿음을 격려하시고 그에게 모든 복을 받게 될 것을 보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그를 통해 역사하셨고 동일하게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시고 일하셨습니다.
이후의 야곱의 생애를 보면 믿음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지요.
사도 바울은 믿음은 신실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생각이 아니라 그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키우시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곧 믿음으로 살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보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 확신에 그 우선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13절)
오늘 하나님께 야곱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홀로 있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도 놀라운 야곱의 변화와 똑 같은 변화를 우리의 삶에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확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이지요.
잠에서 깬 야곱이 말하지요.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느 곳에나 계시는 무소 부재 (無所不在)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를 항상 지켜보시며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또한 우리가 어디에 있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만 하면(요 4:24) 우리를 만나주시고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임재하심을 믿는 자에게는 야곱의 고백과 같이 어느 곳이나 ‘벧엘’,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 됩니다(17절). 특별히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성도들에게 큰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는 성도가 언제든지 하나님을 구하면 만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여 주심을 확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기쁨이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위를 다 감찰하신다는 점에서는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있음을 깨달아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경건한 삶을 살며 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성도 모두가 다 함께 모여 예배 드리는 것을 훼방하여도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으나 함께 있는 것과 동일한 마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 드리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코비드19가 진정되어 다시 모이는 날에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만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렵고 힘든 시기에 출발한 새해이지만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든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항상 평강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
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
이제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 드리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아무 것도 온전히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지금 내가 무엇을 바라고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항상 주님 안에서 행하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눈 앞의 욕망에 영원한 복을 포기한 에서나 입 안의 고기로 말미암아 에서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지 못한 이삭이나 그것을 이용한 리브가와 야곱 모두가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용서하시고 훈련시키시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하여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잊지 않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 드리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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