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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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가 진정한 왕이시며, 그분의 나라의 특징 평화이다.

Notes
Transcript
진정한 왕, 평화의 탄생
눅 2:1-20
한 세상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신앙은
비록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주권자가 있을지라도
그를 세우기도 하시고
내리기도 하시는
참 주가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삼상 2:6-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통하여
우리 주 되신 예수님은
세상의 주와 어떻게 다르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어떤 다른 나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인구 조사 명령과
세상의 구주가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난 장면을
대조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1-7절).
주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구주가 태어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해줍니다.
구주의 표적은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나는 것이며(8-14절),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를 목격한다(15-20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지극히 낮은 곳에
탄생하심으로써
세계의 중심(로마/ 황제)과
이스라엘의 중심(성전)이
이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7절의 여관(καταλύμα)은
가정의 객실이며,
영어의 표현은
게스트 룸입니다.
눅10:34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주막(판πανδοχεῖον)은
상업용 숙소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옥은
주로 가축을 위한 외양간,
가족을 위한 방,
손님을 위한 객실이
한 지붕 아래 붙어 있는 직사각형 구조였습니다.
방과 외양간을
구분한 벽의 위쪽이 트여있어서
주인은 방에서도 가축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외양간이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이름없는 한 가정의 환대를 받아
주인 가족과 함게 머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구주께서
짐스의 먹이통인
여물통에 누인 장면은
온 우주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지극히 낮은 곳에 임하신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도착한 당일에
객실을 얻지 못해
그날 밤에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아이를 낳았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눅 2:1-20절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 7절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
8 - 14절 구주의 탄생과 천사들의 찬송
15 - 20절 구유에 누인 아기를 목격한 목자들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 : 1-7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냉혹한 세계사의 흐름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1장이
유대의 왕인 헤롯의 때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2장의 말씀은
당시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를 다스리던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칙령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인구 조사의 칙령을 내렸고(1절),
시리아 지역의 총독이었던
구례뇨가 유대 지역에 집행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황제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고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3절).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살고 있던
갈릴리 나사렛에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4절).
3-4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습니다(5절).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로마제국의
황제가 내린 칙령 앞에
요셉과 마리아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로마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통치력을 가지고 있었고,
세계가 다 이 로마 황제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당시 세상에서
온 세상의 주는
의심없이
바로 로마 황제인
카이사르 아우쿠스투스였습니다.
당시 유다백성들은
이 로마 황제의 통치를 받으면서
고통 속세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그 요셉이
다윗의 도시인 베들레헴에 간 것은
태어날 아기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일찍이
구약의 미가라고 하는 선지자는
미가 5:1-4을 통해서
장차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으로 예언했습니다.
미가서 5:1-4절 말씀입니다.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빈 객실이 없었기 때문에
외양간에 머물러야 했고,
결국
약속된 메시아는
외양간의 여물통에 누이게 되었습니다.
만삭의 어린 여성이
먼 길을 가서
외양간의 여물통에
첫 아기를 낳는 장면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습은
주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불리고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1:32)과
어울리지 않는 장면입니다.
신의 아들로 선전한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가난한 부부의 첫아들(출 13:2; 민 3:12-13; 18:15-16; 신 21:15-17)로
여물통에 누워 있습니다.
이처럼
높은 보좌에 앉아
천하에 칙령을 내리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와
여물통에 누인 ‘첫아들’은
너무 상반된 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 왕은
세상에서
더 이상 높이 오를 수 없는
높은 곳에 앉아있지만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중심이 달라지게 됩니다.
역사의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천하를 호령하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세상의 중심,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어느 시골의
외양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왕으로 세상을 다스리며
세상의 중심,
역사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세상의 왕이 누구이며
그 세상의 왕의 위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세상의 주(主)로 추앙받던
황제 가이사의 명령에
임산부 마리아는
베들레헴을 향해
매우 위험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로마의 황제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강력한 통치를 원했습니다.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강력한 군대를 원했고,
로마의 식민지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 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안구 조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황제의 이 추상같은 명령을
실행하기 위하여
전 제국에 걸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어느누구도
이 명령에 토를 달거나
항거할 수 없습니다.
2천 년 전
인간의 역사에서
세상의 주(主)는
분명히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하지만
실상 가이사는
참 역사의 주(主)인 되시는
예수 탄생의 배경에 불과하며,
다윗의 후손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대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만들어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라고 하는 무대의 뒤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해방하시고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이스라엘을 왕인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으며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알려주신 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로마의 황제를 움직이셨고
로마의 황제는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각본대로 움직인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세상의 주가 되시고
그의 능력과 권세는
결코 세상의 왕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신앙고백을
읽어보겠습니다.
삼상 2:6-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온 세상의 주가 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황제 자리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낮은 자리,
그것도 짐승의 먹이통에 누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과 죽음을 물리치시고
모든 저주와 진노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세상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다스림은
로마의 황제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이다.
로마의 황제는
자신의 통치권 행사를 위하여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자신의 통치권에 대항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인정사정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죽이고 약탈하고
짓밟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당신을 향하여 대적하던
원수들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오늘도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바로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잠시뿐인 세상 권력에 취한다거나
세상의 들러리가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살더라도
낮은 자리에서 살더라도
역사의 주인이신
주 예수의 백성으로
당당히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주의 탄생과 천사들의 찬송 : 8-14절
8-14절은
주의 천사(가브리엘)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 근처에서
목자들이 밤에 양 떼를 돌보고 있었다(8절).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났고(ἐπέστη)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비추었다(9절).
8-9절 말씀입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목자들은
천사를 보고 너무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천사는
그러한 목자들을 향하여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기 때문이다(10절).
누가복음에서
‘기쁨’(χαρὰ)라고 하는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행위(1:14; 2:10; 15:7, 10)와
영적인 일(10:17)과
예수님의 부활(24:41, 52)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는 것과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목자들과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기에
목자들이 기버해야 하는 걸까요?
목자들이
마리아와 요셉을 아는 것도 아닙니다.
당장에
가난한 삶이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한 밤의 뼈가 시리도록
추운 날씨가
따듯하게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기의 탄생과
목자들하고는
아무 연관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천사는 기뻐하라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좋은 소식이 전해질 것이기 때문에
목자들은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해준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11절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가 탄샹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다윗의 동네(πόλις)는
삼상 17:12-15에 의하면
베들레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삼상 17:12-15절 말씀입니다.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으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셋째는 삼마며
다윗은 막내라 장성한 세 사람은 사울을 따랐고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
다윗의 동네에
태어난 예수님은
‘구주’(Σωτήρ)가 되십니다.
구약에서
구주(Σωτήρ)라는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킬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삿 3:9, 15; 느 9:27).
삿3:19절과 15절 말씀을
이어서 읽겠습니다.
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מוֹשִׁ֛יעַσωτῆρα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מוֹשִׁ֛יעַσωτῆρα를 세우셨으니
구주는
‘그리스도 주’( Χριστὸς )입니다.
‘주’(Κύριος)는 70인 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이고,
로마제국에서는
카이사르, 황제가 Κύριος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주’(1:47)는
구약에서 백성을 돕거나
구원하시는 하나님에게 사용된 용어였습니다
(삼상 10:19; 사 45:15, 21;
지혜서 4:30; 마카비1서 4:30; 집회서 51:1).
그리고
11절 말씀에서
‘구주’의 역할을 행하는 주체는
예수님이십니다(행 5:31; 13:23).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는
목자들에게
메시아라는 표적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12절)가
목자들이 보게 될
구주의 표적이었습니다.
세상의 왕이요,
세상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왕궁에서
모든 사람들의
축복 가운데서 태어나든지
뛰어난 가문에서 태어나야 제격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가 되시고
주가 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임을 입증하는 표적은
너무 초라한 곳에서
너무 낮은 곳,
짐승의 먹이통에서
옷에 싸여 있는
아이의 모습입니다.
너무나
초라한 탄생 장면이지만,
하늘에서는
정반대의 반응인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주의 천사와 함께
수많은 하늘 군대(στρατιᾶ)가 도열해
우렁차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στρατιᾶς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하늘의 군악대는
태어난 아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어질 평화를 노래하고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선포합니다.
여러분!
천사들이 선포하는 평화는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로 주어지는
치유와 회복의 은혜입니다.
눅4:18-19절 말씀과 사 52:7절 말씀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사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그리고
이 놀라운 하늘의 평화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임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광경이
펼쳐지는 장소로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인 성전이 걸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의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당시
헤롯의 성전이라 불렸던
예루살렘의 성전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 할 정도로
탁월한 건축물이었습니다.
실지로
헤롯 대왕은
뛰어난 건축가였습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헤롯 대왕은
성전 건축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성전을 새로이 보수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토목공사를 하였습니다.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서 파괴 되었자만
남아있는
당시의 건축물은
2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세월의 무게를 거뜬히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인류의 구주시라면
바로 거기에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너무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악이 스스럼없이 행해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한 성전은
평화의 왕이
누이실 곳이 못 되었던 것입니다.
1세기에
온 세상에 미치는 기쁜 소식은
로마 황제의 탄생이나 등극이었습니다.
로마는
하나님의 아들과
구주로 불리는 새로운 황제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신격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은
세상에 주어진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외양간의 여물통에 누인 아이를
어느 누구가
세상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통치할 구주와
메시아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온 세상에 미칠 진정한 기쁨,
사람들의 평화는
시골의 외양간에서 태어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복음’(εύαγγέλιον)의
명사형은 나오지 않고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εύαγγέλιξομαι)라는
동사형이 10회 사용되었습니다.
(1:19; 2:10; 4:43; 7:22;8:1; 9:6; 16:16; 20:1; 참조. 3:18).
이 방식은
이사야 선지자가
구약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
사용한 방식과 같은 표현입니다(사 40:9; 52:7; 60:6; 61:1).
이사야는
겸손하고 고난받는 종(42:1-4; 45:4; 49:3-5; 52:13-53:12)을 통해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슴이
사 53:1-6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궁핍하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기 위해
예수님은 더 비천하게 낮아지셨습니다.
우리의 구주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해서
고난의 길을 걸었고,
결국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구주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결코
세상에서 줄 수 없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평화가 그들의 삶에 찾아올 것입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예수의 탄생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 예수의 탄생은
숱한 생명의 탄생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좋은 소식,
즉 복음이었습니다.
이 아이의 탄생이
복음이 되는 것은
소망 없는 인류를
죽음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원자요,
역사의 주인이요,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백성된 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고
이 복음의 특권과 영광을 향유하고
이 복음을 드러내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들을 메시아로
세상에 보내심으로
언약을 성취하시고
창조의 경륜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도 참 평화의 나라를 이루어
저 로마제국의
거짓 평화를 폭로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의 영광이 드러난 곳에
진정한 참 평화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천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해준
메세지 중의 중요한 한 가지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특징은 평화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2천 년 전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통해서
팍스 로마나,
즉 로마에 의한
세계의 평화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난하고 힘없고
낮은 자리에 있던 연약한
수많은 사람들이
착취당하고 짓밟힌 피의 댓가였습니다.
팍스 로마나를 통해서
평화를 누리는 대상은
로마의 황제를 비롯한
로마의 원로원들과
로마 시민들뿐이었고
실상은
그들의 평화를 위하여
주변의 많은 민족과 백성들은
피의 댓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로마의 평화 속에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
그 대가로
우리는
영원한 샬롬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의 댓가를 통해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평화를 이루었지만
우리 주님은
당신의 피를 드리심으로
낮고 천한 자들에게
하늘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누가 진정한 왕입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에게
두 명의 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왕으로 삼아서
거짓된 평화를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진정한 왕으로 섬기고
영원한 샬롬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군포서부교회 성도님들은
이 힘들고 불안하기
그지없는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고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된 하늘의 평안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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