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힌 자 vs 붙들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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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에 끌려다닌다 2. 귀신은 있다. 3. 예수님은 불쌍한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거라사에 오셨다. 4. 마귀를 돼지들 속에 넣어 심판하셨다. 5. 동네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냈다. 6. 귀신들린 사람이 회복되고 집으로 돌아가 증인이 되었다. 7. 우리는 붙잡힌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붙들린 자가 될 것인가

Notes
Transcript
[서론]
오랫동안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였던 책 중에 릭워렌 목사님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이끌려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그 중 많은 이들이 이끌려 살아가는 5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많은 사람들이 과거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삶 전체를 허비합니다.
둘째, 많은 사람들이 원한과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분노를 품는 사람들은 그 분노를 침묵으로 내면화하여 살아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감정을 폭발시켜 다른 이에게 쏟아내기도 합니다.
셋째,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두려움은 어떤 충격적인 경험, 비현실적인 기대 또는 엄격한 가정환경으로 생길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감옥과 같아서 이런 사람들은 삶의 많은 기회들을 놓칩니다.
넷째, 많은 사람들이 물질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욕구가 삶의 목표가 됩니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이 욕구는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해질 것이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며,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 많은 사람들이 인정욕구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부모나 배우자, 혹은 자식이나 스승 친구들, 다른 사람들의 기대가 그들의 삶을 주관하도록 내버려둡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오늘 말씀에도 무엇인가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진정한 삶의 모습을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오늘 말씀은 참 흥미로운 본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에서 가장 흥미로운 본문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귀신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냥 귀신 이야기가 아니라 군대귀신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본격적으로 보기 전에 체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귀신의 존재를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걸 믿지 못하면 오늘 말씀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천사의 존재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중 하나도 귀신을 내쫓아 사람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들이 있다고 믿는 것이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성경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 배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주무시는데 배가 풍랑을 만나 제자들이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웠는데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셔서 평온케 해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길래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가?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연조차도 통제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가진 분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 주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예수님은 배를 타고 거라사라는 동네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거라사라는 동네는 데가볼리라는 지방의 한 동네입니다.
데가볼리는 데가가 10이란 의미고, 볼리가 도시라는 의미라서 10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곳을 의미합니다.
그 도시 중 하나가 거라사입니다.
이 거라사 지방은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서 유대인들이 잘 가지 않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곳인데 거기에다가 부정한 짐승인 돼지까지 많이 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곳을 가셨습니다.
아니 가셔야만 했습니다.
왜일까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말을 기억하시죠?
사람은 무엇인가에 끌려다닌다구요.
이 사람은 귀신에게 끌려다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사람에게 귀신이 들어간 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은 한 두마리가 아닙니다.
30절에서 예수님이 이 귀신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그 때 이 귀신이 자신은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군대귀신이 그 사람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여기서 군대란 로마군대 조직을 의미하는데 약 5000-6000명을 의미합니다.
앞서 일곱귀신들린 마리아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 사람에 비하면 가벼운 것입니다.
5000-6000마리 귀신이면 진짜 어마어마한거죠.
한 마리만 들어가 있어도 사람이 정상이 아닌데 이렇게 많으니 그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렸다는 것은 귀신에게 완전히 육체와 영혼이 모두 지배당해서 조종당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27절에서 이 사람의 상태를 설명해줍니다.
오랫동안 옷도 입지 않은 채 돌아다니고, 집에서 안 살고 무덤에서 살죠.
그 당시 무덤은 돌을 파서 구멍을 만들기 때문에 그 곳에 들어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인생 마지막에 가는 곳에 그가 지내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바닥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한가지 특징이 있죠.
29절에 보면 사람들이 그를 여러번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그런데 그 쇠사슬과 발에 찬 쇠고랑을 끊어내고는 광야로 뛰쳐나가곤 했습니다.
귀신이 지배하니까 초인적인 힘이 생겨서 사람들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것이죠.
귀신이 지배하면 육체도 이성도 감정도 자기 의지로 도저히 컨트롤이 안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약도 없죠.
영혼이 아픈데 어떤 약을 쓴다고 나을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예수님이 이 사람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영혼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오신 것이죠.
한 불쌍한 인간을 구원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그 사람이 왜 귀신들렸는 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보통 귀신들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어떤 깊은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됩니다.
저도 귀신들린 사람을 여러번 만나봤는데요.
그들은 너무 마음이 힘드니까 어느 순간에는 자신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면 귀신이 그 영혼에 들어옵니다.
자신도 포기했기 때문에 귀신이 여기 빈집이네 하고 들어오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의사인데 대형병원에서 경쟁에 너무 치여서 어느 순간 자신을 놔버렸습니다.
그래서 귀신들렸는데 옷 다 벗고 밖으로 뛰쳐나가고…가족들이 놀래서 막고…
또 어떤 사람은 억눌린 게 너무 많아서 어느 순간 귀신이 들어가서 몸을 자신이 통제 못하는 거에요.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한데 귀신이 들어가니 너무 힘이 세져가지고 저랑 다른 분 두 명이서 잡았는데도 도저히 통제하기 힘들더라구요.
이 사람들 모두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자신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이 귀신들린 사람도 그랬을 것입니다.
자기 책임이 아니죠.
그 공동체 모두의 책임이죠.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에게 명령해서 그 사람에게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곧바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소리를 지릅니다.
귀신이 뭐라고 하나요?
28절 보겠습니다.
더 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웃기는 귀신인게 자기는 한 사람을 그렇게 오랫동안 괴롭혀놓구선 예수님 보고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니깐 웃기는 놈이죠.
한다는 말도 자기랑 무슨 상관있냐고 따집니다.
이 말은 자기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간섭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귀신이 자기 입으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그렇게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리고 붙잡아서 자기 노예처럼 부려먹는데 어떻게 가만둡니까?
테이큰이란 영화를 보면 나쁜 놈들이 주인공 딸을 납치하여 마약에 중독시켜 매춘부로 팔아넘깁니다.
그럼 아버지가 이를 보고 가만히 있을까요?
자기 목숨 걸고 나쁜 놈들 잡으러 갑니다.
그래서 진짜 나쁜놈들을 박살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라고 요한일서3장 8절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부정한 이방인의 땅이라고 절대 찾아가지 않는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도 사람들이 상대하지 않는 가장 더러운 사람, 인생이 바닥인 사람인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구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도 오셨습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때 인생의 목표를 돈 많이 벌어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정하고 살아갈 때 주님은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물질과 다른 이들의 인정에 끌려다닐 때 예수님은 저의 족쇄를 풀어 저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정말 흥미로운 한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실 때 마귀들이 제발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라고 하고는 근처에 있던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부탁을 하는 장면입니다.
웃기는 것은 귀신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할 지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보낼 지 다 알고 있습니다.
바로 지옥입니다.
여기는 이 땅의 마지막 날까지 마귀들이 갇혀있는 감옥과 같은 곳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범죄자가 감옥 가지않게 해달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게 자신을 돼지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왜 하필 돼지떼 일까요?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더럽고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러니 귀신들이 들어갈 곳이 거기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디로 들어가겠습니까?
근처에 예수님과 제자들 밖에 없는데요.
예수님은 또 그 귀신들이 돼지안에 들어가라고 허락해주십니다.
다른 마가복음에 보면 그 돼지떼가 2000마리라고 말합니다.
어머어마하게 많은 돼지들 속에 귀신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들이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귀신들이 들어가자 돼지들이 비탈길을 내달려서 모두 호수에 빠져 죽어버렸습니다.
돼지들도 더러운 귀신들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귀신들이 더러우면 돼지들도 견디기 힘들었을까요?
그럼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귀신들을 지옥에 안 보내시고 왜 돼지들 속에 들어가게 하셨을까요?
그럼 과연 귀신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돼지들 죽을 때 또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이동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호수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호수는 심판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돼지들을 사용해서 그 귀신들을 지옥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마귀의 부탁을 들어주시면서도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마귀를 지옥으로 소환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또 괴롭힐텐데 왜 예수님이 그들을 놔주시겠습니까?
결국 마귀는 돼지떼가 몰살되면서 지옥으로 소환되었고, 귀신들린 사람은 마귀에게 풀려났습니다.
이제 인간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끝나면 완전히 해피엔딩이죠.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그 동네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이 귀신들린 사람이 제 정신이 돌아왔으면 함께 기뻐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34절에 호수에 빠져죽은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동네에 가서 자신들이 본 것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귀신들린 사람이 옷을 입고는 예수님 발 앞에 멀쩡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 지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듣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네사람들은 기뻐하기는 커녕 예수님께 자기 동네를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
왜 동네사람들은 이렇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때문입니다.
그 동네는 돼지 2000마리를 키울 정도면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2000마리의 돼지가 전부 몰살당한 것을 본 그들에게 예수님은 경제적으로 손해를 가져올 위험인물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또다시 자기 동네에 손해를 끼칠 지 알 수 없어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 동네에서 그렇게 말썽피우던 그 귀신들린 사람이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기뻐하기는 커녕 자기들 손해볼까봐 걱정부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눈 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사람입니다.
동네에 장애인 학교 들어온다고 하면 동네사람들이 결사반대 합니다.
왜요? 아파트값 떨어지니까…
세월호 한 두명 시신구하려고 배 인양하려니까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왜요? 비용이 수천억 들어가니까…
목격자라는 영화를 보니까 아파트에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모두 쉬쉬하죠.
아파트값 떨어지니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을 경제적 효율성과 이익만을 생각하는 경제논리로 판단해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에 끌려다닌다고 했는데 이 동네 사람들은 그것이 물질입니다.
그들은 앞서 예수님이 비유하신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자신들의 근심과 재물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회복된 것을 보고 놀라서 기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다 듣고나서는 손해볼 것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너무나 기회비용이 큰 것입니다.
이런 경제논리는 비단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교회 전체 유익을 위해서라면 한 영혼을 쉽게 희생시키곤 합니다.
이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군대귀신들린 사람이 개인적인 이유로 귀신들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개인적인 이야기라면 이 동네 사람들 이야기가 등장하면 안됩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귀신들린 배경에는 그 동네에 가득한 어떤 가치관이 문제였다는 것을 성경은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생각으로 2000마리의 돼지를 죽이셨을까요?
예수님은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100마리의 양이 있을 때 한 마리가 길을 잃어버리면 99마리를 놔두고 1마리 긿은 양을 찾아 떠나시는 분입니다.
경제논리로 따지면 99마리가 더 중요하니까 1마리 버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를 따라가지 않으십니다.
왜 예수님이 2000마리의 돼지를 죽이셨을까요?
그것은 그 동네 사람들의 논리에 반기를 드신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2000마리의 돼지와 1명의 영혼 누가 더 귀하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2000마리가 아깝지 않으신 게 아닙니다.
그 동네에 극심한 피해가 갈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다 알면서도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한 마리 양, 귀신들린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동네 사람들에게 사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기준은 세상과 완전히 다릅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교회는 경제 논리로 움직이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이 보기에 낭비라고 생각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거룩한 낭비라고 부릅니다.
세상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곳에 교회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없으면 관심갖지 않습니다.
그런 곳에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그 귀신들린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마귀에게 붙잡혔던 인생이 이제 예수님께 붙들린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다 알기에 그의 변화된 모습만큼 강력한 증거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 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도 예수님과 함께 가고자 했으나 예수님은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셨던 것입니다.
[결론]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제가 최근에 스위트홈이란 영화를 네플렉스에서 봤는데요.
거기보면 사람들이 괴물이 됩니다.
그 괴물이 된 원인이 바로 그들의 왜곡된 욕망때문입니다.
어떤 괴물은 턱이 밑으로 빠져서 혀가 길게 늘어났습니다.
근육괴물도 등장하고, 머리가 잘려나간 팔 다리가 늘어나는 괴물도 등장합니다.
욕망이 그들을 삼켜버리면 결국 괴물이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괴물보다 더한 인간들의 모습도 나타납니다.
누가 괴물인지 누가 인간인지 모호하게 만듭니다.
진짜 무서운 건 괴물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귀신들린 자는 어떤 의미에서 좀비나 괴물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자신의 탓이 아닙니다.
그 동네의 팽배한 경제적 논리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동네가 낳은 희생양입니다.
그럼 동네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진짜 괴물은 그들이 아닐까요?
그들은 눈앞의 이익때문에 예수님을 내쫓아 하나님 나라를 거부했습니다.
누가 괴물인가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괴물로 만들어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를 붙잡아서 무엇인가의 노예로 만듭니다.
무엇인가에 끌려다니는 인생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들에게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여러분께 예수님이 도전하십니다.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 말입니다.
죄의식, 원한과 분노, 두려움, 물질, 사람들의 인정 무엇에 붙잡혀 살아갈 것인가요?
주님은 우리가 붙잡힌 인생에서 주님께 붙들린 인생이 되길 원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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