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위한 내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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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전제, 죽음
부활의 전제, 죽음
우리의 첫 성찬은 오직 부활에 촛점을 맞췄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만나시는 자비하신 모습, 성찬은 이 부활을 주님을 사모하는 자리.
재림 역시, 이 부활의 주님을 사모해서 갈망하게 한다. 성찬이...
그날에 너희와 ’함께’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실 때까지…/ 임마누엘을 강조하는 마태의 신학이 잘 나타남
육체로 오신 예수님
육체로 오신 예수님
신이 왜 육체가 필요한가? 육체가 있으면 어떻게 신인가?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야 많이 있다. 하지만 신이 사람이 될 리가 없다. 왜 그래야 하는가? 신에 비해서 약점, 단점 투성이의 인간 육체를 왜 탐을 내겠는가? 절대 필요가 없는 그 육체를 왜?
죄와 사망과 부패에 사로잡힌 인간의 몸
낙원의 삶이 보장되어 잇는 아담이 스스로 그 아름아움을 포기한다.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ㅣ법칙 아래서 살아간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을 ㄹ수밖에 없다. 죄인이어서 죄를 짓고,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다.
이런 저주받은 가련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보실 수 없다. 사랑의 주님이시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ㅣ해결책을 마련한다. 성자께서 인간으 죄를 대신해서 저주를 짊어진다. 이 방법 말고는 없다.
하나님 자신의 성품으로도 이 인간들을 방치할 ㅜ 없다. 하나님의 고상한 작품이 무로 돌아가게 내러려둔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부패와 사망이 죄 지은 인간에게 들어와 왕이 되었다. 쥐고 흔들어댄다.
마귀의 속임수 때문에 이렇게 될 수 있는가?
당신의 피조물이, 가장 소중하게 당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이 당신의 눈앞에서 망해간다면, 그런 모습에 하나님께서 아무 반응이 없으시다면, 하나님은 선하지 않으시며 능력에 한계기 있음을 보여주신 셈이다.
차라리 창조하지 않으신 경우와 비교한다면 구원하지 못하시는 쪽이 더 큰 하계를 보이신 셈이다.
그렇다고 창세기 2:17을 취소할 수는 없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취소하시고 원래 상태로 둘 수는 없다. 하니님께서 신실하지 못하신 셈이 된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신 일이 없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에 들어오셨다. 죄와 죽음에 묶여 있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 동정심이 주님의 마을을 움직였다. 사망이, 마귀가 당신의 피조물을 지배하게 두고 보실 수 없었다.
주님은 당신의 몸에 우리의 ㅣ죽음을 채우시기 위해 육체가 되셨다. 동정녀의 몸을 빌려 당신의 몸을 만드셨다. 성전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비록 우리와 같은 몸이지만 주님은 그 육체 안에 ‘주님’께서 머무신다. 그래서 성전이다.
이 성전을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바치신다. 우리와 똑같은 몸을 취하신 그분은 우리 대신 그 몸에 우리의 죄와 부패를 짊어지셨다. 이제 그분의 죽음으로 그분이 짊어진 모든 죄가 없어진다. 주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죽는다. 그래서 사망의 법이 이제 폐지된다.
성자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신 주님은 죽을 수가 없다. 신이 는 법은 없다. 주님은 사람의 몸을 입스신다. 죽기 위해서였다.
성찬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한다. 여기로 돌아가자. 계속 생각해야할 주제이다. 하지만 부활을 묵상하기 위해 십자가를 전제한다. 주님을 죽으셨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죽으시기 위해서는 몸을 입으셔야 했다. 몸이, 육체가 되셔야 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계셨다. 마치 목사지 양들 사이에서 텐트치고 같이 지내는 모습이다.
사람과 같은 몸이지만 죄가 없는 모이셨다. 그래서 우리 죄르 짊어지실 수 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히 2:9).” 긜고 “많은 하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신다(히 2:11).”
삼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이 죽고 썽거가는 걸 보실 수 없었다.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ㅇ예수님을 ‘사람’을 만드셔서, 그 몸에 죽음을 짊어지우신다. 우리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끌고 영광으로 들어가신다.
부활의 주님을 묵상하자. 그 능력, 그 사랑을 생각하자. 우리를 이끌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실 예수님. 그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몸을 입으셨다. 그랬기 때문에 부활에서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이끄실 수 있다.
3.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
공관복음서 중에 누가만 이 점을 강조한다. “너희를 위해서 주는 내 몸”. 이 단어, ‘위한’ 이라는 이 단어는 대신아여, 라는 단어로 바꿀 수도 있다. 죄 때문에 죽어야 할 너희 대신, 내가 죽는다. 내 몸이 그렇게 죽는다. 너희를 위해, 너희 대신해서 죽는다. 이제 내가 가진 죄 없음, 의로움은 너희들 거다.
이것이 내 몸이다.
이 ㅣ구절은 가장 논쟁이 많았었다. 천주교의 화체설도, 루터의 공재설도 이 구절에 근거한다. 내 몸이다. 내 몸을 상징한다.
괜한 신학적 상상이 필요하지 않다. 핵심은 이거다. 주님은 왜 몸이 패요하신가? 왜 그 을 우리에게 주시는가?
나가면서
주님의 몸, 이 한 마디가 이렇게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릴 대신해서 피흘리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께서는 죽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