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부 설교]그리스도인으로 살기 : 하나님 기다리기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59 views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고, 나의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도다

Notes
Transcript

서론: 오직 주만이

이번 한 주간 말씀을 준비하며 계속해서 흥얼거리던 찬양이 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라는 찬양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소망이 저에게서 나는 도다
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이시니
오직 주만이 나의 산성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
이 찬양의 가사를 묵상하면 나의 영혼이 잠잠히라는 문구가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등장하는 표현이지요.
잠잠하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말없이 가만히, 소란하지 않은 조용한 상황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시편 62편의 저자는 말없이 가만히..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호흡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있는 이 시간은 나 자신을 진지하게 하나 하나 돌아보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본문1)

오늘 시편 기자는 말없이 가만히 있는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의 달콤한 축복을 경험한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평화로운 꿈 속의 한 장면처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들 또한 말없이 가만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호흡하는 시편 기자의 이런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웹브라우저로 검색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잠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없이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다는 것이, 하나님과 호흡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지 결과가 보여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시편 기자가 누렸던 하나님을 말없이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은 그렇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 하나님 앞에 잠잠함이여.” 시인이 고백하는 이 내용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낯설고 어색한 내용이 되었습니다.
AI시대, 초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영혼이라는 말은 추억 속에 남겨진 단어, 지금은 공감하지 못할 단어일까요? 왜 이 내용이 낯설고 어색하게만 들려지는 걸까요?
도대체 영혼이라는 것은 무엇일가요?
영혼은 우리에게 공급되어진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입니다.
추억 속에 남겨진 단어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져버릴 기억이 아닙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진실이며, 우리는 영혼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내 영혼이 .. 하나님앞에서 잠잠함이여.” 이 말은 내가 존경하는 영웅과도 같은 사람을 바라보며 잠잠해지듯이, 우는 아이가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을 바라듯이, 환자가 의사 앞에서 잠잠해지듯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 또한 모든 근심, 걱정, 불안을 잠재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연인을 바라보며 행복에 잠기듯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을 하더라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세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듣는 가운데 호흡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잠잠하게 되는 그 시간은 나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하는 축복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 내가 듣겠습니다.” 라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한 가지 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답은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다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작아짐을 경험하는 시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기쁨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그 길을 발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잠잠하게, 말없이 가만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깊이 마셔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 곁에 있으렴. 내가 너의 참 아버지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시간을 만들기를 어려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는 이러한 시간을 만드는 것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소음에 익숙해 있습니다. 고요한 시간이 불편합니다. 두렵습니다. 어색합니다. 불안합니다.
그 시간을 지루한 시간, 아무런 유익이 없는 그냥 낭비되고 허비되는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시간을 통해서 발견하게 될 진실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같아 두려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마주하게 될 때, 드러난 나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이 만남을 피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피해서 세상의 문화 속을 찾아가는 일들이 지금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신앙생활에 대한 우리의 안이한 자세입니다.
처음 시작은 누구나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진지함이 사라집니다. 신앙의 감정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느끼고 있든지 느끼지 못하고 있든지 지금 이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만남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중세 수도원 시대가 있습니다.
이 시기에 베네틱트는 노동이 기도라고 말하며, 육체적 나태함은 곧 영적인 나태함이라고 보았기에 규칙적인 노동과 엄격한 기도생활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대화는 수고하지 않고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을 계속해서 점검하고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에서 10분이라도 좋으니 말없이 가만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 하나님 앞에 잠잠히 나아가는 시간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연습해야 합니다.
시작은 물론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하나님의 평안을,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세상에는 쉼도 없고 만족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 채워도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원하던 것을 얻고 난 이후 새로운 욕망이 자리잡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표로 했던 물질을 소유하게 되면 더 큰 물질의 욕망이 자리잡습니다.
목표로 했던 권력을 얻게 되면 더 큰 권력의 욕망이 자리잡습니다.
왜 목표를 한 것을 얻게 되었는데도 만족을 느끼지 못할까요?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주 하나님,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찾아가도록 창조하셨고,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 우리 영혼은 불안합니다.”
청년 여러분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안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없이 가만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그 자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자리를 삶 속에서 만들어나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