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은 새 부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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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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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 새로운 질서에 적합한 삶(9:14–17)

. 새로운 질서에 적합한 삶(9:14–17)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한 것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 금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단락의 이야기는 앞의 단락의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바른 관점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바른 관점을 심어주신다.

1)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9:14)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한다(14절). 그들은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메시아에 대해서 많이 배웠지만,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는 지금(참고. 4:12; 11:2) 여전히 유대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유대주의의 엄격한 관례들을 좇고 있다(참고. 눅 5:33; 11:1).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금식은 당시 유대주의의 보편적인 의식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기도와 병행된 금식은 경건의 표시였으며, 통회와 슬픔의 상징이었고, 죄로부터의 정결을 위한 절차였다. 원래 율법에서 금식은 속죄일에만 하도록 되어 있었다(참고. 출 20:10; 레 16:1–34; 23:26–32; 25:9; 민 29:9–11).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의 요구가 아니었지만, 참회의 때에 금식했고(참고. 삼상 7:6; 욘 3:5),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에 금식했으며(참고. 삼하 12:21–23; 에 4:16), 애도를 위하여 금식했다(참고. 삼상 31:13).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는 1년에 네 번 금식했다(참고. 슥 8:19). 그러나 주후 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금식했다(참고. 눅 18:12; 디다케 8.1; 미쉬나 타하니트 I.4–5 등).

그런데 여기서 많은 유대 종파들 가운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언급된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신흥세력을 대표하고 바리새인들이 기성세력을 대표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욕적인 생활 방식으로 금식했고(참고. 3:4; 11:18), 바리새인들은 신앙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시로 금식했다(참고. 눅 18:12).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왜 당신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들이 제자들의 문제를 제자들에게 직접 묻지 않고 선생이신 예수님에게 묻는 것은 당시에 제자들의 행동은 선생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의 답변(9:15–17)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역질문(counter-question)을 제기하는 랍비적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이러한 방식은 예수님이 즐겨 사용하시던 토론 방식이었다. 예수님은 혼인집을 은유하여 대답하신다. 혼인집 이미지는 메시아의 도래를 통한 하나님과 백성들의 잔치를 상징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은유적으로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묘사되었다(참고. 호 2:16–20; 사 54:4–8; 62:4; 렘 2:2; 31:32; 겔 16:7–14).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이러한 이미지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참고. 마 22:1–14; 25:1–13; 고후 11:2; 엡 5:22–32; 계 19:7, 9; 22:17).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슬퍼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씀하신다(15절a). 즉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과 어떤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다. “슬퍼할 수 없다”는 것은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와 연결하여 금식의 부당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15절b).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날을 뜻한다. 예수님은 비록 아직 사역의 초기이지만 자신이 장차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날의 슬픔을 미리 예고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과 기존 유대 종파의 행동을 대조하기 위하여 두 가지 비유를 드신다. 그것은 ‘새 옷 비유’와 ‘새 포도주 비유’이다. 옷과 포도주는 혼인잔치와 관계된 것들이며, 새 것과 낡은 것은 새로운 것과 옛 것의 대조를 보여준다. 먼저 새 옷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한다고 하신다(16절). 이는 새로운 질서가 옛 질서와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포도주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고 하신다(17절). 이것 역시 새로운 질서가 옛 질서와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두 비유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에서 새로운 기독교로의 변화를 요청한다. 예수님은 새로운 옷이며 새로운 포도주이지만, 유대교는 낡은 옷이며 낡은 포도주이다. 새 것과 옛 것이 어울리지 않듯이, 예수님과 유대교는 어울리지 않는다.

교훈과 적용

1.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서 많은 훈련을 받았겠지만 여전히 메시아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메시아가 가져오는 새로운 질서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금식에 대한 유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말씀을 많이 전하고 듣지만 충분하고 정확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말씀을 예수님 중심적으로 가르치고 배워야 하며,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2. 유대주의자들은 금식을 비롯하여 기도와 구제 등의 경건한 행동을 외식적으로, 형식적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비판하셨다(참고. 6장). 우리는 바른 기도와 바른 구제와 바른 금식을 해야 한다. 그러한 행동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바른 방법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경건에 도움이 된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거나 공로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3.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에 적합한 삶을 강변하셨다. 지금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제는 과거의 어둡고 희미한 삶에서 밝고 분명한 삶으로 전환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조명된 상태로 받아야 하고 믿어야 한다. 이것을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읽기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옛 습관과 옛 규례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습관과 새로운 규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오늘은 금식에 관한 논쟁입니다. 18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예수님은 마가복음 2장 14절부터 보면 아패로의 아들 레위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간단하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레위가 따랐죠 레위는 세리였는데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이 집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여기서 레위는 마태의 개명전 이름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9장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마태의 이름으로 적혀있습니다. 마태의 집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십니다.  근데 그날이 바리새인들같이 율법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금식하는 날이었나봐요
원래 금식은 처음 레위기에서는 일년에 속죄일 한번만 금식을 했습니다. 레위기 16장에 보면 원래 율법에서는 딱히 금식을 여러번 하라고 하지 않았으나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중요한날 예루살렘이 함락된날 성전이 파괴된날 그달랴가 암살된날 예루살렘이 포위된 날 또한 에스더서에서 나온 사건인 부림절날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했습니다. 근데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서 이 외에도 여러날을 금식하고 일주일에 두번씩 월요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입니다  이 당시 세례요한은 헤롯왕에 대해서 비방했기 때문에 투옥된 상태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금식 기도와 좀 다르게 세례요한이 가르친 천국이 도래하는 복음을 듣고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새 날을 기대하면서 회개하고 근신하며 금식하고 있엇습니다. 
이 두 부류는 통하는게 있던 모양인지 함께 예수님의 무리에게 질문합니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 예수라는 청년의 무리들은 금욕적이거나 율법적이지 않았거든요 
그러면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9-20절을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이야말로 혼인 잔치의 때와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혼인집의 신랑과 손님과의 관계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물론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그리고 ‘손님들’은 문자적으로는 ‘신부방의 아이들’인데 이들은 신랑의 혼인예식에 초대받은 친구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신랑을 도와 혼인예식을 잘 치를 수 있도록 돕는 자들이었습니다. 혼인예식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잔치 상을 받고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그를 도와 손님들을 맞아들여 음식을 먹고 마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혼인예식의 잔치 상을 받아 놓고 곧 신랑을 곁에 두고 금식 한다면 말이 됩니까? 예수님은 이처럼 혼인집 손님을 예로 들어서 자신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설명하셨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자랑이며 금욕적인 삶의 실천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금식같은걸 해본적 있으신지 모르겠는데요 저희학교는 좀 안좋은 상황에 있어서 교수님이나 대학원생들이 돌아가면서 금식하며 학교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새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하며 금식했지만새 출애굽은 금식을 통해서 오지 않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새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구원의 시대가 임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옛 시대의 방식을 고집하게 됩니다. 이 방식을 전통으로 고착시키며, 고집하게 됩니다. 또한 이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시대는 옛 시대의 방식으로 오지 않으며, 옛 시대의 방식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의 노력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던 구원의 방식들은 위로부터 임한 하나님의 구원 앞에 무용지물로 드러나고 맙니다.
금식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써 아름다운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이 새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새 출애굽을 가져다줍니다. 새 이스라엘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 금식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하고 있는 메시아 곧 구주이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분이십니다. 그분과 더불어 함께 있는 것은 그분과 더불어 희락하는 것인데 슬픔을 토로하는 금식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금식과 같은 규정은 예수님께서 오시면 없어질 것이었습니다(골 2:16, 히 9:10). 
그런데 금식 규정 준수 여부를 논하며 그것을 빌미로 책잡고자 하는 것은 실은 그들 자신을 율법 아래 놓아 스스로를 죄와 사망에 묶어 놓는 것이 되고 맙니다. 혼인집에서 울 수 없고 초상집에서 웃을 수 없듯이, 기쁨이 넘쳐야 할 때에 슬픈 마음으로 금식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실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신 것은 그것 자체가 큰 기쁨이요, 복인 것입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모든 복이 예수님 안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쁨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을 예로 들어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자신을 좇는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먹고 마시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지를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기뻐하고 신앙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금식과 같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신앙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불신앙인지를 나타내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구약의 율법, 곧 전통과 관습 아래 살아갑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새 시대의 복음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반면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통해 새 시대 복음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진 새 시대의 복음에 대한 의식 정도가 어떤 것인가 하면 낡은 구약의 전통과 사상 하에서 만들어 놓은 제도에 올려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도래한 새 시대의 복음, 곧 하나님의 복음에서 증거 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어 먹고 마시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제자들이 새 시대의 복음을 접하고 살아간다고 하면서 구약 율법에 매여 전통과 관습을 좇으므로 여전히 금식일 규정의 준수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 율법주의를 그대로 담고 있는 신앙은 형식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구약의 율법과 전통 아래 남아 있어서는 결코 복음적 신앙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율법주의와 새 시대의 복음은 결코 화합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유사한 신앙이 항상 잠재적으로 잔재해 있으며, 발현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을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고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열심으로 금식과 기도를 통해 자기 의의 만족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비단 금식과 기도 문제 뿐만 아니라 예배와 전도와 같은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전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두는 경건과 자기 의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을 경계시킵니다. 디모데후서 3:5절을 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출애굽의 시대 우리는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 은혜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곧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화목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 은혜에 기초해서 주님과 동행하며,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마가는 계속해서 ‘새 포도주와 새 부대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새 포도주가 발효하여 팽창하게 되면 낡은 가죽 부대가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해 터져 포도주와 부대 모두 버리게 되고 맙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메시아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회개의 물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들었습니다(마 3:1-12).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그들 선생이 자랑으로 삼고 있는 모세의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함을 들었습니다(요 12:34). 사실 모든 성경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기록되었습니다(눅 24:44).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은 새 시대의 복음입니다. 그 분에 대해 듣고, 그 분을 바라봄은 새 시대의 도래의 특징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자에게 팽창되어 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자기 자신이 누구 신가를 증거 하여 계시함으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으로 복음은 모든 자에게 팽창되어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메시아사상은 새 포도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말씀을 또 다시 본다면 우리는 새포도주의 반댓말이 낡은 포도주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숙성된 포도주지요 복음을 접한 우리가 새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였다면 우리는 그 새부대와 함께 숙성되어갑니다. 숙성된 포도주가 되었다면 부대도 숙성이 되어서 쉽게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겠죠 신앙에 성숙한 우리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서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안에서 여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적 전통과 관습을 그대로 답습하여 장로들의 유전과 제도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형식적 신앙을 고집하고 남아 있으면서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 결코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그들 자신을 정죄하는 심판이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비유를 통해서 그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복음은 낡은 율법과 전통으로 담을 수 없습니다.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복음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낡고 형식적인 부대를 버리게 하시고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복음을 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복음잔치에 기쁨으로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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