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은 새 부대에
. 새로운 질서에 적합한 삶(9:14–17)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한 것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 금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단락의 이야기는 앞의 단락의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바른 관점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바른 관점을 심어주신다.
1)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9:14)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한다(14절). 그들은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메시아에 대해서 많이 배웠지만,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는 지금(참고. 4:12; 11:2) 여전히 유대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유대주의의 엄격한 관례들을 좇고 있다(참고. 눅 5:33; 11:1).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금식은 당시 유대주의의 보편적인 의식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기도와 병행된 금식은 경건의 표시였으며, 통회와 슬픔의 상징이었고, 죄로부터의 정결을 위한 절차였다. 원래 율법에서 금식은 속죄일에만 하도록 되어 있었다(참고. 출 20:10; 레 16:1–34; 23:26–32; 25:9; 민 29:9–11).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의 요구가 아니었지만, 참회의 때에 금식했고(참고. 삼상 7:6; 욘 3:5),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에 금식했으며(참고. 삼하 12:21–23; 에 4:16), 애도를 위하여 금식했다(참고. 삼상 31:13).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는 1년에 네 번 금식했다(참고. 슥 8:19). 그러나 주후 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금식했다(참고. 눅 18:12; 디다케 8.1; 미쉬나 타하니트 I.4–5 등).
그런데 여기서 많은 유대 종파들 가운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언급된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신흥세력을 대표하고 바리새인들이 기성세력을 대표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욕적인 생활 방식으로 금식했고(참고. 3:4; 11:18), 바리새인들은 신앙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시로 금식했다(참고. 눅 18:12).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왜 당신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들이 제자들의 문제를 제자들에게 직접 묻지 않고 선생이신 예수님에게 묻는 것은 당시에 제자들의 행동은 선생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의 답변(9:15–17)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역질문(counter-question)을 제기하는 랍비적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이러한 방식은 예수님이 즐겨 사용하시던 토론 방식이었다. 예수님은 혼인집을 은유하여 대답하신다. 혼인집 이미지는 메시아의 도래를 통한 하나님과 백성들의 잔치를 상징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은유적으로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묘사되었다(참고. 호 2:16–20; 사 54:4–8; 62:4; 렘 2:2; 31:32; 겔 16:7–14).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이러한 이미지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참고. 마 22:1–14; 25:1–13; 고후 11:2; 엡 5:22–32; 계 19:7, 9; 22:17).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슬퍼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씀하신다(15절a). 즉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과 어떤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다. “슬퍼할 수 없다”는 것은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와 연결하여 금식의 부당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15절b).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날을 뜻한다. 예수님은 비록 아직 사역의 초기이지만 자신이 장차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날의 슬픔을 미리 예고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과 기존 유대 종파의 행동을 대조하기 위하여 두 가지 비유를 드신다. 그것은 ‘새 옷 비유’와 ‘새 포도주 비유’이다. 옷과 포도주는 혼인잔치와 관계된 것들이며, 새 것과 낡은 것은 새로운 것과 옛 것의 대조를 보여준다. 먼저 새 옷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한다고 하신다(16절). 이는 새로운 질서가 옛 질서와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포도주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고 하신다(17절). 이것 역시 새로운 질서가 옛 질서와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두 비유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에서 새로운 기독교로의 변화를 요청한다. 예수님은 새로운 옷이며 새로운 포도주이지만, 유대교는 낡은 옷이며 낡은 포도주이다. 새 것과 옛 것이 어울리지 않듯이, 예수님과 유대교는 어울리지 않는다.
교훈과 적용
1.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서 많은 훈련을 받았겠지만 여전히 메시아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메시아가 가져오는 새로운 질서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금식에 대한 유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말씀을 많이 전하고 듣지만 충분하고 정확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말씀을 예수님 중심적으로 가르치고 배워야 하며,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2. 유대주의자들은 금식을 비롯하여 기도와 구제 등의 경건한 행동을 외식적으로, 형식적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비판하셨다(참고. 6장). 우리는 바른 기도와 바른 구제와 바른 금식을 해야 한다. 그러한 행동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바른 방법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경건에 도움이 된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거나 공로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3.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에 적합한 삶을 강변하셨다. 지금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제는 과거의 어둡고 희미한 삶에서 밝고 분명한 삶으로 전환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조명된 상태로 받아야 하고 믿어야 한다. 이것을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읽기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옛 습관과 옛 규례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습관과 새로운 규례에 따라 살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