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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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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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 비유 / 마태복음13장 24-30 / 주일설교 / 20200802
*1.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하겠습니다. <나는 하늘아래 하나밖에 없는 보석과 같은 존재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를 저주하고 절망하게 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심어줍니다. “넌 인생이 왜 그러냐~ 넌 불쌍한 인생이다, 너 실패한 인생이야~ 너 해도 안되” 여러분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공과 실패를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보시고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늘아래 하나밖에 없는 보석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들어가는 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 때문에 교회를 떠날까요? 제 경험으로 1위가 목사입니다. 2위가 사모, 3위가 장로님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우리교회는 장로님들이 워낙 양반이어서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묵묵히 섬기는 스타일입니다. 장로님들은 문제 될게 없습니다. 저희 아내는 워낙 센스가 있어서 큰 문제가 될게 별로 없습니다. 가장 문제는 목사죠. 저희 교회는 저만 잘하면 교회가 잘 세워질 수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유형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가 3가지로 생각해봤습니다.
첫 번째 상습형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상습적으로 교회를 옮깁니다. 보통은 이사를 한다든지, 교회에 갈등이 있는 경우, 그리고 어떤 계획과 비젼을 가지고 옮기기 않습니까? 상습형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습니다. 그냥 다양한 교회, 다양한 목사, 다양한 성도들을 만나고 경험합니다. 물론 본인 나름대로 이유는 분명이 있습니다.
두 번째 욕심형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교회를 떠납니다. 예를들어 장로님이 되고 싶은데 교회에서 쉽게 세워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삐져서 떠납니다. 내가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싶은데 채워지지 않으면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유형들은 자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자기의 스타일을 강조합니다. 자기의 경험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 번째 평화형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단어의 뜻대로 평화를 위해서 본인이 떠납니다. 분명히 교회 안에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한두 번 정도 건의 하거나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도 교회에 변화가 없습니다. 본인이 조용히 떠나는 경우입니다. 갈등이 있으면 소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리고 왠만하면 싸우지 않습니다.
평화형들은 대체로 착하죠. 우리교회도 올해 등록하신 분 들면 대부분 성품이 착합니다.
반대로 욕심형들은 강합니다. 어떤 때는 교회가 갈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투고 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화형들은 평화를 위해서 본인이 떠납니다.
(설명)기본적으로 교회는 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갈등과 문제가 생겨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모든 조직도 비슷합니다. 화면을 볼까요? 일반 조직도 소통이 잘 되어야 만족도가 높습니다. 우리 몸도 혈액순환이 잘 되어야 건강한 것처럼 교회도 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목사와 소통이 잘 되고 성도와의 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목장 안에서 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간단한 것 같으면서 복잡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복잡함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천사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박사들의 모임도 아닙니다. 교회는 인격이 좋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담배도 피시는 분이 있고 술도 한잔씩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학생 때 껌도 좀 씹어보신 분도 있습니다. 학생 때 주먹깨나 쓴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가라지라가 있다고 말합니다. 화면을 볼까요? 가라지는 가짜 밀, 혹은 독보리로 부릅니다. 모양이 밀이나 보리와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한마디로 알곡이 아니라 풀의 일종입니다.
교회안에도 가라지가 있습니다.
가정에도 가라지가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중에도 가라지가 있습니다. 누구죠? 가룟유다입니다. 예수님을 은30에 팔았습니다. 이게 있을 수 있습니까? 제자가 자기 스승을 팔았습니다.
회사에도 가라지가 있고 직장에도 가라지가 있습니다. 가라지를 만났을 때 너무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목사도 가라지가 있습니다. 요한복음10장 11-12절 말씀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예수님은 선한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양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삯군목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리나 늑대의 위협이 있을 때는 물리쳐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삯군목자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갑니다. 예수님은 선한목자이십니다.
제자훈련의 선구이자 이신 옥한흠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 중 90%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고 있다. 나머지 10%가 한국교회의 힘을 빼는 썩은 사과와 같다. 상자에 든 사과 중에 99개가 온전해도 1개가 썩어 있다면 나머지가 썩는 건 시간문제다> 가라지 같은 목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목사가 진리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가라지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을 세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신앙은 50점짜리 신앙입니다.
첫 번째 천국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이미 천국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천국은 임했습니다. 내가 느낄 수도 있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마귀가 주권을 장악하고 있다면 사탄의 왕국이 됩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살면 내 왕국이 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함을 받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천국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두 번째 천국은 이미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현재 내 안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적인 천국입니다. 아무리 죄악과 불법이 가득해도 내 안에 시작된 천국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천국은 그 날에 완성됩니다. 천국은 영광 가운데 그 날에 완전히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로 알고 있는 천국은 세 번째입니다.
천국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고 그 날에 완성이 됩니다.
씨가 옥토에 떨어졌을 때 씨앗은 잘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천국은 삼십 배, 육십 배, 혹은 백배, 즉 상상할 수 없는 세계로 확장됩니다. 어느 누구도 이 천국을 다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천국은 계속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3장 31-32절 말씀입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겨자씨는 우리나라는 말하면 들깨정도의 크기입니다. 화면을 볼까요? 크기는 1-2m정도입니다. 정말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이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됩니다. 보통 3-4m 높이로 자란다고 합니다. 그러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곳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천국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 끝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금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어야 합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와야 합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라지가 있습니다.
25-26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천국은 가라지와 함께 자랍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이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선과 악이 존재하듯 교회 안에서도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싸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두 가지 마음이 존재합니다.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고 동시에 성령의 소욕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이나 악 중에 어느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어느 편에 있는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가라지편에 있는냐? 알곡편에 있느냐?
내가 육체의 소욕대로 살고 있느냐? 성령의 인도 따라 살아가느냐?
종들이 의아해했습니다. 종들이 분명히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씨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자라고 보니 가라지가 많이 생겼습니다. 분명히 좋은 씨만 심었습니다. 그런데 가라지가 왠 말입니까? 종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가라지도 도대체 어디서 생겼습니까? 27절 말씀입니다.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가라지의 배후 세력은 마귀입니다.
누가 가라지를 심었습니까? 예수님은 원수가 그렇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정체를 늘 영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39절 말씀입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귀는 가라지를 밤에 몰래 뿌렸습니다. 이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마귀는 파괴자요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입니다. 마귀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예화) 마귀는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마귀는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불순종하게 만들려했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우리를 시시탐탐 넘보며 우리의 약점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마귀가 틈탈 기회를 주면 안됩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말했습니다. ‘아바마마~다윗은 생명을 마쳐 나라를 지킨 사람입니다. 무죄한자에게 피를 흘리게 하면 안 됩니다. 그때 사울이 마음을 돌이키고 죽이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맹세까지 합니다. 사무엘상19장 6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맹세까지 하고 죽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다윗에게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무엘상19장 9-10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오늘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울이 악령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창을 던졌습니다. 이게 사람의 정신으로 한 것일까요?
(예화) 도박중독에 빠진 사람들 있죠. 그들은 종종 맹세합니다. 이젠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리도 결단을 합니다. 한번만 더 하면 내 손목아지를 자르겠다고 합니다. 대단한 결단입니다. 그런데 몇 일까지 못하고 또 도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귀가 그를 사로잡은 것은 아닐까요? 부정적인 사고가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술중독도 비슷합니다. 다시는 안 먹겠다고 합니다. 맨날 오늘부로 끝이라고 합니다. 한잔만 먹겠다고 합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술을 먹으면 사람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술을 먹습니다. 술이 술을 먹는 단계입니다. 이젠 내 의지로 끝을 수 없게 됩니다. 혹시 그 배후에는 마귀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화) 여러분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제자가 할 짓이 아닙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팔려고 했을까요?
요한복음13장 2절 말씀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마귀의 밥이 되면 악한 것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 마귀가 벌써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안에 거해야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까?
마귀는 사기꾼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기꾼은 절대 사기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매너가 있습니다. 밥도 잘 사주고 연락도 자주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줍니다. 어떤 때는 천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은 사기입니다. 사기 당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럴 줄 몰랐다.
우리는 종종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왜 악인의 불의를 보고만 계실까? 불평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배려가 있습니다. 28-29절 말씀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주인이 뽑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알곡까지 뽑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처음에는 알곡처럼 보입니다.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가라지가 알곡과 구별되어 보일 때 이미 가라지의 뿌리가 알곡의 뿌리와 뒤엉켜 있을 때입니다. 이때 가라지를 뽑으면 알곡마저 뽑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라지를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을 방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10개의 가라지보다 한 개의 알곡을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멸할 능력이 없어서 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잠깐 보류하십니다.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적용할 교훈이 있습니다.
1. 가라지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젠 개척한지 4년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등독하신 분들을 대충 계산해보면 100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평균 출석은 아이들 포함해서 50-60명입니다. 그럼 나머지 분들은 어디 가셨을까요? 이사하신 분도 있고, 유학가신 분도 있고, 쉬고 계신 분도 있고 다른 교회로 옮기신 분도 있습니다.
교회가 잘 맞지 않아서 옮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어디든 잘 정착해서 출석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냥 쉬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더 마음의 부담이 있습니다. 교회가 좀더 잘 했어야 하는데 아쉬움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원래부터 완벽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나를 괴롭히는 가라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라지가 없다고 해도 교회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는 무균실이 아닙니다. 보통 뇌수술을 하면 일정 기간 동안 무균실에서 집중치료를 합니다. 만약에 균이 있으면 2차 질병의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균실은 온도, 습도가 최적이고 세균도 거의 없겠죠.
교회는 무균실 아닙니다. 어떤 분은 이해가 안 간다고 합니다. 이해하려고 하지말고 인정하려고 하십시오. 부부도 이해가 돼서 같이 삽니까? 직장 다니시는 분은 사장님이 이해가 되십니까? 사장님은 직원들이 이해가 되십니까?
어떤 분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순결성을 지켜야 하지만 그렇다고 불완전함을 보고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완벽을 꿈꾸지 마시고 하나됨을 꿈꾸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는 대부분 정관에 징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쉽게 징계를 내리지는 않죠. 왜냐하면 진실된 성도들까지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연약한 성도들이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라지에 미혹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화) 시골에 가면 개 한 마리가 짖습니다. 그러면 동네에 있는 모든 개들이 다 짖습니다. 개들이 짖는다고 못가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비방한다고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것 따지고 분석하면 뭐합니까?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아시죠‘
2. 알곡답게 살아야 합니다.
가라지는 알곡이 될 수 없습니다. 한번 가라지면 마지막도 가라지입니다. 알곡은 가라지가 될 수 없습니다. 한 벌 알곡이면 계속 알곡입니다.
여기서 알곡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행위와 열심 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가라지는 알곡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라지 같은 사람은 알곡으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다면 포기하지 마시고 그가 알곡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알곡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여러분 내 신앙을 자랑하지 말고 열매를 자랑하십시오.(내 신앙을 자랑하지 말고 열매를 자랑하자) -따라하겠습니다.
열매로 내 신앙을 증명해야 합니다.
마태복음7장 18-20절 말씀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내가 맨날 싸우고 다닌다~ 그러면 벌써 열매가 이상하잖아요.
내가 종종 사기친다~ 그러면 벌써 열매가 이상하잖아요.
알곡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살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침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욕하다가 세월을 다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항상 나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3.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닙니다. 마지막 까지 돌아오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질문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하나님~ 언제까지 고생해야 합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마지막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13장 30절 말씀입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지막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어떻게 할까요? 가라지는 거두어 불에 태워버립니다. 알곡은 곳간에 넣습니다.
지금은 가라지와 곡식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가라지는 불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단으로 묶습니다. 곡식은 곳간에 들어갑니다.
추수 때는 바로 심판의 때를 말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무작정 기다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보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악인은 잘 살고 형통한 삶을 사는데 의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속상해하거나 시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편37편 1-2절 말씀을 볼까요? 표준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머지 않아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존재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24장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무엇이 필요할까요?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고난은 단지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실 속에 화초처럼 자라길 원하지 않습니다. 거친 야생에서도 살아남는 화초가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야생에서는 거친 비바람도 맞아야 합니다. 때론 목마름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천국은 아직 완성된 곳이 아닙니다. 이세상은 아직 마귀와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인내하고 참고 견뎌야합니다. 우리의 인내가 다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