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속의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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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리는 어떻게 선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우리 삶의 곳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일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실제적인 조언을 합니다. 우리는 한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직장에 들어가면 변하게 되는 일을 종종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 배운 믿음대로 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곤혹스러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각자의 일터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오늘 베드로의 권면은 언뜻 보면 추상적인 원칙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 배경과 정황을 알게 되면 이 권면이 매우 치열하고 절절한 내용임을 알게 됩니다.
18절의 ‘종들’이란 주로 당시 로마 사회에서 한집안에 살면서 그 집 주인과 가족을 섬기는 노예 신분의 종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로마 경제는 사실상 노예 경제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당대의 기록들에 의하면 1세기 말 로마 도시의 경우 전체 인구 120만 명 중에 노예들은 3분의 1인 4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5~6백만 명의 시민 중에 1~2백만이 노예들이었다고 추정합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지금 베드로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라’라고 권면하는 그 노예들의 사회적 환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유인이 아니었고, 시민권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합법적으로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재산 목록 일부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이고 성적으로 남용되었으며, 주인의 의지나 기분에 종속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들은 강제로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그들은 집안에서도 그 사회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해있었습니다.
이렇듯 당시의 노예들은 어떤 사회적, 법적 보호 장치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인격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재산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도 ‘까다로운 자들’에게 겪는 일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좀 더 잘 표현하면 ‘완악한 자’입니다. 고의로 부당하게 대하고 성품이 왜곡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19절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겪으며 슬픔을 참으면’이라는 표현은 부당한 요구를 당해서 슬프고 억울한 마음과 몸의 짐을 짊어진 모습을 상상케 합니다. 더구나 자신은 잘못한 일이 없는 경우입니다. 20절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선한 일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고난을 겪게 되고, 그 고난 중에서 계속 견디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베드로 사도는 오히려 ‘억울하지만 참으라’라고 말합니다. 왜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하는 걸까요?
흥미롭게도 18절에서 ‘종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이 나오기 전에서 16절과 17절에서 베드로는 이들을 두고 ‘하나님의 종’으로 명명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 주인의 종들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정체성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복음 안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이 자유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자유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종과 자유자가 따로 없는 형제 사랑을 통해 경험하고 누리고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유였습니다.
로버트 뱅크스의 흥미로운 책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와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이야기』를 보면 이러한 대목들을 이야기로 쉽게 풀어놓았습니다. 100여 페이지 정도 되는 매우 얇은 책이니 한번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교회는 노예들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공동체적 자유를 누리는 곳이었습니다. 종과 자유자가 따로 없는 형제 공동체를 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거친 바다 같은 불의한 세상 한복판에서 희망의 항구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18절에서 ‘종들’이라 할 때, 이들은 복음 안에서 교회 안에서 믿음 안에서 이미 16절 끝에서 선포한 대로 ‘하나님의 종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집안의 주인에게 속해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제 그 집안으로 파송을 받아 나간 ‘제사장’인 셈입니다. 이런 역설은 당시 노예들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태도를 보면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18절 이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 베드로가 권면하는 대상이 주인들이 아니라 종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불의한 세속 한복판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쪽은, 힘이 있는 주인이 아니라 불의한 일을 당하게 되는, 도리어 약자에 속하는 노예 쪽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권면은 참으로 곤혹스럽습니다. 고통당하고 억울하고, 힘이 없는데, 참고 순종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 차 있습니다. 베드로는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적인 혁명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많은 희생과 고통을 요구하는 방식입니다. 왜 이런 방법을 써야 합니까? 이 싸움은 불의한 주인이나 비인간적인 노예제도나 로마제국과 상대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뒤에 이 모든 것을 조장하는 악과 악의 세력과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악으로 악을 보복하는 것은 악을 더욱 창궐하게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이 세상을 지나면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의 실재를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에서 그 부활 생명, 악을 이기고 승리하신 부활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부활 생명이 바로 거듭난 성도들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 생명의 나타남은 복수가 아니라 ‘은혜’를 통해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로 승리하는 길입니다. 악에 대하여, 강함이 아니라 약함으로 승리하는 길입니다.
베드로는 종들에게 주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함으로써 주인에게 순복하라고 합니다. 18절에서 베드로는 ‘모든 일에 두려워함으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함으로써 다른 모든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까다롭고 악한 주인에 대한 공포감과 두려움이 극복됩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다른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19절에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함으로’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양심’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양심으로 인해’ 불의한 고난을 견디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세상 속의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바로 이 ‘양심’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계속해서 선한 행실, 선한 양심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선한 양심, 새로워진 양심, 거듭난 양심을 통해 세상에 이야기를 건넬 수 있습니다. 세속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회복된 양심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우리와 세상을 위해 이유 없는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억울한 짐을 다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때로는 억울하고 참기 힘들 때가 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이 길을 걸어갑시다. 묵묵히 이 길을 걸으신 주님을 생각함으로 세상 속에서 빛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 한가운데서 억울하게 당할 때도 많고, 그럼에도 참아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생각하며 세상과 소통하는 양심을 가진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