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동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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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골 4:7-18절
제목 : 신실한 동역자들
찬 303장 날 위하여 십자가의
찬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오늘은 ‘신실한 동역자들’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전하겠습니다. 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여러분 제가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이 총 몇권입니까? 네 27권의 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건 초등부 수준의 질문이었고요 진짜 질문은 신약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수는 몇 명일까요? 네 총 9명의 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27권의 책을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성경을 기록한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이지요. 그는 신약성경 27권의 책 중 13권, 히브리서를 포함하면 14권 즉 거의 신약의 절반을 기록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위대한 인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원래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그는 회심 한 후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통해 각 지역에 선교를 나가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죠.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위대한 사도 바울의 업적은 바울 혼자만으로 이루어진 사역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이렇게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이런 복음 사역은 그의 옆에 있었던 성경에는 많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를 도왔던 신실한 동역자들과 함께 이룬 사역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마지막 권면을 마치고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보통 바울서신들을 보면 마지막 인사에 이런 내용들을 볼 수 있는데, 자기 동료들의 인사와 수신교회의 여러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문안으로 서신을 끝맺습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추상적인 논문이나 신학적 연설이 아니라 그 교회의 상황을 듣고 그 상황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필요한 내용들, 그리고 인사를 통해 이 편지가 그 교회에 실제로 보냈던 편지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골로새서 마지막 부분에서도 편지를 받는 골로새 교회에게 먼저 이 편지를 가지고 갈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 7절과 9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골 4:7, 개정)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골 4:9, 개정)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바울이 소개한 두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두기고와 오네시모입니다. 이 두 사람은 골로새 도시로 갈 것이고 그들의 중요한 임무는 바로 이 골로새서를 골로새 교회에게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혹시 두기고라는 인물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바울의 표현으로는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7절에 보면 그는 “사랑 받는 형제” “신실한 일꾼”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였습니다. 두기고라는 인물은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는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복음을 듣고 회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기고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가 힘들 때 연보를 전달하기 위해 갈 때 드로비모라는 사람과 함께 아시아 교회들의 대표로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는 에베소서 6장 21-22절에도 보면 에베소 교회에도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고 바울의 사정을 알려주었던 사람이 바로 두기고입니다.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이 이름의 뜻은 문자적으로 “유용한”, “유익한”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은 고대 노예 사이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자기 종이 유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인이 이 ‘오네시모’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거주하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노예였습니다. 빌레몬서 읽어보셨죠? 여기에 보면 빌레몬과 그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등장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주인의 재산을 훔쳐 로마로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는 로마에서 가택 연금되어 있던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바울의 복음 사역에 신실한 동역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와 함께 하면서 바울은 이 오네시모가 어떻게 로마에 오게 되었는지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의 종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고 그를 다시 골로새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향해 9절에 “신실하고 사랑 받는 형제”라고 부릅니다. 오네시모의 신분이 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호칭은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종과 자유인이 없고 그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다는 것이죠. 오네시모는 원래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에게 피해를 끼치고 로마로 도망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에게 그는 사랑하는 형제였으며 바울이 신뢰할만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두기고와 오네시모 두 사람은 지금 사도 바울이 쓴 편지를 들고 로마에서 출발하여 에베소를 거쳐서 골로새로 향해야 했습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해 바울은 공통적으로 사랑 받는 형제이다. 그들은 ‘신실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복음의 사역에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부터 골로새까지의 여정은 결코 만만치 않은 여정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탈리아에서 터키까지 가야하는 것입니다. 육로 해로 다 합치면 1400km가 넘는 거리를 가야만 했습니다. 이 거리는 광주에서 대만까지의 거리입니다. 그 당시에 비행기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자동차가 있었습니까? 길도 지금과 같이 많은 도로가 포장 된 상황도 아닙니다. 자연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목숨을 내걸고 그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복음과 교회를 위한 일에 헌신과 수고를 했고 이 일을 완수합니다. 그들을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신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믿을만한, 신뢰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는 먼저 사도 바울이 신뢰할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복음을 믿게 되었고 새 사람이 되었고 능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임을 바울은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보기에도 무엇보다 믿을만한, 신뢰할만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사실 이 신실함은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는다와 신실하다라는 말은 같은 어근을 지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십니까? 아니면 약속을 어기십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말하고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닮아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도 믿을만한 사람,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신실함은 어떤 일에 든지 정직하고 신뢰할만하고 충실한 사람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보디발의 집에 노예의 신분으로 신실했습니다. 그는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보디발이 그에게 집안의 모든 소유를 맡길 만큼 정직했고 신실했습니다. 그는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신실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실함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신실함의 눈 앞의 결과는 감옥행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보여주었던 신실함은 하나님께서 그 땅에 임할 기근에서 애굽 사람의 모든 사람들과 이스라엘 가족들을 그의 손에 맡겨 구원하시는 일을 맡기시는 하나님께서 믿을만한 사람이 바로 요셉이다는 것입니다.
신실함은 변함이 없는 충성과 정직을 나타내게 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맡기신 모든 자리에 신실하시길 소망합니다. 정직하게 충성되이 나에게 맡기신 일들을 묵묵히 감당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믿을만한 신실한 성도의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본문 10절부터 14절 말씀은 사도 바울과 함께하고 있는 동역자들이 골로새 교회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로마에 지금 바울과 함께 있는 동역자들은 본문에 6명이 등장합니다.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와 에바브라, 누가, 데마가 함께 골로새 교회에 문안 인사를 합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계속해서 복음 사역에 힘쓰고 있는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인물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간략하게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에서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 함께 했던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 앞에 제판을 받으로 로마로 향해 갈 때 유라굴로라는 광풍도 같이 경험한 사람이었고 지금 로마에 가택연금되어 있는 바울과 함께 갇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라는 사람은 아시죠? 바나바의 사촌이었습니다. 그 마가의 다락방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을 모임 공간으로 제공하였었고 1차 전도여행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도중에 무슨 이유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2차 전도여행 때 이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갈라서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죠. 물론 나중에 바울은 그와 화해했고 그를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지금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마가를 두기고 다음에 골로새로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또 유스도란 사람과 에바브라, 사랑받는 의사 누가와 데마도 골로새 교회에 문안 인사를 전합니다. 여기서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와 참 연관이 깊은 사람이었죠. 13절에 보면 에바브라는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서 사역을 하던 사람이었고 많은 수고로 그들을 섬겼었습니다. 이 세 도시는 굉장히 가까이 있는 도시입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에 거짓 교사의 문제가 생기자 그 문제 때문에 바울의 도움을 받기 위해 로마까지 찾아갑니다. 물론 에바브라는 골로새를 떠난 후 바울과 함께 사역하기로 했고 후임 사역자로 17절에 보면 아킵보라는 사람을 세우게 됩니다. 에바브라는 그 교회를 떠났지만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한 여섯 사람들은 골로새 교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또 그들을 보지도 못하였고 함께 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골로새 교회를 한 공동체이자 자신의 형제로 여기며 문안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비록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며 편지를 써서 전달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고요 여전히 기도로 중보하고 있는 동역자들도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거대하면서도 친밀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였던 것이죠.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은 너무 자기 교회에만 관심을 갖거나 자신의 교회만이 진짜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보면 성령을 믿사오며 그 다음 뭐죠? 거룩한 공회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것은 구별된 보편적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라는 것은 거룩한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별한 특별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다음 보편적이라는 말은 첫 번째는 믿음의 동일성과 시간의 보편성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 항상 동일해야 교회의 보편성이 유지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는 이름이 다를 지라도 같은 한 공교회입니다.
시간의 보편성은 교회는 시간에 상관없이 존재했으며 그곳에 속해있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교회의 시작이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오순절 이후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세상이 창조되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교회에 속해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 공교회를 믿는데, 요즘 자신들만이 아주 독특하고 새로운 교회라고 말하는 곳은 대부분 이단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신앙고백이 같은 교회를 우리의 경쟁자가 아닌 동역자와 형제로 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다른 교회와 동역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30년이 넘게 복음 사역을 한 사도 바울도 혼자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만 해도 6명의 동역자가 그와 함께 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협력하는 사람이었고 동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쉽게 말하면 학벌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도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죠.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은 위대한 사도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독단적으로 자기 잘난맛에 사역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역하는 사역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과 함께 동역하는 사역자들을 아랫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동역자들에게, “함께 종이 된 사람”, “사랑 받는 형제”, “함께 갇힌 자”, “함께 일하는 사역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그렇게 칭찬하던 오네시모의 신분이 무엇이었습니까? 노예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노예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그를 노예취급하며 은근히 무시하며 복음을 가르쳤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학자였고 사도였던 바울은 당시 사람취급 받지 못했던 노예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정말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믿고 신실한 동역자로 바뀌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항상 이처럼 동역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동역은 짐을 함께 지고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참 많은 직분들이 있습니다. 그 직분들은 결코 상하의 관계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성도보다 집사가 높고 집사보다 권사가 장로가 목사가 높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유교 문화가 뼛속 깊이 자리잡혀 있어 서열, 권위주의의 생각이 팽배합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 우리는 과감히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우리의 가치가 새로워져야 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모든 사람들은 몸의 지체입니다. 직분은 역할입니다. 손과 발과 눈과 코가 하는 일이 다르듯 교회의 직분은 맡은 역할이 다릅니다.
먼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잘 감당해야합니다. 먼저 자신의 직분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주어진다면 신실하게 충성되고 최선을 다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다른 형제에게 자신의 짐을 더 지우게 하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서로 동역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짐을 모두 그 사람에게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성도들은 오히려 그 짐을 나누어지려고 합니다. 너무 무겁습니까? 내가 나눠지겠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그 짐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줘야해요. 하나님의 아름다운 동역이 있는 정산교회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번 한해 우리의 삶이 주님께서 맡기신 모든 자리에서 신실한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이 보기에도 믿을만하고 신뢰할만한 우리 모두 되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충성되이 행하며 다른 형제의 짐도 나누어지고 함께 동역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온전케 하는 이번 한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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