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이 능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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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고린도후서 12:1-10절
제목 : 약함이 능력 입니다.
오늘은 ‘약함이 능력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전하겠습니다. 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감사합니다. 2020년 연말인데도 참 많이 뒤숭숭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요즘 지내면서 느끼는 것은 참 혼란한 시대에 지혜가 많이 필요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뉴스를 보아도 인터넷을 보아도, 유투브를 보아도 참 혼란스러운 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세상을 분별하는 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삶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복음성가 중에 “약할 때 강함 되시네”라는 이 노래를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저는 청년 때에 이 노래를 참 많이 부르곤 했는데요, 이 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은 없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약함이 정말로 강함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약함이 능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세상의 강함이 아니라 약함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 놀라운 역설을 말하는 본문 중 하나가 바로 오늘 살펴볼 고린도후서 12장입니다. 본문인 고린도후서 12장은 우리가 그래도 교회를 좀 다녔다고 들어보았을만한 말씀입니다.
이 본문에서 개역한글판으로 말하는 ‘삼층천’ 셋째 하늘에 대한 내용이 나오구요,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의 가시를 위해 3번 기도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들어보셨죠? 이 내용의 맥락은 바로 사도 바울이 자랑에 대한 내용의 맥락에서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자랑은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바울은 자신에 대한 자랑이나 자신을 높이는 것이 무익한 것임을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피할 수만 있다면 이런 무익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린도 교회 안에 일어나는 상황은 그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른 복음을 들고 고린도 교회 안에 들어온 대적자들이 바울과 교인들의 사이를 계속 갈라놓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대적자들은 바울이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며 그의 사도성에 대한 불신을 일으켰고 결국 이 모습은 바울이 가르쳤던 복음과 가르침도 불신하게 만들었죠.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고 자신의 사도성이 다른 사도에 부족함이 전혀 없음을 설명합니다.
본문의 전 단락인 11장 16절부터 바울은 본격적으로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그 자랑은 무엇이었냐면 자신이 대적자들의 혈통이나 그들을 위한 수고가 조금도 뒤처지지 않음을 자랑합니다. 11장 22절 23절 말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고후 11:22, 개정)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고후 11:23, 개정)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바울은 대적자들의 혈통보다 조금도 뒤쳐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도 아브라함의 자손 히브리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도 여러번 갇혔고 매도 수도 없이 맞고 죽을뻔하기까지 했다는 수고를 자랑합니다. 바울은 이런 육체적인 혈통과 수고뿐만이 아니라 대적자들에 비해 영적인 것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인 12장 1절에서 4절까지 등장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어떠한 영적 체험을 자랑합니까?
12장 1절에 내가 어쩔 수 없이 자랑한다, 그것은 주의 환상과 계시입니다. 바울이 왜 환상과 계시를 자랑합니까? 그것은 대적자들이 바울은 환상에 대한 체험도 못한 것이 그가 참된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그를 비난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해 자랑합니다. 이 환상과 계시의 내용은 무엇이었죠? 그 내용은 바로 ‘셋째 하늘’즉 4절 표현으로는 낙원에 이끌려 갔다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 내용 자체를 자신이 다녀온 것이 아닌 2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의 경험처럼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본인이 경험한 이 환상이 개인적 차원에서 주워진 계시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말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대적자들의 말과 다르게 셋째 하늘 즉 낙원에 다녀오는 아주 신비한 체험을 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바울이 이런 것들을 자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사실 그가 진정 자랑하고 싶은 것들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고후 12:5, 개정)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바울이 진정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약한 것들이었습니다. 그가 약함을 자랑하는 이유는 바로 이 약함이 그에게 강함이 되며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역설적인 진리를 알았기에 약함을 자랑합니다. 그렇다면 약함은 어떻게 강함이 되며 능력이 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자신의 약점이나 약한 부분들이 능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약함이 강함 곧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왜 약함이 능력이 될 수 있을까요? 첫 번째입니다. 따라해보겠습니다. 자만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약함은 우리를 자만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능력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약함에 대해 자랑하며 자신의 육체에 가시에 대해 언급합니다. 7절 말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고후 12:7, 개정)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의 대표적인 약함의 모습은 바로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여기서 ‘가시’라는 말은 보통 뾰족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비유적으로 사용되는데, 사람을 좌절시키며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삶에서 그 어려움을 야기시키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사용됩니다. 즉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가시 즉 그에게 문제였고 좌절케 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이 ‘가시’가 무엇인지는 학자들마다 약간의 견해 차이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육체에 어떤 문제 혹은 질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가시를 바울은 ‘사탄의 사자’라고도 말하는데 이것은 사탄이 주었다기 보다는 사탄은 바울의 육체에 제한적으로 이 질병에 사로잡히도록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가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는데 그 이유는 바울을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육체적 약함 즉 가시는 그에게 자만하지 않게 하는 억제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의 약함은 바울 자신을 낮추었고 사람들 앞에 많은 굴욕을 당하게 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에게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약함이 능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만이라는 단어는 우쭐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데살로니가 후서 2:4절에도 사용되는데 “불법의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대부분 약함이나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치 모든 것을 자신의 실력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서 자신이 지금 잘되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탈이 없는 것이 자신에게 연약함이 없는 것을 자신이 한 것마냥 자랑으로 여기며 교만에 가득 찬 사람들을 우리는 때때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약함이 있습니까? 약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약함은 우리에게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사실 누구나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약함이 존재합니다. 바울과 같은 육체의 질병,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고 창피한 부끄러운 부분, 여러 가지 약함의 모습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약함이 부끄러움이 될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그 약함이 우리를 자만하지 않도록 하는 능력이 됨을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자들에게는 은혜 주신다는 말씀을 붙드는 우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왜 약함이 능력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을 바로 따라해볼게요 주님께 더욱 기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입니다.
(고후 12:8, 개정)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 즉 약함을 두고 주님 앞에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약함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바울은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세 번 기도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문제가 생기면 여러분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몇 번 기도하십니까? 고쳐주실 때까지 할꺼 아닙니까? 주님 앞에 간절히 드린 세 번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겟네마네에서 하나님께 잔을 옮겨달라고 세 번 간구했습니다. 여기서 세 번이라는 말은 단순히 한번 두 번 세 번을 의미한다기 보다 이 문제를 가지고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 육체의 질병을 받아들이기 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나아갔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 약함 때문에 주님 앞에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가는 기도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육체 가운데 있는 이 약함이 그에게는 주님께 나아가게 하는 기도하게 하는 능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이런 기도의 시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시편 77편 7-11절까지 보면 이런 시편 기자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시 77:7, 개정)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시 77:8, 개정)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시 77:9, 개정)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시 77:10, 개정)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시 77:11, 개정)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편 기자의 기도처럼 우리도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상황, 약함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갔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은혜를 베푸시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데 결국은 또 나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더라고요. 결국 나의 약함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을 만나는 것이 신자의 능력이며 강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도 육체의 질병,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이런 고통과 질병이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약함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는 자가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가 능력이 있습니다. 남은 한해도 주님께 나아가는 능력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마지막입니다. 왜 약함이 능력이 될까요? 우리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9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고후 12:9, 개정)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의 문제를 가지고 간절히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응답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응답 받았지요. 그가 응답 받은 내용은 그의 질병이 떠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응답을 받은 사도 바울은 다시는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는 통로임을 깨달았던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진정 바울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세상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진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어떤 사람이 능력 있다고 생각할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 아니면 돈 아닙니까?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또는 남 부러워 할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능력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약한 자가 능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해도, 아주 큰 질병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남들 앞에 꺼내놓기 창피할만한 약점을 소유한 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니엘 기도회가 끝이 났지만 그 기도회를 통해 수많은 간증자들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간증들은 거의 무엇입니까? 자신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간증하는 일 아니었습니까? 그들이 돈이 많은 자입니까? 또는 남부러월만한 건강을 소유한 사람들입니까? 아무 탈없이 세상에서 안락하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세상이 보기에는 실패자며 낙오자였을지 몰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났던 것이죠.
이 약함의 능력이라는 역설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히 보여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럼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능력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절대로 예수님은 이 능력을 어떤 뛰어남이나 강함을 통해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그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철저하게 낮아지심과 약함을 통해 능력을 우리에게 행사하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그분은 왕이셨지만 왕궁이 아닌 아주 멋진 성전이 아닌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십니다. 그의 사역은 아주 강하고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천군천사를 동원해 악인과 로마를 심판하시는 것이 그의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그의 사역의 전부였습니다. 이것도 거창하지 못한데 예수님의 사역의 절정은 사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조롱과 수치와 고통을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입니까? 오히려 인생 실패자 아닙니까? 하지만 이 약함의 대명사이신 예수님을 통해 모든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약함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강하다면 예수님이 드러날 자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내가 드러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자리는 사라지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교회는 더 이상 큰 영향력이나 많은 물질 큰 수단을 통해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강함을 통해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바울처럼 철저하게 낮아지며 주님 때문에 약한 자의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물론 이 약함의 길은 편한 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약함을 드러낼 때 더 조롱할지도 모르며 더 그 약함을 이용하거나 물어뜯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 진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더 나아가 교회는 이런 약한 자들을 더욱 더 환영하며 품어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세상의 약한 자들을 돌아보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세상의 강자들처럼 약자들을 착취하며 그들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정말로 부끄러웠던 자들이 약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들의 약함이 능력이 되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