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7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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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세상이 참 공평치 못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래도 양심적으로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는데, 무지한 폭력과 공갈을 일삼는 사람들은 오히려 출세하는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신앙 없는 사람은 힘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며 다스리는 것을 당연시하며, 폭력이나 거짓이 동원되어도 그리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 계시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 계심을 믿습니다. 성경은 심지어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을 어려움 가운데 방치하시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또 뻔뻔하게 죄짓는 자들을 심판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신앙적인 혼란에 빠져 버립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잘 살아보겠다고 마음 먹어도, 세상에 악이 설치는 것을 볼 때, 믿는자들이 다 천사같지 않다는걸 느낄 때, 착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보다 더 어려움 겪는 것을 볼 때 등 마음에 실망이 찾아오면서 신앙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세상을 다스리신다면 어떻게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 설칠 수 있으며, 믿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지도 않으시고 돕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과연 믿어도 될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신앙은 인과응보의 신앙으로서,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착한 일을 한 사람은 계속 어려움을 당하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오히려 잘될 때, 기존의 신앙공식이 통째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씨름하는 문제, 해결해야 할 문제가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독교도 좋고, 사랑도 좋고, 희생도 좋고, 찬송도 좋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통하지 않는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렇게 힘없는 진리보다는 차라리 힘 있는 악이 낫지 않습니까? 이 고민이 풀리지 않으니까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하박국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의 기도를 듣지 않고 외면하십니까? 왜 세상을 의롭게 다스리시지 않습니까? 왜 악을 허용하십니까?
그 당시의 상황
하박국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아보려면 하박국서 내부의 증거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박국의 절망에 찬 기도는 그가 예언하던 당시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유다의 마지막 등불 요시야가 죽고 완전히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였습니다. 왕도 애굽 왕이나 바벨론 왕이 제멋대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서는 다른 선지서들과 달리 어느 왕 때부터 어느 왕 때까지 예언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유다에는 진정한 의미의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의 죽음과 함께 유다에는 왕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유다라는 거대한 배는 서서히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하박국은 그처럼 절망적이고 긴급한 시기에 말씀을 전한 선지자였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당하기 전에 앗수르에게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사야의 말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으면 백성들이 정신을 차리고 한마음으로 나라를 지켜야 할 텐데,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악하고 사치하고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요시야는 유다에 마지막 부흥의 불길을 일으킨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얼토당토않은 일로 죽고 말았습니다. 애굽과 앗수르의 싸움에 억지로 개입했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해 버린 것입니다. 이 전투 이후 유다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불의를 지적해도 요동조차 하지 않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또 질문합니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기만 하면 백성들이 금방 동조해서 나라가 새로워지리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이 아무 효과도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1장 1절을 보십시오.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여기에서 “묵시로 받은 경고”란 환상 가운데서 보거나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것은 하박국 개인의 희망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희망사항이나 소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기대하거나 원하던 메시지가 아니면 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해석을 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은 그 말씀에 압도되게 마련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들을 붙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1절에 나오는 “경고”라는 말에는 ‘무거운 짐’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희망사항과 경고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희망사항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희망사항은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그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무거운 부담감에 짓눌리게 됩니다. 그것은 전해도 그만 전하지 않아도 그만인 말씀이 아니라,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영혼을 살리고 죽이는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이 말씀을 들어야 하며, 그것도 마음을 다해서 들어야 한다는 뜻에서 “경고”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박국서는 선지자의 불평에 가까운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선지자가 말씀을 잘 받아서 백성에게 전하기는커녕 자신도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지 않아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과연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말씀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허공에 외치는 공허한 이론이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몸부림치는 백성들에게 선포되는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까지 그 메시지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 뜻을 몰라서 몸부림치며 갈등할 때,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오지 않아서 과연 계속 기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의심할 때,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하는 때를 전부 포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 좋은 격언이나 위대한 교훈이 아닙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상황에 처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하박국 당시의 상황과 아주 비슷합니다. 전 세계가 어떻게 될지, ‘대한민국’이 어떻게 될지, 한국교회가 어떻게 될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사람들은 더 사치하고 방탕하고 불의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울부짖어 가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조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점점 더 현실적이 되어갑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비참한 멸망을 당하기 전에 회개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점점 더 타락해서 결국 바벨론에 함락당하고 맙니다.
응답하시지 않는 하나님
하박국 선지자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지 고민하며 항의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1:2상).
이 하소연은 우리를 당황케 합니다. ‘우리가 아예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지,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들어주신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리이까?”라는 말을 보면, 그가 상당히 오랫동안 이 문제를 놓고 부르짖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하늘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전혀 풍성하지 않을 때, 아무리 부르짖어도 변화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간절히 사모해서 오래오래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이 일부러 외면하시는 것처럼 은혜가 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원래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이어서, 지금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미래의 비전만 보이면 견뎌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 비전도 제시해 주지 않으실 때, 몇 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일 때,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때, 하박국처럼 “어느 때까지리이까?”라는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기도하기가 왜 어렵습니까?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기도 하고 서로 말을 주고받기도 하니까 대화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말도 나 혼자만 해야 하니까 계속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말을 들으시는지 안 들으시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게다가 몇 년씩 응답조차 없을 때 계속 기도할 힘이 나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 놓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큰 고통이 있을 때에는 감정을 마구 쏟아 놓게 하시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대화할 때에는 서로 눈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대화를 하는데 눈을 보고 서로 바라보지 않고 대화를 한다면 어떻겠는가? 줌으로 처음 설교를 해야했을 때 난감한 상황. 굉장히 힘든 일이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짧은 말 속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십니다. 이 땅에 있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무엇을 나타낼까요?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영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하늘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늘은 우리가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는 뇌물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사바사바’가 통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세상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하나님께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조금만 격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소란을 피워도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큰일들이 연이어 터지면 이성을 잃고 흥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마치 연못 안에 아무리 흙탕물이 일어나도 연못 밖에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까지 달려가기는 해도 함부로 입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르고 기도를 못듣는다 여깁니다. 하지만 기도 소리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신음 소리까지 듣고 계십니다. 어떤 때는 너무 답답해서 기도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휴, 어휴” 하고 끙끙 앓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 소리까지 다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침묵을 지키십니까? 그때가 어두움의 때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환난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는 기도한다고 해서 곧바로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악한 자의 손에 맡기셨을 때에는 우리의 신음 소리를 다 들으면서도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주사를 맞을때 부모들이 어떻게 합니까? 아이가 아무리 울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도 억지로 떼어서 의사의 손에 맡겨 버립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이 훈련을 받는 동안은 아무리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얼마나 힘들고 답답한지 다 알면서도 방치해 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교만하고 거역하는 기질들이 변하여 새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 훈련 시킬 때 기다리는 것을 훈련시키는 것) 그 기간 동안에는 기도를 듣기는 하시되 응답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기간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가 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으니까 자꾸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나지 않는 죄까지 쥐어짜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속에 있는 교만을 아주 조금 캐낼 수가 있습니다. 응답이 없을 때 더욱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려움은 계속되고 하나님의 응답은 오지 않을 때 우리는 자꾸 독백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면서 혼자서만 지껄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예 모를 때에는 차라리 기도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기도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거에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했던 것들 중에 나의 주관적인 확신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과연 계속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응답이 없을수록 우리는 더 기도해야 합니다. 내 머리 자꾸 굴려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별다른 응답이 없어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응답이 될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기도할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우리는 그럴 처지가 못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너무나 다른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직접 대화를 나누신다면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 음성만을 미신적으로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얻고 나서 할 일입니다. 이 땅에서는 독백처럼 느껴지더라도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가며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아주 소중하게 들으십니다. 대화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두움의 때요 환난의 때라 해도 기도의 응답만 지연될 뿐, 기도가 아주 응답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소나기 같은 응답이 쏟아질 것입니다.
하박국의 의문
앞서 말했듯이 하박국서의 특징은 선지자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내용으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이것이 하박국 혼자만의 의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딪치는 의문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라는 구절은 히브리 성경에 “강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은 예루살렘에서 악한 자가 폭력을 휘둘러 약한 자들을 강탈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어서 “강포다!”, “불법이다!”라고 외치며 누군가 나서서 도와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의로운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죄가 나쁜 줄 몰라서 죄를 짓는다고 생각했지만, 죄를 지적해 주어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강포를 행하고 불법을 행했습니다. 죄가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 죄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알면서도, 지적을 받으면서도 악을 행했습니다. 하박국은 이처럼 죄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임을 몰랐습니다. 바른 말만 해 주면 고칠 줄 알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선지자가 “강포다!”, “불법이다!”라고 외치면 무슨 변화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선지자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누구라도 그들을 구출해 주러 나서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하박국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바른 지적을 했는데도 이처럼 불법이 날뛰는 것인가?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
이것은 책상 앞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의문입니다. 고통당하는 자들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 보면 마음속에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운동권 학생들이 처음부터 운동권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전부 공부밖에 모르는 착실한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현실의 모순을 보면서 눈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사람들을 이처럼 비참하게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현장에 가 보십시오. 우리가 보기에 악한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학살당하거나 굶어 죽습니다. 엄청난 기근이나 홍수의 현장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저 운명으로 생각하고 체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체념하고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왜 선량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이들을 지켜주지 않으시는가 하는 의문이 솟구칩니다.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의문에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의문을 극복한 사람은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더 뜨겁고 통찰력 있는 신앙, 미래를 내다보는 신앙을 갖게 되지만, 이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신앙을 버리든지 속물 그리스도인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어릴 때는 다 그런 거야” 하면서 빈정거리게 됩니다.
남이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도 그렇지만 믿는 자
에게 이유 없는 고통이 닥칠 때 이 의문은 더 심각해집니다.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시며 악한 세력이 약한 자들을 비참하게 망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 일을 당한 즉시에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억장이 무너지는 불의,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일들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죄덩어리를 보여 주십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우리 속에 있는 죄덩어리에 비하면 표면적인 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사람은 이론적으로 아무리 죄를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가공할 실재를 직접 보고 겪어야 비로소 그 추악함과 난폭함에 치를 떨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치료하기 원하시지만, 사람들은 죄는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행복해지기만을 원합니다. “우리에게 너무 고통을 주지 마세요. 우리를 너무 절망시키지 마세요. 진통제만 주어서 우리 방식대로 행복하게 살게 해 주세요”라는 것이 인간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에게 너희의 모든 것을 맡겨서 죄를 치료받아야 풍성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런 가벼운 처방으로는 너희 불행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아무리 좋은 정부가 집권을 해도 우리 사회의 모순과 고통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정치적인 민주주의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세제를 개혁하거나 제도를 새로 만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세상 사람들보다 좀더 많이 차지하고 좀더 높은 자리를 확보함으로써 행복해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어려움들이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 외에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부터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자꾸 비교하면서 ‘아, 나는 참 불행하다. 예수 믿는 거 빼고 가진 게 뭐가 있나?’라고 생각하면 사회에 답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부터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이 병든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열쇠는 나에게 있다. 우리 가정, 우리 학교, 우리 직장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나에게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상 하박국 선지자는 인간의 모든 불의와 죄악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에 대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가 주시는 성령만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며, 세상의 불의와 재앙을 억제하실 수 있습니다.
법대로 하자는 논리
예루살렘에서 자행되는 불의를 보고 하박국이 항의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왜 법대로 하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1:4).
이스라엘에는 율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들을 색출해 내서 율법대로 심판하시면 사람들이 감히 죄를 짓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법대로 심판하시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율법을 우습게 여겨서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율법이 엄격하게 시행되기를 원했습니다. 간음한 사람은 몇 명이든 돌로 다 쳐 죽이고 도둑질한 사람은 전부 손을 잘라 버리면 예루살렘이 다시 거룩한 도시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이 즉각 징계하셔서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을 주시기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악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함부로 행해도 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여 더더욱 기세를 부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거기 동조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법을 엄격하게 시행하지 않아서 부정부패가 만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싱가포르처럼 강도짓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뇌물을 받은 사람들을 중형에 처한다면 감히 죄를 짓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법으로 범죄를 약간 저지하거나 그 속도를 지연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벌을 엄중하게 줄수록 죄짓는 기술도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기술을 모르는 자들만 걸려들어 벌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죄지은 사람들을 많이 처형해도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사람 자체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하박국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속을 비추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자신의 무서운 본성을 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달려가게 하시지 않는 한, 이 사회의 악은 절대 없어지지도, 약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더 엄격하게 시행하셨다면 유다 백성들은 죄를 감추는 기술만 더 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분노 가운데 죽어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참으로 영광스러워지는 때가 언제입니까? 그 가치를 알고 자발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 나타날 때입니다. 놀랍게도 율법이 존중되는 것은 유대교 안에서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행할 의지와 힘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복음 안에서 더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문제는 피상적인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가지고 “왜 1+1=2가 아닙니까?”라고 질문하는데,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피상적인 법칙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고통들은 전부 표면적인 증상으로서, 그 뿌리는 좀더 근본적인 데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자들이 죄짓는 것을 보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을 낳은 뿌리를 보아야 합니다.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증상만 논하는 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다 사회는 바벨론에 멸망을 당했으면서도 그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죄는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사회의 엄청난 불의와 모순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을 버려야 합니까? 세상과 타협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야말로 불의를 해결하는 전문가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악해도 예수님은 그 악인을 꺾는 프로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가 오셔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어려움의 현장에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하십시오.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도하면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뒤엎고 의로써 다스리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굉장히 강력한 무기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이고, 또 하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런 무기를 가진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서 ‘우리는 불행하다. 세상 사람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이중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를 슬프게 만들고 나약하게 만들었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뚫고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올라갈 수 있도록 담대한 믿음의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성령이 우리를 더 환하게 비추시고 이 땅을 더 환하게 비추셔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속에 있는 죄성을 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