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과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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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몬 1:8-16
제목 : 종과 형제
찬 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찬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오늘은 ‘종과 형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저도 잘 지냈는데, 이번 주는 저에게 특별한 주였습니다. 드디어 주일날 저희 딸아이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원래는 예정일이 2월 27일이었는데 약 한달 정도나 일찍 나왔습니다. 한 달이나 빨리 나왔지만 몸무게는 3kg정도로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게 나왔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드리고 가장 좋은 때에 하나님의 자녀를 저희 가정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처럼 각자 다른 환경과 가정에서 살아온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님의 안에서 주님의 가정을 이룹니다. 이 부부의 연합으로 하나님께서는 또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이 자녀를 통해 온전한 가정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정말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계획이나 우리의 예측을 넘어선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을 생각해보시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처럼 혈연의 가족, 가정도 놀라운 섭리가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인 것이죠. 이런 우리의 혈육의 가정도 은혜이며 신비이지만 또 다른 영적인 가족인 주님의 몸 된 교회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각 자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성도 다르고, 가족도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영혼들은 한 가족을 이루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르며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가 되지요. 이 가족은 이 땅의 가족처럼 유한하며 시간에 제한된 가족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할 진정한 가족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가 이루어지고 보여지는 곳이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인 것이죠.
오늘 계속해서 살펴볼 빌레몬서도 이 놀라운 신비를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있는 빌레몬이라는 성도에게 편지를 하게 되었죠. 빌레몬은 어떤 사람이었죠? 지난 번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골로새 교회에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성도였습니다. 그 역시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었고 거듭났었죠.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며 그분을 닮아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일원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에게 왜 편지를 했지요?
바로 오네시모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죠 그는 빌레몬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견디지 못해 재산을 얼마 훔쳐 로마로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복음을 듣고 새 사람이 되었고 바울의 복음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전하기 위하여 두기고와 함께 오네시모를 빌레몬의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합니다. 여러분 오네시모가 다시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에게 돌아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는 주인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종입니다. 즉 죄인입니다. 죄인일뿐더러 그는 종이었습니다. 원래 법대로 하면 오네시모는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사형에 처해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제 복음을 듣고 거듭난 오네시모를 위하여 이 편지를 빌레몬에게 보냅니다. 빌레몬이 따뜻하게 그를 맞이해주길 원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 빌레몬이라는 성도에게 이 편지를 전하고 있지요. 바로 이 내용이 등장하는 본론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히게 되었고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여 지금 가택 연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바울 사도는 당시 복음 사역을 위해 약 30년을 수고한 사도입니다. 그를 통해 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당시 아주 영향력 있는 사도 중 한명이 바로 바울이죠. 그에 비하면 빌레몬은요? 그는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바울의 영적 아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또는 자신이 빌레몬의 영적 아버지라는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빌레몬아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형제로 다시 맞이하라” 이렇게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8절부터 10절 말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8절에 보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에게 얼마든지 아주 담대하게 이 일을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담대함’은 “파레시아”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아무런 규제 없이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는 교회의 그리스도의 사도의 권위로, 또는 빌레몬의 영적 아버지의 권위로 숨김 없이, 확신 있게, 용기를 가지고 오네시모에 처사에 대해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명령 대신 간곡하게 빌레몬에게 호소합니다.
9절에 내가 사랑으로써 간구한다. 10절에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한다.라고 말하죠. 간구한다는게 뭐에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하고 호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간곡하게 오네시모의 일을 가지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보여주는 모습이죠. 간구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9절에 사랑으로써 간구한다. 바로 사랑에 근거하여 오네시모의 일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죠.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변화시키시고 그를 아들로 받아들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 빌레몬을 사랑하셔서 바울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구원케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빌레몬이 이전 시간이 어떤 사람이었어요? 바울이 그를 칭찬한 것과 같이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빌레몬의 사랑에 근거하여 간청합니다. 또 이 본문을 통해 또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목회자로서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하는 대상은 오네시모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빌레몬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권위에 호소하여 명령이 아닌 사랑으로서 그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들여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바로 사랑입니다. 한번 따라해보겠습니다. 명령이 아닌 사랑으로 간청합시다. 사도 바울은 권위의 명령이 아닌 사랑으로 간청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 강요 때문에, 권위 때문에 마지못해 오네시모를 받아주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빌레몬이 바울의 권위 때문에 억지로 그를 받아들이는 것과 심정이 동해 자발적으로 용서하는 사랑의 드라마가 되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이 모습을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참 말이라는 것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소리를 많이 합니다. 똑같은 내용의 말을 해도 어떤 사람이 말하느냐,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말하느냐는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권위를 앞세워 명령하고 싶어합니다. 상대를 설득하고 간청하기 보다는 명령 통해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고 일을 쉽게 해결하고 싶어하죠. 물론 세상에서는 이 명령이 어떤 일을 완수 하는데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빌레몬보고 사도의 권위를 사용해 “빌레몬아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들여라!” 하면 일처리는 쉽게 되겠지요. 하지만 바울은 결코 그 일을 그런식으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14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입니다. 빌레몬이 자발적으로 정말로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형제로 받아들이냐. 아니면 그가 바울의 권위 때문에 그렇게 하는 척 하느냐. 이 결과는 결국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한 영적인 가족 공동체가 되느냐 안되느냐로 반드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상황도 사실 이와 똑같습니다. 권위를 앞세워 결과만 완수하는 것이 결코 일을 잘 해결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공부해!”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잖아요. 그러면 공부합니까? 공부하는 척하죠. 사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요.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가지고 권위로 명령하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간청하며 그들을 설득하고 자원하여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이런 방법들은 과정이 굉장히 힘듭니다. 그럼에도 느리더라도 그것을 강제로 하게 하는 것과 자원하게 하는 것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물론 이 차이를 가져오는 시간은 너무나 인내하기 힘들고 더디고 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결과 때문에 이렇게 하기 이전에 정말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빌레몬이 정말로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따뜻한 형제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따라해보겠습니다. 사랑은 엄청난 역사를 일으킵니다. 15-16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몬 1:15, 개정)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몬 1:16, 개정)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떠난 것은 결국은 그가 영원히 두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둔다는 것은 ‘돌려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도망하게 된 것은 그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아픔과 잘못된 일까지도 하나님께서 섭리하게 하셔서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게 하시고 그를 만나 복음을 듣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돌아가 영원히 그와 함께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히 돌려받는다는 것은 이제 그는 자신의 종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한 형제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16절에는 이제 돌아간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단순한 노예 한명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빌레몬과 형제가 되었습니다. 노예와 주인이 형제가 된다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이 노예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당시 이 상황이 현실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 노예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내용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스 윤리’라는 문헌에서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잘들어보세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공통점이 없는 곳에는 우정도 없다” 예를 들면 장인과 연장 사이에, 영혼과 몸 사이에, 주인과 노예 사이에는 전자가 후자를 사용해 유익을 얻을 뿐이다. 생명 없는 사물을 향해 우정이나 정의를 논할 수 없다.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노예는 살아 있는 연장이고 연장은 생명이 없는 노예다“ 이 부분에서는 노예가 어떤 존재입니까? 그는 생명이 없는 장인에게 연장과 같은 사용해서 유익을 얻는 도구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물건입니다.
노예들은 당시에 심각한 잘못이 없어도 잔인한 학대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노예가 머리를 손질해 주었는데 그것이 맘에 들지 않으니깐 그 여자 아이 노예를 매로 심히 때렸다. 남편에 대한 분풀이로 노예를 때리는 여인들도 흔했다. 심하게는 노예의 혀를 자르고 십자가에 매어 달은 남자도 있었다. 노예가 있었던 문헌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처럼 오네시모는 당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노예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를 사람으로 대해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에게 복음을 전했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빌레몬이 가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를 맞이하여 주인과 종이 형제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네시모는 육신 안에서는 여전히 빌레몬의 종이지만, 주님 안에서는 빌레몬의 형제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바울을 통해 영적으로 거듭난 한 형제 였으며,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복음과 교회를 위해 서로 동역하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 모든 놀라운 역사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했던 것이죠. 이 하나님의 사랑은 당시에는 일어날 수 없었던 종과 주인이 형제가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가족이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신분과 인종과 지위에 상관없이 모두 형제자매가 됩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사실 여러분 우리는 때로는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을 차별하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을에 사시면서 저 사람은 예수 믿을 수 없어. 예를 들어 맨날 술, 담배 하고 민폐 끼치고 하는 이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 9:12, 개정)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당시 죄인이며 사람 취급 받지 못했던 오네시모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그냥 되지 않습니다. 당시 대학자이며 교회의 사도였던 바울이 그 한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품고 인내하며 오네시모가 거듭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폐를 끼치고 도망했던 빌레몬의 사랑이 있지 않았으면 그는 골로새 교회의 한 공동체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교회 전승에 따르면 이 오네시모는 이후 에베소 교회에 감독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마치 한국교회 역사에 있었던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에 조덕삼 장로 이자익 목사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밖에서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는지,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 아무런 상관없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여러분들이 다 그렇게 예수 믿게 되었잖아요. 그러므로 우리 모든 정산교회 성도님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더욱 더 사랑하시고 이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랑의 공동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