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와 메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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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을 떠나 시내 산으로 가는 여정 중에서 신 광야 라는 장소에 이르렀을 때에 발생한 사건이다. 이곳에서 이스라엘은 한 번 더 하나님을 원망하였으니 바로 음식의 문제 때문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친히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실 것을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
출16:3 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불만을 보라. 과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정말로 이 모든 것들을 누렸는가? 애굽 왕 바로에 의해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아이들이 죽고, 온갖 착취와 억압 속에서 과연 그들이 이러한 것들을 누리며 살았을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말에 숨겨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이 말의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풍성하게 베푸실 의무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애굽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신론은 신과 인간이 서로 공생관계였다. 인간이 신에게 조공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고 그들을 섬기고, 신들은 인간의 제사와 조공을 받고 이젠 그들을 지켜주고 돌봐주며 소원하는 것들을 들어준다. 신과 사람의 관계는 give and take였다. 그리스신화나 로마신화를 보아도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는데, 그곳에 등장하는 신들은 힘이 강하고 능력과 지혜가 있으나 결국 사람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신이 힘을 잃어버린다. 사람들이 경배하지 않으면 바짝 말라버린다. 결국 사람들이 신들을 섬기는 것 같으나 실상은 신들이 사람들을 섬기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지난 400년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애굽의 잘못된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이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나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나왔습니다. 이제 내가 할 도리를 다 했으니 이제 하나님도 나에게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해 주셔야 하는거 아닙니까?' 간혹 교회 안에서도 이런 잘못된 신앙, 주객이 전도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더러 보게 된다. 내가 시간 내서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드리고, 시간도 드렸으니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셔야만 하는 분이시다. 그들의 신앙의 기준은 오로지 복과 형통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나에게 복과 형통을 주시지 않는다면 더 나은 신을 찾아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말하는 바가 이와 동일하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본래 우리는 어떤 존재였던가? 우리는 이런 주장을 할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내지 않으셨어도 된다. 홍해에서 애굽 군사들에게 죽게 내버려두셨어도 된다. 비록 그렇게 하시면 향후 얼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냥 죽이셨다고 소문은 돌수 있을지 몰라도 수백 수천년의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진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들을 멸하셨어도 그분의 공의가 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셨던 그 언약을 기억하셨고, 그것을 이루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우리도 마찬가지아닌가? 구원받을만한 그 어떤 자격도 조건도 없던 우리였음에도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찾아오셨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 올바르고 합당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시니 그 첫번째 코스가 만나와 메추라기였다.
우리가 만나와 메추라기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는 점이다. 마6:32 에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말씀하시고, 또한 마7:11 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다 알고 계시다는 점이다. 이를 토대로 생각할 때 만나와 메추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 이르러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쏟아놓고 하나님을 또 한번 원망하니까 그제서야 마련하신 해결책이 아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갑자기 준비하신 양식이 아니다. 모든 것들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나와 메추라기를 이스라엘을 연단하고 훈련시키는 과정 가운데 미리 정해두셨다. 이미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계획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는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로 부패함이, 우리의 완악함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주 되심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죄인의 본성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거부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을 주도하려 하는 것인만큼, 예수 믿어 구원받은 신자라 하더라도 신앙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따라와주길 바라고, 하나님께서 내 소원대로 움직여주시기만을 원하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복 주시는 존재로만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참 어린 신앙이요, 못된 신앙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들의 모든 터전들을 버리고 그 말씀을 좇아 행하면 하나님도 자신들에게 뭔가 해주실 것을 기대했다. 아니 그렇게 해 주시는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내가 이만치 했으면 당신도 떡과 고기를 넉넉히 주셔야 하는거 아니요?' 그들에게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셔야만 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나를 섬기셔야만 하는 분이다. 신앙의 주도권을 여전히 내가 쥐고 있는 모습들이다. 이들의 신앙 기준은 복과 형통이다. 하나님도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 주셔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항상 복을 받고 형통의 길을 걷는다 하지 않는다. 신명기 말씀에도 복과 저주가 동시에 놓여있다고 말씀한다. 마찬가지로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강복선언 역시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선언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다. 선포된 말씀대로 순종할 시에는 이러한 복을 주실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심판과 저주가 임할 것을 선언하는 것이 강복선언이다. 복과 저주가 동시에 있다. 우리가 찬송도 같이 했지만, 예수가 함께 계시면 시험이 안 온다 말하지 않는다.
예수 믿으면 출세한다, 예수 믿으면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한다, 예수 믿으면 돈 잘 번다, 예수 믿으면 승진한다, 티코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 믿어 그렌져 타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전부 가짜복음이다. 그들은 사기꾼이다. 하나님께 투자하면 1000%의 수익금을 얻더라 전부 가짜복음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무늬를 띄고 있지만 가짜이다. 참된 교회도 아니요 참된 복음도 아니다. 여기에 현혹되지 말라.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원하여 교회로 들어왔다면 잘못 찾아오셨다. 만약 여러분들이 현세의 복을 누리기 위해 예수를 찾아온 것이라면 잘못 오셨다. 물론 성경은 현세에 복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나, 예수믿으면 반드시 형통하고 현세의 복을 받는다고는 말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성경은 훨씬 더 많은 비중에서 예수 바르게 믿으면 시험이 온다 말한다. 예수 믿으면 박해가 찾아온다고 말한다. 우리는 힘써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고, 그 이후로도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야 함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성도들에게 형통과 복의 길을 열어주실 때도 물론 있겠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힘들고 어려운 길도 마주하게 하시고, 난관과 시험의 순간들을 허락하신다. 신앙의 기준이 복과 형통에 있는 자들은 시험이 오면 떨어져나간다. 다른 신을 섬기려 떠난다. 그러나 신앙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참 신자들은 신앙의 기준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복과 형통의 길을 만나도 감사하고, 어렵고 힘겨운 길을 만나도 감사할 수 있다. 잔잔한 물가를 만나도 감사하고, 험한 풍파를 만나도 감사할 수 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라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현세에서 복과 형통만이 약속되었다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신앙의 주도권을 여전히 자신들이 가지고 있고, 그들의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을 자신들의 복과 형통에 두었더라면, 풀무불 심판 앞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섬기기로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신앙의 주도권을 맡겨드렸다. 신앙의 절대적 기준을 자신들의 현세의 복과 형통에 두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에 두었고, 영원한 것들을 붙좇았다. '우리 하나님께서 풀무불에서와 왕의 손에서부터 우리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정리한다. 하나님을 따를 때에 현세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위로와 평안과 복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막상 살아가다보면 환란과 궁핍이 더 많다. 고통과 괴로움이 훨씬 더 많다. 아프고 힘겨운 상황들이 더 많다. 신앙의 기준을 현세의 복과 형통에 둔 자들은 여기서 떨어져 나갈 수 밖에 없다. 신앙의 주도권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자들은 여기서 실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맡긴 자들, 하나님께 내어드린 자들,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는 자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의 수준으로 자라간다. 지금 이 땅의 것들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섬겨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떼 쓰는 초보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그분을 섬길 수 있는 우리가 되자. 하나님께서 현세에서 복을 주셔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당장의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고, 하나님 한분으로 기뻐하는 신앙의 경지에 이르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