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비딤과 그리스도

출애굽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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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출17장의 말씀은 이제 신광야를 떠나 르비딤이라는 지역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에게 두 종류의 위협이 찾아온다. 1-7절까지는 내적 위협이 찾아오고, 8-16절에는 외적 위협이 찾아온다. 오늘 함께 봉독한 출17:1-7 은 내적인 위협에 관한 내용인데, 도대체 어떤 위협이 그들 가운데 임하였는가? 그리고 본문의 말씀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또한 무엇인가?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말씀하셨다. 즉 광야생활은 이스라엘의 훈련코스였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훈련과정에서 실패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은 르비딤에 장막을 쳤다. 그런데 또 마실 물이 문제가 되었다. 불과 얼마 전 쓰디 쓴 마라의 물을 단 물로 바꿔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모세와 하나님과 다투기 시작한다.
한글번역이 참 아쉬운데, ‘다투다’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리브(רִיב)’는 재판과 관계된 용어로서 법정에 소송하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물을 내지 않으셨다’ 해서 자신들의 재판소에 하나님을 피고로 소환한 것이다. 그들은 지난 시나이 광야에서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려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섬기게 만들려고 그분을 시험한다. 이러한 사실은 르비딤의 두 가지 이름인 ‘맛사’와 ‘므리바’에서 알 수 있는데, ‘맛사’ 라는 의미는 ‘시험의 장소’라는 의미로 2절과 7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여호와의 임재를 시험했다는 것이다. 또한 ‘므리바’ 는 다툼의 장소라는 의미로서 민사소송에 이르기 전의 불화나 갈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오늘 본문은 일종의 종교재판이 열린 것으로 생각하시면 된다.
생각해보면 정말 괘씸하지 않은가? 평생 애굽에서 온갖 고역으로 괴로워하던 그들이었다. 산아제한정책으로 남자아이가 태어나거든 나일강에 던져 죽여서 이스라엘의 씨가 말라버릴 위험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이 진멸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출애굽 시키셨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추격해오던 애굽병사들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바다를 갈라 마른 땅을 건너게도 하셨다. 도저히 마시지 못하던 쓴 물을 단 물로 바꿔 주시고, 엘림에서 충분한 쉼을 누리게도 하셨으며, 이제는 만나와 메추라기까지 내려서 아침저녁으로 배부르게 하셨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하나님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온갖 이적을 경험하고도 계속해서 불신하고 완악한 상태로 남아있는 이스라엘은 과거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했던 바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아니 오히려 바로가 더 나아보일 정도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애굽을 벌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뭔가 더 특출하고, 더 사랑받을만 하고, 더 하나님께 득이 될만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결코 아님을 볼 수 있다. 바로와 비교해서 하나도 나은 점이 없는 그들임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일방적이고 조건 없는 결정에 의한 것이지, 그들이 결코 받을만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구원을 진행해가고 계시다.
그런 와중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훈련과정에서 또 한번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완악한 죄인들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대변해주는 것 같다. 2절과 7절에 그들은 모세와 다투었는데, 그것은 여호와를 시험한 것이다. 그 시험의 내용은 7절 하반절에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말씀하는데,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이렇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는가? 아마 계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고 결론내렸다. 왜냐? 물을 안주시기 때문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이와 같은 태도를 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훈련과정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태도로 나오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해? 그럼 우리도 하나님을 시험할 권리가 있지’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도전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참 신이라면 우리에게 물을 내놓아라! 우리를 계속해서 목마르게 내버려둔다면 당신도 가짜 신일 뿐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행할 의무를 다 했는데,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소를 제기했다. 이스라엘은 원고로, 그리고 하나님을 피고로 세운 종교재판이 시작되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6절에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말씀하신다. 완악한 죄인들이 소환한 자리에 지극히 영광중에 계신 분께서 친히 내려오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토록 큰 은혜를 베푸신 이스라엘을 꾸짖거나 책망하실만도 한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행하시는가? 출17:6 을 함께 읽어보자.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들고 있는 그 지팡이로 하나님이 그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그 반석 위에는 누가 서 계시는가? 하나님이시다. 모세가 그 반석을 치는 행위는 그 피고의 자리에 서 계신 하나님을 치는 것과 같다. 죄라고는 이스라엘에게 은혜베푸신 것 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재판에 끌려나오셨고, 그들의 원대로 심판을 당하신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물이 흘러나오고 그 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신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에서 복음의 그림자들을 발견하게 되며, 신약으로 가면 더욱 분명하게 복음의 요소들을 보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다. 비록 본문의 말씀이 분명하게 복음을 드러내진 않으나 오늘 본문의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든다. 극악한 죄인들을 위하여, 그들 대신 처형당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렇게 처형당하신 후로 많은 사람들이 목마름으로부터 해결되는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비춰준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이 연 종교재판에 소환되셨다. 무한하신 분께서 죄인들이 집행하는 재판의 자리에 끌려오시고, 그곳에서 온갖 수치와 수모를 당하신다. 그분의 잘못이라곤 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이 낮고 천한 땅에 육신을 입고 내려오신 것 밖에 없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 밖에 없다. 오히려 이 재판에서 심문을 당하고 처형을 당해야 할 자들은 우리였으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죄를 자신에게 옮기시고 친히 십자가를 짊어지시사 골고다 언덕을 향하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의 원대로 처형을 당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죽어 마땅한 우리 대신 주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물과 피를 다 쏟아내셨고, 그 흘려진 피는 모든 택함받은 자들의 죄값을 치루기에 충분했다.
성도 여러분,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묵상하시길 바란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이 완악한 죄인들이었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려 했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악랄한 죄인들이었다. 참담한 죄악들을 저질렀던 자들이 바로 우리였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어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그 아들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성부께서는 그 아들의 피를 많은 택함 받은 자들의 대속물로 받아 주셨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이를 통하여 도무지 자격이라곤 전혀 없던 철천지 원수와도 같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가 하나님께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여야 마땅할까? 고귀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 삼아주심에 그저 감사하는 삶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해가 되지 않고, 때로는 잠시 잠깐의 어려운 일들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우리를 어둠 가운데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움을 신뢰하며 묵묵히 인내하는 삶이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타나 도우심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실 그 날을 고대하며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받는 주의 신부로서 삶을 살아내는 것 아니겠는가? 바라옵기는 이 새벽에 시간에,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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