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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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의 경험이후 / 마17장 1-7절 / 2020년 9월 27일 주일예배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하겠습니다. <나는 하늘아래 하나밖에 없는 보석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벽한 작품입니다.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계획된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보다도 인간을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존귀한 존재로 당당하게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들어가는 글) 우리 집사님 중에 한분이 20년 전에 좋아했던 찬양이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좋아서 그 곳을 부른 목사님을 찾아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유튜브에 찬양이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렇게 대중적으로 부른 찬양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집사님이 가장 힘들고 어렵고 살 소망이 없을 때 찬양이 힘이 되고 위로되고 소망이 된 것입니다. 몇 20년이 흘렀는데도 그 감격이 있고 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이런 은혜와 감동과 성령충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갖는데 있어서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지적인 요소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2. 감정적인 요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깨달아집니다. 기쁨이 있거나 눈물이 있거나 감동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몸의 진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삶의 희망이 생기고 비젼이 생깁니다. 물론 감정적인 요소는 사람마다 다르죠.
3. 의지적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젠 세상의 질서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질서 따라 살아가기로 결단합니다. 나는 평생 예배하며 살겠습니다. 의지적 결단이 없으면 교회를 방학하죠. 교회를 학원처럼 생각하죠.
3가지가 다 있을 때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정적인 요소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말씀, 찬양, 기도를 통해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기도 중에 환상을 보기도 합니다. 기도 중에 주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들이 우리의 신앙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이 산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높은 산이라고 말합니다. 일부학자들이 다볼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화면을 볼까요? 갈리리 바다 남쪽에 다볼산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3명의 제자만 데리고 갔을까요?
3명의 제자에게 특별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초기 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제자입니다.
-야고보는 첫 번째 순교를 당한 제자입니다.
-요한은 가장 오래 살면서 복음을 전하고 마지막 요한계시록을 쓴 제자입니다.
세 명의 제자들에게 더 큰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산으로 데려간 것 같습니다.
(예화) 어떤 분은 본인이 천국을 봤다고 합니다. 자랑할 내용이 아니라 나의 사명이 크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본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천국을 본 자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분은 본인이 돈이 많다고 자랑합니다. 돈이 많은 것은 자랑할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 돈으로 얼마나 많은 유익을 끼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시고 신비한 환상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에 올라갔는데 예수님이 변형되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면서 순식간에 변화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뭐가 변했습니까?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즉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옷에도 광채가 났습니다. 추측하면 예수님의 온몸에서 광채가 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변형은 외형적인 변화뿐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떨기나무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모세는 너무 두려워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천상의 기쁨을 경험합니다.
왜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을까요? 제자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젠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젠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소망이 있을 때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었다면 현재의 어려움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장 17절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크고 엄청난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을 비교하면 미래의 영광이 휠씬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예화)예를들어 내가 최고 아파트를 분양받았습니다. 아파트를 분양 받으면 보통 2-3년 후에 입주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내가 단칸방에 살아도 행복하죠. 왜요? 이사갈 것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천국의 소망이 있으십니까? 천국의 소망이 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다이아몬드를 가진 사람은 조약돌을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세상 것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벗하고 살지만 동시에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한번 화면으로 볼까요? 저런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죠. 물론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대략 1300년 전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대략 800년 전 인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과 만나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메시야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예언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메시야 오심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 있다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즉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 즉 구원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영광스러운 그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코로나19바이러스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 이후에 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러 갑니다. 제자들이 집안에 있을 때 문이 분명히 닫혀있는데 예수님은 통과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처럼 성도에게도 부활의 날이 있습니다.
고전15장 42절 말씀을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부활한 몸은 어떤 몸일까요? 썩지 않는 몸이 됩니다. 고린도전서15장에 보면 그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고, 강한 몸이고, 신령한 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전15장 51절 새번역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할 터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의 몸이 순식간에 즉 눈 깜박할 사이에 변화가 됩니다. 어떤 몸으로 변화가 일어납니까?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변화가 됩니다. 부활체로 변화가 됩니다.
이세상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화) 우리가 코로나19바이러스를 무서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빠른 전염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근본적인 이유는 불확성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치료제도 없고 백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앞날이 두려웠습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한 번도 걷지 않는 길을 걸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이 있기 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처음으로 죽음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6장 21-22절 말씀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는 최고의 책망을 듣습니다.
이런 제자에게 예수님은 소망을 주고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체험은 제자들에게 담대함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무 행복하고 황홀했습니다. 그냥 변화산에서 머물고 싶었습니다. 아니 베드로는 초막을 셋을 짓자고 말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초막 셋을 짓자고 합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설명) 베드로는 계속 머물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신비스러운 환상속에 있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려가길 원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속으로 내려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생 공부만 하면 되겠습니까? 공부했으면 써 먹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비체험만을 쫓아 이곳저곳 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제 내려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마태복음10장 16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합니다. 양하고 이리하고 싸움이 됩니까? 그러니까 매일 속고 살고 터지고 살죠.
그런데 예수님은 보낸다고 합니다. 이리와 늑대가 우굴 거리지만 너희는 가라~ 내가 도와주겠다. 너희는 가라~ 내가 함께해주겠다. 너희는 가라~ 내가 피할 길을 주겠다. 너희는 가라 내가 지혜를 주겠다.
(예화) 아들을 키우신 부모들은 자식을 군대 보낼 때 마음이 편하지 않죠? 걱정되기하고 염려가 되기 합니다. 걱정된다고 군대를 안보내시는 부모는 없습니다. 어떤 부모는 너무 걱정이 돼서 연무대훈련소 근처에 집을 얻어 산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들이나 딸을 결혼시킬 때 마음이 어떻습니까?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저것들이 잘 살까라는 걱정도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실 속에 화초가 아니라 광야 속에 화초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총알 빗발치는 이 세상 속에 우리가 살아남길 원하고 있습니다.
변화산에만 있으면 안 됩니다. 내려와야 합니다.
(예화) 최근에 탈북민이 다시 월북을 했다는 뉴스를 종종 봅니다. 북한에서 한국으로 오려면 목숨 걸고 와야 합니다. 탈북 하다가 죽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목숨 걸고 한국에 왔으면 잘 살 것 같은데 왜 다시 북한으로 넘어갈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전문가들은 대표적으로 3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남한 생활 부적응, 극심한 가난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난은 아주 큰 스트레스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탈북민들은 자유를 찾아 우리나라로 왔지만 생활하고 돈을 버는게 녹녹치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대다수는 잘 적응하고 살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월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국에서 사는게 쉽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디 탈북민만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는 고단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삶은 많이 윤택해졌다고 하지만 실제 삶은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은 잘 사는데 나만 힘들게 산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예화) 예배가 끝나면 죄가 뒤에서 악수하면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악수를 하지 않습니다. 악수를 하면 우리 연세드신 권사님이 제 손을 만지면서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님~ 손은 여자 손이라고~’ 제 손이 예뻐서 여자 손 이라는게 아닙니다. 험한 일을 하지 않아서 손이 평범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르신들보면 손에 인생이 쓰여져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하시면 손가락 굵어집니다. 어떤 분은 지문도 지워져서 서류를 뗄데 애를 먹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손에 영광의 상처들이 있죠. 칼에 베이기도 하고 다쳐서 남은 흉터들이 있습니다.
(예화) 우리가 힘든 인생을 살다보면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그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 이단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때 신비주의에 빠질 수 있고 종말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종교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종교 천재들이 있습니다. 이단들로 그런 심리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항상~ 말씀중심, 교회중심, 예배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에는 신비가 있습니다. 신비가 없다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신비는 우리의 신앙을 더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신비주의자는 자기가 경험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내가 뭘 봤어~ 내가 뭘 경험했어’
신비주의자는 계속 신비현상만 강조를 합니다. 나는 기도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나는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말씀해주셔’이러면 신비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예화) 나는 자연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죠. 저도 몇 번 보았습니다. 현실세계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깊은 산중에 혼자 살아가는 모습을 찍은 프로그램입니다. 왜 혼자 산속에서 살까요? 3가지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1. 병을 치료하는 목적 2.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3. 사회생활에 적응이 안되서~
어떤 사람은 공감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공감이 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히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산속에 간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원하시는 것은 어렵지만 현실에서 승리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수도원에 가서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부도 지지고 볶고 싸워도 같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맞아서 우리가 교회 출석합니까? 하나님은 부족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길 원하십니다.
하늘의 음성도 들립니다. 5절 말씀입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들린 음성과 같습니다. 공생애를 처음 시작할 때 이 말씀이 나오고 지금 십자가를 지시기전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같은 말씀이 또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내 기뻐하는 자’- 왜 기뻐하는 자일까요? 십자가로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했고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8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즉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졌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위대한 인물이지만 주인공은 아닙니다. 주인공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오직 예수 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사도행전4장 12절 말씀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결국 누구만 남았습니까? ‘오직 예수 외에 보이지 아니하더라’
제자들은 기적, 영광, 환상을 경험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환상을 붙잡지 말고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환경바라보지 말고 예수님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보지 말고 예수님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바라보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화) 우리가 예배하고 집에 가면 무엇이 남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오직 은혜~
그런데 집에 가서 목사님 헤어스탈일이 바뀐 것은 같은데....마음에 안 들어~ 이러면 안됩니다. 목사가 남으면 안 됩니다. 웬수 같은 인간이 남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남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변화산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예배 때마다 주의 영광과 임재를 경험하시길 축복합니다.
하지만 변화산이 좋아도 내려와야 합니다.
이 땅은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흑암이 세력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쫄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변화산의 동반자는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젠 우리가 예수님의 동반자가 됩니다.
그때까지 예수님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서 이 땅에 사명자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겟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요 산전수전 공준전까지 다 경험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안 해 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드셨어요. 아마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마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우리의 희생과 수고가 때론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나?
내 인생이 바보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나?
아닙니다. 하나님앞에 실패한 인생은 없습니다.
전쟁에 나간 군인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 말할 수 없는 영광의 기쁨이 있죠.
우리의 코 끝에 호흡이 멈출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아요. 잘 견뎠다~ 잘 참았다. 애썼다~ 내가 너를 잘 안다~
*하나님~ 우리의 인생은 버거운 인생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고달픈 인생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영상시청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