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실수

마태복음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243 views
Notes
Transcript

실패

금메달 후 실격 (마16:13-24) / 2018218주일설교
*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하겠습니다. 나는 하늘아래 하나밖에 없는 보석과 같은 존재입니다.
10만원주고 물건을 사면 10만원짜리입니다. 100만원 주고 물건을 사면 100만원짜리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핏값을 지불하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짜리입니다. 우리는 꽁짜로 구원받았지만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음의 댓가를 치루셨습니다. 그 만큼 값비싼 존재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무시한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예수님짜리로 당당하게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영상시청> -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첫 번째 금메달을 딴 임효진선수에 관한 영상입니다. 요즘 온 국민이 평창동계올림픽에 뜨거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임효진선수가 첫 번째 금메달을 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진을 볼까요?(사진첨부) 임효진선수는 시상식에서 오른손 검지를 위로 들어 올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린다는 자신만의 표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강릉선수촌 종교센테에서 주일예배에 참석해 “대한민국 첫 금메달을 부족한 제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간증했습니다.
이번 동계올림픽을 보면서 모든 선수들이 메달과 상관없이 서로 즐기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메달을 따지 못해도 서로를 축복해주는 모습 속에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지난 2월 14일 여자 500쇼트트랙에서 최민정은 선수가 은메달을 획득했는데 아쉽게 실격을 당했습니다. 한국은 여자500m 소트트랙에서 한번도 매달을 딴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좋아했는데 갑자기 실격을 당했습니다.
안상미 MBC 해설위원은 “심판 판정이 억울하다”고 울음을 터트렸다. 최민정선수는 은메달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실격이라고 했을 때 얼마나 상실감일 껏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도 최민정선수는 어제 1500미터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베드로는 금메달보다 더 좋은 예수님의 축복의 말을 듣습니다.
마태복음16장 1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지금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축복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입니다. 바로 베드로밖에 없습니다.
-듣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곧 바로 베드로는 엄청난 책망을 듣습니다. 23절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아주 심한 말을 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가 아무리 잘못을 했을지라도 어떻게 예수님은 그렇게 심각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니 심각한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복이 있다고 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탄이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그러면 먼저 베드로가 칭찬을 받은 이유를 볼까요?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13-1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이르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참된 고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백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침례요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속에서 침례요한의 메시지를 동일하게 느꼈습니다.
두 번째 엘리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옛날 갈멜산 꼭대기에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햇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몸에 상처를 내면 소리 치르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기를 기도했지만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재단을 태웠습니다.
또 삼년반 동안 이스라엘 가뭄이 닥쳐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을 때 엘리야는 갈렐 산 꼭대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삼년 동안 오지 않던 비가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 속에서 이런 엘리야를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예레미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예레미야의 탄식과 눈물, 민족을 향한 애정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랴 하느냐? 15절 말씀을 볼까요?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 – 개인적인 명칭
그리스도 – 공적 직위적인 명치 = 기름 부음받은 자 = 메시야(히브리어) = 구원자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최고의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의 전부이고 나의 주인이고 나의 생명, 나의 구원이라는 고백입니다.
로마서10:9-10절 말씀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참된 신앙은 바로 믿음의 고백에서 나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구원자이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고백위에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1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바요나에서 “바”라는 단어는 아들이란 뜻입니다. 즉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베드로에게 한 축복은 단순한 칭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축복은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은총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굉장히 듣고 싶어 합니다. 사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욕구를 분석해 보면 복을 받고 싶어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축복받고 싶고, 건강하고 싶고, 잘살고 싶은 것이 모든 인간의 욕구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복되다’고 하신 것은 베드로 자체가 복되다는 말이기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영적상태가 복되다는 뜻입니다.
최고의 축복을 받았던 베드로가 인간적인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조금 있으면 내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3일만에 부활하게 될 것이다”
이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21-22절 말씀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쉽게 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고~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복되다’는 칭찬을 들은 바로 몇 분후 ‘사탄’이라는 징계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충만하게 되었을 때 축복이 임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떠나면 축복도 떠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약자라고 표현되는 병든자, 귀신들린자, 창녀, 세리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아 왔던 이 사역들이 예수님 사역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 사역의 본질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 할때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선한 일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목적은 우리를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궁극적인 사역을 막고 있습니다.
22절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위대한 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정반대로 불신앙적인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조금 전만해도 가장 큰 칭찬을 받은 베드로가 지금은 최악의 꾸중을 듣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화>신앙생활하면서 문제와 상처가 되는 것은 대부분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실망하는 경우가 많을까요? 사람에게 실망하는 경우가 많을까요? 대부분 사람 때문에 실망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예수님처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따라하겠습니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이 사람을 의심하고 불신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완벽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기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람은 우리가 사랑해줘야 할 존재입니다. 결코 사람이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불완전하고 약하기 때문에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마태복음22장 39절 말씀을 볼까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항상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믿으라”라고는 한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었던 제자들에게까지 배신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신한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기다렸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의 실수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도 정말 사람이구나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어” (같이 읽겠습니다)
"너도 정말 사람이구나.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어~. 네가 사람이니까, 내가 이해한다. 그리고 용서한다. 네가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
최고의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최악의 꾸중을 듣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마귀는 결코 성령의 역사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직접 공격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직접 공격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하늘에서 쫓겨나서 믿음의 사람을 공격합니다. 마귀의 전략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설명> 예수님의 제자중 한명이 가룟유다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버렸습니다. 마귀는 베드로도 공격을 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공격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양의 가죽을 쓰고 나타납니다. 마귀는 뿔 달고 오지 않습니다. ‘나는 마귀다’하면서는 오는 마귀는 하나도 없습니다. 가장 교활하게 천사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넘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23절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인간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인간적은 생각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 혁명적인 메시야로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살리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살리는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까? 죽이는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까?
<설명> 여러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십시오. 성경을 연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예수님한테 야단을 맞습니까? 사람을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인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통해서 사람을 들을 통제하고 비난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돈도 많습니다. 얼굴도 잘 생겼습니다. 성경도 많이 압니다. 그런데 고춧가루를 뿌립니다. 비수와 같은 말을 해서 상처를 줍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장사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물건 하나 팔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더럽고 치사해도 그 사람의 비유를 마칩니다. 손님이 갑질을 해도~ 꾹 참습니다. 그래야 물건을 팔고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은 살리는 것이고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위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주장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내가 욕을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살리는 사람입니다.
요즘 수요일마다 레위기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번제에 관해서 말씀을 보았습니다. 번제로 드리는 짐승은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소의 번제입니다.
두 번째 양과 염소의 번제입니다.
세 번째 새의 번제입니다.
소의 번제는 각을 뜨고 가죽까지 벗겨서 화제로 드립니다. 가죽을 벗겼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욕을 먹더라도 희생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억울함을 감내하며 나의 명예와 체면이라도 주님을 위해서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양의 번제는 각을 뜨고 화제로 드립니다. 양이나 염소는 가죽을 벗기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자기의, 자기영광, 자기 자랑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새의 번제는 목을 비뜰고 날깨를 찢어서 드립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참된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부인이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나는 없다~ 나는 죽고 내안에 예수님이 사는 사람입니다. 참된 제자의 길은 물질이나 명예나 성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문제가 되는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걸림돌은 나입니다. (따라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맨날 환경만 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우자를 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일 무서운 싸움의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못 이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부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베드로가 사탄이란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충동질하고 속이고 파괴하는 사탄의 세력을 보시고 꾸짖으셨습니다.
<예화> 가끔 귀신들렸다고 사람을 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신들렸다고 사람이 귀신이 아닙니다.
사탄은 언제나 예수님을 앞지르려고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일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쉽게 하도록 유혹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피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교회로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넘어지고 쉽고 사탄에게 당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예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가 중국의 만리장성입니다. 만리장성의 길이가 약4천킬로미터가 된다고 합니다. 4천길로미터가 얼마나 긴 걸이냐면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약400km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에 10배입니다. 어마어마하죠~
만리장성의 높이가 6-9m라고 합니다. 평지에 성을 쌓은 것도 아닙니다. 설악산 같은 곳에 6-9m정도 쌓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대단하죠.
넓이는 3-5m정도라고 합니다. 마차가 두 대 지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견곤한 성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북방 유목민족의 침투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리장성의 오래가지 않았다. 왜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요? 부실공사가 아닙니다. 성을 잘 못 쌓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을 지키는 군인 가운데 구멍이 생긴 것입니다. 한곳만 매수를 하니까 그 쪽으로 군인들이 다 들어와 무너뜨렸습니다.
북방민족이 손님처럼 들어와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결국 만리장성은 칼에 찔려 쓰러진 것이 아니라 사탕에 녹은 것이다.
그렇게 돈이 많은 재벌도 무너집니다. 그렇게 권력이 높은 권력자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반석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우진 않으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넘어짐은 완전한 넘어짐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명을 감당합니다.
우리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실격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깨어 승리하며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최고의 축복을 들었던 베드로가 한순간에 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깨어있게 하여주시고 하나님의 일 즉 살리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특별히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길 원합니다. 한몸 연합의 비밀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영혼들을 이용가치로 대하지 않고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여기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힘을 승리할 수 없으니 날마다 말씀으로 공급받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게 하여주시옵소서.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