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펜트하우스 가입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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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긍휼의 눈을 가지고, 자신을 낮추며, 사심없이 남을 대접하는 자이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긍휼의 눈을 가지고, 자신을 낮추며, 사심없이 남을 대접하는 자이다
[서론]
최근에 시즌1이 종영된 펜트하우스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곳에 보면 상류층만 사는 세상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들의 기준에 적합하지 못하면 그 곳에 절대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경계에 넘어오려는 사람들을 도저히 참지 못합니다.
그들 사이에도 계급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곳을 펜트하우스라고 부르는데 그곳이 최상위계층입니다.
그 아래 상위계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위쪽으로 올라가는게 삶의 목표입니다.
그런 모습이 어른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상류층 아이들만 따로 다닙니다.
드라마에서만 보는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아이들도 서로 계급을 나누기 위해 노력합니다.
뉴스에서 임대아파트 아이들은 따돌림을 받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끼리도 자기 집이 어떤 아파트인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구분짓습니다.
심지어 옷 브랜드까지 보며 자신을 구분지으려고 합니다.
이런 세상이 얼마나 역겹습니까?
여러분은 사람을 맨처음 볼 때 무엇부터 보시나요?
제가 아는 사람은 옷 브랜드, 신발 브랜드, 안경, 시계, 차 이런 거 부터 봅니다.
지금 우리가 볼 말씀에도 이런 모습이 등장합니다.
당시 사회는 종교적 계급사회라고 부를 정도로 서로 구분지으며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본론]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야기에는 식사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합니다.
이 식사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종교적으로 그들은 음식규례들을 정해서,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먹을까, 누구와 먹을까 이런 것들을 정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잔치에 초대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식사자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도전하셨습니다.
자 이제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바리새파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음식을 잡수시러 그 집에 들어가셨는데 예수님 앞에 수종병 환자 한명이 등장했습니다.
수종병이란 것은 물이차서 몸이 붓는 병을 말합니다.
암걸리면 복수가 차오른 거 보신 적 있으시죠?
그런 병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바리새파 지도자의 집 앞에 있었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를 어떻게 대하는 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벌써 앞서 예수님은 여러차례 바리새인들과 대립을 했었기 때문에 여기서 그들이 지켜보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어떻게든 비난할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 사람을 고쳐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의 비난을 피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없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쳐주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신들이 예수님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에 그 사람을 고쳐주시기 전에 그들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바리새인들도 하기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게 옳고 그른지 따질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율법에 그렇게 적혀있기 때문에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자 그 병자를 손으로 잡아서 고쳐주셔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예수님은 그 후 바리새인들에게 또다시 한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들은 너희의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그 날이 안식일에라도 당장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 말은 긍정을 가정하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너희들도 이런 경우에는 안식일에 율법을 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하자 그들은 또다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아들이나 소가 죽을 위험에 처하면 율법에서 어찌 말하든지 간에 살려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종병으로 소망이 없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그를 고쳐주는 게 어찌 잘못되었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쉽게말해서 내게는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하다면 그게 맞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내로남불이 옳으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위선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먼저 종교의 눈이 아닌 긍휼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종교의 눈을 가지면 누가 규율을 어기나 안 어기나 감시합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그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긍휼의 눈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규율을 지키기 위해 남의 어려움에 둔감했습니다.
그들에게 항상 우선순위는 자신들의 종교적 욕심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더 인정받는 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욕심을 채우기 보다 남의 어려움을 볼 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남의 어려움에 눈을 감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대면예배를 무조건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님들이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때문에 이웃에 대한 긍휼함에는 눈을 감아버린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 목사님들에게도 이렇게 물으셨을 것 같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과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
우리도 역시 그런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 종교적 욕심때문에 남에게 피해가 간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예배나 봉사를 위해 회사에서 남보다 일찍 퇴근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종교적 욕심만 채우려는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그것을 더 좋아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식사자리에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식사할 때 자리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초대한 사람과 가까운 자리일 수록 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앉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식사자리를 둘러보면 누가 더 지위가 높은 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명예와 수치를 중시하던 문화에서 식사자리에서 어디 앉을 것인지는 너무 중요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자기 지위를 생각해 이 정도는 앉아도 되겠다고 생각해서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리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은 혼인잔치의 예를 드셨는데요.
예수님은 이렇게 자리 다툼을 하는 사람들에게 혼인잔치에 초대받으면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더 귀한 사람, 더 높은 사람이 오면 초대한 주인이 자리를 옮겨달라고 요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로 더 높은 사람은 늦게 등장하기 마련인데 그 때에는 자신의 자리를 비켜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때 옮기려고 하면 벌써 중간 자리는 누군가 차지했을 것이고, 그럼 자신은 제일 뒷자리에 앉아야 하는 거거든요.
그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도 그런 일이 있잖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자리에 앉았는데 ‘야~너 저쪽 끝으로 옮겨’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빠요?
그것과 비슷한 거죠.
그런데 반대로 자신이 맨 끝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초대한 주인이 와서 윗자리로 옮기라고 하면 사람들에게도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면 낮아질 것이고, 낮추면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삶의 지혜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무엇인가의 비유라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한 혼인잔치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는 우리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면 오히려 낮은 자리로 쫓겨나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바리새인들은 식사와 관련된 율법을 철저히 지켜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에서 높아지려는 마음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은 자리에 처해지게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남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윗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 혼인잔치에서는 사회적 지위로 그 자리가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다른 이들을 섬기는 모습을 통해 그 자리가 결정됩니다.
한가지 주의할 점은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 땅에서 낮아지려는 동기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높아지려는 것과 동일한 마음이 되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겸손히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한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그런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높은 자리, 낮은 자리가 아닙니다.
핵심은 그 자리의 반전에 있습니다.
자신이 차지할 자리에 대해 스스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초대한 주인이 오면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이 땅에서 자신이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오히려 들어가기 힘든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에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사람은 오히려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누구든지 스스로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스스로 낮추면 높아질 것이라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두번째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낮은 데 마음을 두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초대자인 바리새인 지도자에게도 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도 비유입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초대자에게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 사람을 초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그들이 다시 나를 초대해서 그것을 되갚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내가 누군가를 초대하면 그 사람도 나를 초대하여 그 호의를 되갚곤 했습니다.
이것으로 서로 서로의 명예를 유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구를 초대하느냐에 따라 초대한 사람의 명예가 높아졌습니다.
부유한 자,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를 초청하면 그 초대한 사람의 명예도 높아졌습니다.
그럼 다음번에는 초대받은 그 사람이 또 자신을 초대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높은 사람들은 가난한 자나 사회적 약자들을 초대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자신의 명예가 그만큼 손상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오히려 가난한 자들, 장애가 있는 자들, 다리 저는 자들, 눈 먼자들을 초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당시 아무도 초대하려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초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무 것도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이 나중에 그것을 되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좋은 대접받기를 바라기보다 대접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대접받기 위해 대접하기 보다 어떠한 보상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대접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조심할 점은 그 하나님 나라의 보상이란 이 땅에서 보상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행은 때로는 이 땅에서도 보상이 주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도 선을 행하는 자들을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몰래 선을 행한 사람도 결국 밝혀져서 상을 받고는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은 그 보상을 우리 스스로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바리새인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수종병 걸린 사람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초대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 지도자는 화가 났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 서로 주고받는 문화, 명예와 수치를 중시하던 문화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과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것이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 나라 잔치를 비유하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댓가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긴 자들을 부활의 때에, 즉 마지막 날 하나님 나라 잔치에서 모두 갚아주십니다.
연예인들보면 아무도 모르게 선행을 하고 싶었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 뉴스에 나옵니다.
그런 케이스는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국에 정말 유명한 찰스 스펄전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닭이 낳은 달걀들을 사람들에게 팔곤 했습니다.
한번도 그냥 공짜로 준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펄전 목사님이 돈을 밝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스펄전 목사님은 해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그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알고보니 목사님은 그 계란을 판 돈으로 어려운 과부들을 돕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드시 주의할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선을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보상을 받을 것을 기대해서도 안된다는 점입니다.
앞서 높은 자리 낮은 자리 이야기할 때 이 부분은 벌써 설명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 땅에서 낮은 자리를 의도적으로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그처럼 이 땅에서 선을 행하는 동기가 하나님 나라에서 더 큰 상을 보상으로 받기 위함이라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선을 행해야 하는 동기는 주님도 우리에게 아무 댓가없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보상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에 더이상 다른 것을 바랄 이유가 없습니다.
마치 죽다 살아난 사람이 가장 큰 선물인 생명을 얻었는데 더이상 바랄게 없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다이아몬드를 선물로 받으면 진주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도전하십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부정한 자, 거룩한 자가 나눠져 있었습니다.
잔치에 들어올 수 있는 자, 들어올 수 없는 자가 나눠져 있었습니다.
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자, 낮은 자리에 앉을 자가 나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펜트하우스는 좀 과장되긴 했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분리시켜 스스로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 경쟁합니다.
자신만의 펜트하우스를 찾아 올라가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모두 뒤짚어버리셨습니다.
높아지기 보다 낮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보상을 기대하기보다 아무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이들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보상을 받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합당한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