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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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0:4-6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라
-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이번 주에는 기독 청년들(19-39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주제는 이렇다.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우리 사회는 ‘돈이 최고야’라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다(92%). 자본주의 사회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만 다른 어떤 나라에 비해 이 비율이 높다고 한다. 이 정도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게 아니고 돈 자체가 욕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또한 ‘돈’이 성공의 척도인 한국 사회는 ‘능력이 있다고 성공할 수 없는’(66%) 사회이고, ‘부모 도움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사회’(74%), 즉 세습사회로 접어들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더 높은 계층으로 상승이 어려우며’(86%), ‘한 번 실패하면 재기할 기회도 없는 사회’(56%)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회에서는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어서 온갖 ‘불공정한 경쟁’(85%)이 판을 치며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사회’(85%)라고 인식한다. 돈이 최고인 사회에서 기독 청년들의 개인적 관심사는 무엇일까? 당연히 ‘경제적 여유’(48%)이다. 그리고 ‘안정적 일자리/취업’(27%), ‘주택/부동산’(22%)에 관심이 있다. 안타깝게도 기독 청년의 관심사 가운데 ‘종교’는 8위(10%)로 밀려났다. 먹고 살기에 바쁘니까 종교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난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돈을 추구하고 돈에 의존하도록 만들어간다. 가난은 절대 고상한 가치가 아니라 실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돈이 좀 있으면 우쭐해지고 없으면 기가 죽고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잠언 18:11에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 재물은 정말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성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하지만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지는 못한다. 잠언 11:4에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성경은 돈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돈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돈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지난주에 십계명의 문을 여는 1계명을 살펴봤다. 1계명과 2계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1계명은 하나님과 필적한 만한 다른 신(우상)을 두지 말라, 즉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만 두라는 말씀이라면, 2계명은 다른 신을 어떤 방식으로 섬기지 말아야 할지, 참된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절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여기에 나오는 ‘우상’과 ‘형상’은 원어로 ‘페셀’, ‘테무나’인데 눈에 보이는 외적인 형태를 갖춘 상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신의 모습을 피조물의 모양(새, 짐승, 물고기 등)으로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말씀한다. 고대에는 유독 새, 짐승, 물고기 모양의 우상들이 많았다. 2계명은 ‘너는 눈에 보이는 어떤 외적 형태로든지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도 섬기지도 말라’는 의미다.
- 이 계명은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처럼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사회에서는 보이는 것이 거의 전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고 신뢰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종교는 눈에 보이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저는 불교가 이런 인간의 본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방문한 어느 절에는 16m 넘는 어마어마한 관음상이 산 정상에 떡 하니 있었다.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었다. 제가 유심히 본 게 있는데, 그 관음상 주변에 사람들이 수백 개의 노란 리본에 빼곡히 소원을 적어서 걸어두었다. 불교 신자들은 굉장히 솔직하다. ‘사업 대박 나게 해주세요. 무병장수. 대학 합격.’ 우리처럼 둘러서 말하지도 않는다. 그냥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솔직히 적어두었다. 그렇게 큰 관음상 앞에 뭔가 빌어야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같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범한 끔찍한 범죄가 바로 금송아지 사건이다. 출애굽기 32:4에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그들이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십계명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끔찍한 짓을 벌인다. 모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스라엘은 곧 바로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정말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 마음은 진공 상태가 아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금방 다른 것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 앞에서 돈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는 돈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는다. 가진 것이 조금 부족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이 있다. 빌립보서 4:12에서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최근에 불렀던 <행복>이란 찬양에 이런 가사가 있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에 행복이라오.” 그런데 믿음이 약해지고 은혜가 줄어들면 뭐가 보이는가? 나는 지지리 궁상맞게 사는 것 같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나은 것 같다. 통장에 잔고가 넉넉하면 든든하고 통장에 잔고가 바닥이 나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 사람들이 좋은 집, 좋은 차, 요즘 플렉스라고 하던데 돈 자랑을 하면 속에서 뭔가 쓰린 것이 올라온다. 요즘 10대 아이들 사이에서 명품으로 자랑하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교복 안에 입는 티셔츠 한 장이 60-70만 원짜리가 있다고 한다. 그런 걸 사달라고 한다. 부모 등골이 휘어진다.
-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나? 강영안 교수는 인간이 신의 형상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 동기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고정 동기(localization motif)이고 또 하나는 조종 동기(manipulation motif)이다. 고정 동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섬기는 신이 어디 있는지 확실하게 모르면 섬기는 사람이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중략) 어떠한 장소를 정해서 고정시키고자 하는 동기입니다. 내가 섬기는 신을 한 곳에 두면 내가 확실하게 볼 수 있고 섬길 수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통찰이다. 형상을 가진 종교는 모두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신을 찾아가서 섬기면 그만이다. 한 장소에 있으면 동시에 다른 장소에는 절대 있을 수 없다. 저는 혹시 성도님들 중에도 예배당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찾아오시는 분이 계시지 않을까 겁났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만 계시는 분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큰일 난다. 하나님은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시다. 예레미야 23:24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신 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래서 그분은 두려운 분이다.
- 우리가 지금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은 장소에 매여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서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21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가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리느냐이다. 성령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예배드리고 있는가? 여러분이 지금 집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하나님의 성령과 진리가 충만한 상태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곳이 바로 예배처소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하지만 예배당에 와서 드린다 하더라도 예배시간에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으면 아무 소용없다.
-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다. ‘이제 예배당에 안 가도 되겠네.’ 그렇다고 예배당에서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성경에도 모이기를 힘쓰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의 포인트는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 고정시킬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 그렇다면 또 한 가지 동기가 조종 동기이다. 앞에서 말한 고정 동기보다 더 깊은 의도가 바로 신을 조종하려는 동기이다. 조종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더 깊은 의도는 내 마음대로 주물러 보자는 것입니다.(중략) 물론 내가 가서 절도 하고 온갖 행위는 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나면 내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상을 만드는 동기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신상을 만드는 것은 철저히 인간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기 위함이다. 앞에서 관음상 이야기도 했지만 만약 이 관음상이 인간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당장 폐기처분될 것이다.
- 성경에도 마치 우상처럼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사람이 나온다. 바로 사사기 17장에 나오는 미가인데, 그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 같은 자 누구인가?’이다. 그런데 그의 행동은 정말 이상하다. 4-5절에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인데 은으로 신상을 만들고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입는 에봇을 만들고 자신의 아들을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으로 삼는다. 제사장은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들만이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집에 진짜 레위지파 청년이 찾아온다. 그래서 그를 자신의 전담 제사장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렇게 한 목적이 그 다음에 나온다. 13절에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신당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레위지파 청년을 제사장으로 고용한 모든 것이 바로 자신의 복, 행복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겠지. 이건 바로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는 것이다. 정말 이 본문을 보면 머리가 멍해진다.
-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통제하거나 조종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우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사도행전 17:24-25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
- 그렇다면 오늘 둘째 계명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포인트는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은 보이는 방식이 아니라 말씀으로 임재 하는 분이시다. 신명기 4:12-13에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 누구도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했다. 심지어 모세도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분만 볼 수 있었다. 기독교는 보는 종교가 아니라 듣는 종교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들음으로 그분이 살아계심을 안다. 우리의 믿음도 그 말씀을 들음으로 생긴다. 주님께서 부활 후에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20:29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사실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이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한 자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오늘날 우리는 눈으로 주님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믿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살아서 움직이게 하심으로, 내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믿게 하신다.
- 또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의 계명,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본문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기서 ‘나를 사랑하는 것’과 ‘내 계명을 지키는 것’은 동격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조종할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그분을 미워하는 것이다. 5절에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다른 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그 신들을 갖가지 형상으로 만들어서 거기에다 절하고 섬기는 것이다.
- 오늘 본문에서 놀라운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보통 질투는 나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질투에도 두 종류가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을 때 생기는 질투가 있다. 이건 나쁜 종류의 질투다. 하지만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남에게 빼앗기게 되었을 때 생기는 질투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지금 다른 남자와 단둘이 식사를 하고 웃고 차를 마시고 있다. 마음이 편안한가, 아니면 불편한가? 마음이 편안하다면 그게 비정상이다. 지금 하나님이 느끼는 질투는 바로 두 번째 질투이다. 이사야 42:8에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오늘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기 원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의 은혜를 베푸신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그들의 자손 대대가 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3,4대 죄를 갚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것은 자녀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자녀들을 저주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죄의 영향력이 3,4대까지 흐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너무 속이 좁다고 한다. 그러나 3,4대와 천 대를 비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 팀 켈러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 내가 하나님보다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했던 것은 나를 배신할 것이다. 내게 복이 될 줄로 생각했던 것들이 내게 해로움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한번 따라했으면 좋겠다. “내가 필요한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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