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나를 아는 지식

십계명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74 views
Notes
Transcript
출애굽기 20:1-2 하나님과 나를 아는 지식
- 작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실시한 ‘2020년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보면, 개신교는 가톨릭·불교에 한참 뒤처진다. 국민의 10명 중 6명이 ‘한국 교회’와 ‘목사’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의 63.9%가 한국교회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32.4%)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31.5%)고 답했다. 목사에 대해서도 ‘신뢰하지 않는다’가 68.0%였다. 나아가 개신교인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가는지를 묻는 질문에도 65.3%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코로나 1년 동안 한국 교회가 보여준 모습은 솔직히 선하고 아름답지 못했다. 교회가 마치 문제를 일으키는 집단으로 비춰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유독 교회에서 코로나 확진자들이 많이 나왔고 방역 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교회들도 많았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에서 코로나가 확산될까봐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어쩌다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 <세상 속의 교회, 교회 속의 세상>이란 책에 이런 글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특별히 더 비윤리적이지는 않는데도 비판을 많이 듣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행동은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데, 고상한 말을 너무 많이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 10년이 되었는데 이제 이 말도 유효한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비윤리적인 것은 아닐까 겁난다. 또 이렇게 말한다. “교회에서 배운 것은 있어서, 머리로는 무엇이 옳은지 알지만 몸이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몸이 원하는 대로 말하면 정직하고 편한데 수십 년간 교회 다니며 배운 것이 있는지라 그렇게는 못하고, 그러다 보니 갈수록 말과 행동의 괴리가 커집니다. 세상과 똑같은 삶을 사고 있으면서도 괜히 남들과 다른 척하려다 보니 더 나쁜 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 오늘부터 십계명을 살펴보려고 한다. 십계명은 주일학교 때부터 배우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 중에 기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초를 다섯 기둥으로 표현했다. 십계명, 신조(사도신경), 주기도문, 세례, 성만찬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에 십계명은 첫 번째로 꼽힌다. 우리가 잘 아는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모두 십계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여러분 중에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이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다 아는가? 그냥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암기하는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아는 것처럼 그대로 살아내고 있는가? 유명한 책 제목처럼 ‘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이미 다 배웠다.’ 길을 건널 때는 좌우를 살펴야 하고,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유치원 때 배운 것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가? 정말 우리가 기초도 제대로 안 되는데 자꾸만 어려운 거 알려고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삶의 방식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가르쳐 주신 말씀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두 가지 중요한 명령이 있다. 신명기 6:5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또한 레위기 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또한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명령인데 이것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이 바로 십계명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음으로,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살인, 간음, 도적질과 같은 것을 하지 않음으로 사랑한다.
- 십계명에 관한 선입견 혹은 오해가 많다. 제가 두 가지 질문으로 준비했다. 첫째, 십계명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닌가? 십계명을 보통 하나의 명령, 지침, 법으로만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명령, 지침, 법이라고 하면 거북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엄마의 명령이다’라고 말하면 애들은 기겁을 하며 싫어할 것이다. ‘엄마가 또 나의 자유를 빼앗는구나. 뭔가 못하게 하려는가 보다.’ 분명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십계명을 보면 ‘~하지 말라’는 말씀이 더 많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우리가 편하게 자유롭게 살아가는 꼴을 못보고 뭔가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철학자 김용규 박사가 이렇게 말한다. “십계명은 인간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율법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백성을 종 되었던 땅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킨 존재가 그들에게 보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자유, 곧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부여하려고 내린 자유의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십계명은 계명을 내리면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로 자신을 일컬어 자유를 선사하는 자로서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밝힌 하나님의 의도와 합일할 수 있다. 또한 자신과 복음을 부단히 구약과 연결하던 예수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한 말이나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갈 5:13)라고 말한 바울의 입장과도 모순 없이 연결된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남의 것을 탐하고 빼앗고 간음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것을 하지 않는 자유다.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자유다. 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만 자유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것은 방종에 가깝다. 요한복음 8:34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또한 십계명을 하나의 명령, 지침, 법으로만 보는 것도 오늘 본문에서 경계하고 있다. 1절에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새 번역으로 보면 이렇다.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십계명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헬라어로 십계명을 ‘데칼로그’ 즉 ‘열 개의 말씀’이라고 번역했다. 실제로 하나님은 불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신명기 5:4-5에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하나님은 주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만큼 생생하게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이걸 감당하지 못한다. 십계명은 단순히 종이 위에 적힌 명령문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 그렇다면 두 번째로,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오늘날 십계명이 왜 필요한가? 십계명은 율법이 아닌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니까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큰일 난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욕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십계명과 같은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2절을 같이 읽어보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주신 시점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사건 이후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은 이것을 잘 지키면 너희에게 구원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주신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 칼빈은 율법의 세 가지 역할을 말한다. 1)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이다. 로마서 3:20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 율법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비와 은혜를 갈망하게 된다. 2)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역할이다. 이것을 율법의 정치적 사용 혹은 시민적 사용이라 불린다. 율법은 사회나 국가의 악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 미국과 영국과 같은 국가들의 법의 기초가 모세의 율법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3) 이미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편으로서의 율법의 역할이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 같이, 오늘날 구원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의 성숙을 위해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 마태복음 5:17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또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무시무시한 말씀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무엇인가? 이미 구원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서 구현하며 살아가는 의를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는 것은 옵션이 아니다. 반드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십계명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점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다. 오늘 이스라엘에게, 또한 우리에게 십계명을 수여하시는 분은 누구신가? 2절을 다시 보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먼저,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시는 자,’ 영어로 ‘I AM WHO I AM’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다. 출애굽기 3:14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의 자존성, 영원성을 말하고 있다. 또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시다. 이사야 43:15에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시다. 신명기 26:8에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예전에 성경개관 때 출애굽기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권능을 행하시는지 모른다. 10가지 재앙을 그 땅에 쏟아 붓는다. 마지막에는 이집트의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절대로 이스라엘을 보내주지 않는다. 저는 출애굽기를 보면 한 영혼이 죄에서 떠나 구원함을 받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생각하게 된다. 요즘 중등부에서 <천로역정>를 차례로 배우고 있는데 애니메이션이라도 꼭 보셔야 한다. 주인공이 집을 떠나서 천성으로 가는데 얼마나 방해가 많은지 모른다.
-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스스로 계신 하나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아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시한 분이 아니다. 그분은 크신 분이다. 시편 34:3에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제임스 패커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많은 연약한 점들의 뿌리에 하나님에 대한 무지-하나님의 도(ways) 및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에 대한 무지-가 자리 잡고 있다.”
-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십계명이다. 그분의 살아있는 생생한, 또한 준엄한 말씀이 바로 십계명이다.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우리가 정말 존경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 내게 어떤 말을 남기고 떠났다. 가볍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 말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분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 둘째,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점이다. 2절 앞부분만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스라엘의 과거 상태는 노예였다. 이집트라고 하는 거대 제국의 노예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의 과거 상태와 현재 상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세상과 죄의 노예처럼 살았다. 에베소서 2:3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의 원래 상태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그런데 4-5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
-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로 갖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다. 앞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전능한 분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초라한가? 그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몰라서 그런 것 아닌가?
- 비엔나의 젊은 집사 상투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그는 2세기 중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에 살던 사람이다. 그 당시만 해도 기독교는 불법이었다.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투옥과 고문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상투스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재판관이 이렇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런데 상투스는 시종일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주변에서 그를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신앙을 포기할 것을 압박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나중에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자신을 고발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이름도, 자신의 국적이나 자신이 살던 도시도, 자신이 자유인이지 노예인지도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모든 질문에 로마어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결국 그는 원형경기장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 오늘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초라한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인가? 크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나는 잘 알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내 자신이 누구인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혼란스럽기 때문 아닌가?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나?
- 김춘수 시인의 <꽃>을 잘 아실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출애굽기 20:1-2 하나님과 나를 아는 지식
- 작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실시한 ‘2020년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보면, 개신교는 가톨릭·불교에 한참 뒤처진다. 국민의 10명 중 6명이 ‘한국 교회’와 ‘목사’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의 63.9%가 한국교회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32.4%)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31.5%)고 답했다. 목사에 대해서도 ‘신뢰하지 않는다’가 68.0%였다. 나아가 개신교인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가는지를 묻는 질문에도 65.3%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코로나 1년 동안 한국 교회가 보여준 모습은 솔직히 선하고 아름답지 못했다. 교회가 마치 문제를 일으키는 집단으로 비춰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유독 교회에서 코로나 확진자들이 많이 나왔고 방역 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교회들도 많았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에서 코로나가 확산될까봐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어쩌다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 <세상 속의 교회, 교회 속의 세상>이란 책에 이런 글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특별히 더 비윤리적이지는 않는데도 비판을 많이 듣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행동은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데, 고상한 말을 너무 많이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 10년이 되었는데 이제 이 말도 유효한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비윤리적인 것은 아닐까 겁난다. 또 이렇게 말한다. “교회에서 배운 것은 있어서, 머리로는 무엇이 옳은지 알지만 몸이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몸이 원하는 대로 말하면 정직하고 편한데 수십 년간 교회 다니며 배운 것이 있는지라 그렇게는 못하고, 그러다 보니 갈수록 말과 행동의 괴리가 커집니다. 세상과 똑같은 삶을 사고 있으면서도 괜히 남들과 다른 척하려다 보니 더 나쁜 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 오늘부터 십계명을 살펴보려고 한다. 십계명은 주일학교 때부터 배우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 중에 기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초를 다섯 기둥으로 표현했다. 십계명, 신조(사도신경), 주기도문, 세례, 성만찬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에 십계명은 첫 번째로 꼽힌다. 우리가 잘 아는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모두 십계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여러분 중에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이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다 아는가? 그냥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암기하는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아는 것처럼 그대로 살아내고 있는가? 유명한 책 제목처럼 ‘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이미 다 배웠다.’ 길을 건널 때는 좌우를 살펴야 하고,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유치원 때 배운 것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가? 정말 우리가 기초도 제대로 안 되는데 자꾸만 어려운 거 알려고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삶의 방식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가르쳐 주신 말씀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두 가지 중요한 명령이 있다. 신명기 6:5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또한 레위기 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또한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명령인데 이것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이 바로 십계명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음으로,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살인, 간음, 도적질과 같은 것을 하지 않음으로 사랑한다.
- 십계명에 관한 선입견 혹은 오해가 많다. 제가 두 가지 질문으로 준비했다. 첫째, 십계명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닌가? 십계명을 보통 하나의 명령, 지침, 법으로만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명령, 지침, 법이라고 하면 거북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엄마의 명령이다’라고 말하면 애들은 기겁을 하며 싫어할 것이다. ‘엄마가 또 나의 자유를 빼앗는구나. 뭔가 못하게 하려는가 보다.’ 분명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십계명을 보면 ‘~하지 말라’는 말씀이 더 많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우리가 편하게 자유롭게 살아가는 꼴을 못보고 뭔가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철학자 김용규 박사가 이렇게 말한다. “십계명은 인간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율법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백성을 종 되었던 땅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킨 존재가 그들에게 보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자유, 곧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부여하려고 내린 자유의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십계명은 계명을 내리면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로 자신을 일컬어 자유를 선사하는 자로서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밝힌 하나님의 의도와 합일할 수 있다. 또한 자신과 복음을 부단히 구약과 연결하던 예수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한 말이나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갈 5:13)라고 말한 바울의 입장과도 모순 없이 연결된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남의 것을 탐하고 빼앗고 간음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것을 하지 않는 자유다.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자유다. 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만 자유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것은 방종에 가깝다. 요한복음 8:34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또한 십계명을 하나의 명령, 지침, 법으로만 보는 것도 오늘 본문에서 경계하고 있다. 1절에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새 번역으로 보면 이렇다.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십계명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헬라어로 십계명을 ‘데칼로그’ 즉 ‘열 개의 말씀’이라고 번역했다. 실제로 하나님은 불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신명기 5:4-5에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하나님은 주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만큼 생생하게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이걸 감당하지 못한다. 십계명은 단순히 종이 위에 적힌 명령문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 그렇다면 두 번째로,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오늘날 십계명이 왜 필요한가? 십계명은 율법이 아닌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니까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큰일 난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욕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십계명과 같은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2절을 같이 읽어보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주신 시점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사건 이후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은 이것을 잘 지키면 너희에게 구원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주신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 칼빈은 율법의 세 가지 역할을 말한다. 1)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이다. 로마서 3:20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 율법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비와 은혜를 갈망하게 된다. 2)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역할이다. 이것을 율법의 정치적 사용 혹은 시민적 사용이라 불린다. 율법은 사회나 국가의 악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 미국과 영국과 같은 국가들의 법의 기초가 모세의 율법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3) 이미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편으로서의 율법의 역할이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 같이, 오늘날 구원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의 성숙을 위해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 마태복음 5:17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또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무시무시한 말씀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무엇인가? 이미 구원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서 구현하며 살아가는 의를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는 것은 옵션이 아니다. 반드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십계명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점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다. 오늘 이스라엘에게, 또한 우리에게 십계명을 수여하시는 분은 누구신가? 2절을 다시 보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먼저,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시는 자,’ 영어로 ‘I AM WHO I AM’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다. 출애굽기 3:14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의 자존성, 영원성을 말하고 있다. 또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시다. 이사야 43:15에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시다. 신명기 26:8에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예전에 성경개관 때 출애굽기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권능을 행하시는지 모른다. 10가지 재앙을 그 땅에 쏟아 붓는다. 마지막에는 이집트의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절대로 이스라엘을 보내주지 않는다. 저는 출애굽기를 보면 한 영혼이 죄에서 떠나 구원함을 받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생각하게 된다. 요즘 중등부에서 <천로역정>를 차례로 배우고 있는데 애니메이션이라도 꼭 보셔야 한다. 주인공이 집을 떠나서 천성으로 가는데 얼마나 방해가 많은지 모른다.
-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스스로 계신 하나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아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시한 분이 아니다. 그분은 크신 분이다. 시편 34:3에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제임스 패커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많은 연약한 점들의 뿌리에 하나님에 대한 무지-하나님의 도(ways) 및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에 대한 무지-가 자리 잡고 있다.”
-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십계명이다. 그분의 살아있는 생생한, 또한 준엄한 말씀이 바로 십계명이다.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우리가 정말 존경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 내게 어떤 말을 남기고 떠났다. 가볍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 말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분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 둘째,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점이다. 2절 앞부분만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스라엘의 과거 상태는 노예였다. 이집트라고 하는 거대 제국의 노예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의 과거 상태와 현재 상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세상과 죄의 노예처럼 살았다. 에베소서 2:3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의 원래 상태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그런데 4-5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
-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로 갖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다. 앞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전능한 분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초라한가? 그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몰라서 그런 것 아닌가?
- 비엔나의 젊은 집사 상투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그는 2세기 중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에 살던 사람이다. 그 당시만 해도 기독교는 불법이었다.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투옥과 고문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상투스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재판관이 이렇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런데 상투스는 시종일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주변에서 그를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신앙을 포기할 것을 압박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나중에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자신을 고발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이름도, 자신의 국적이나 자신이 살던 도시도, 자신이 자유인이지 노예인지도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모든 질문에 로마어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결국 그는 원형경기장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 오늘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초라한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인가? 크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나는 잘 알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내 자신이 누구인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혼란스럽기 때문 아닌가?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나?
- 김춘수 시인의 <꽃>을 잘 아실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