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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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자의 삶
거듭난 자의 삶
거듭난 삶의 본질
한 나라에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이 전부터 부모님이 만들고 기다려온 이름을 갖게 될 것이며, 그 부모님이 살던 집에서 길러질 것입니다. 분유든 모유든 부모님이 먹여주는 것을 먹을 것입니다. 또한 아이에게는 태어난 나라에 따라서 국적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사용하는 언어를 배우고 살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딱히 어떤 큰 이유없이 한 아기가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함께 가는 것들입니다.
우리도 한번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길 원합니다. 내가 태어난 해, 날짜, 지역, 혹시 태어나자마자 기억나시는 분 계십니까? 아마 이러한 기억은 우리가 태어나고 이후 부모님에 의해서 듣거나, 사진을 통해서 알거나 할 것입니다.
아이는 또 자라면서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알아갈 것입니다. 누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어디나라 사람이고, 어떤 인종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중국적을 가진 한 동생이 있는데 그 친구가 말하길 자기는 한국인보다 미국인이 더 편하다는 것입니다. 5살 때 까지 한국과 미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살던 친구였는데 부모님이 한국인이니까 한국인으로써 살야야 할 것 같은 느낌은 드는데 미국인이 더 편하고 미국 문화가 더 친근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굳이 옆에서 야 너 미국인이야, 야 너 한국인이야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확립되어가는 정체성은 우리 인생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나라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꽤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해서 많은 궁금증과 기대감을 갖고 찾아왔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니고데모는 그 당시 예수님이 랍비 교육을 제대로 받은 분도 아니셨고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나셨는데, 이러한 분의 말씀이 그들의 말씀과 다르고 표적을 또 보아하니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직감을 얻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표적을 보고 찾아온 니고데모의 행동과 말을 비추어 보았을 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단순히 궁금해서 일 수도 있고, 혹은 로마로 부터 진짜로 구원할 자이신가 보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또는 선지자인지 아닌지 보고 싶어서 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유던 간에 니고데모는 1차원적인 영적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쑴 드린 1차원 적 영적 눈은 단어가 어렵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세상만 진리라고 보는 눈 으로 풀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갑자기 거듭남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3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 시점에 니고데모에게 필요한 말씀은 예수님이 미래에 무엇을 하실 것인지가 아니라 바로 거듭남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거듭난다 에서 거듭 이라는 단어는 아노덴=위로 부터 라는 뜻입니다. 이 위는 그냥 위가 아니라 꼭대기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니고데모의 1차원적 영적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난다는게 무슨 뜻입니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라고 되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뒤이어 이 거듭남의 메시지를 1차원적 영적 시각, 즉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 인줄 아는 니고데모에게 다시 말씀해주십니다.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 말씀해주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거듭난다는 것,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서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1. 거듭난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에스겔36:25~27절 말씀을 보시면
25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죄 씻음 받고 성령에 이끌림 받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은 전치사 하나에 연결되어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둘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육으로 난 것, 육으로 보는 것은 니고데모의 관점과 똑같단 것입니다. 1차원적인 영적 시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기 전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또한 성령을 받기 전 우리들의 삶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줄 아는 것, 행동할 줄 아는 것, 말할 줄 아는 것들이 결국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8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
사도행전 8:9-10,18-21
이 사람이 빌립이게 세례받고 하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눈을 가지고 성령을 바라보니
성령님이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육신을 채울 것을 기대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이 한국교회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을 자기가 다룰 줄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성령의 능력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줄 아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 생에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 팔아서, 신학 팔아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시몬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이 도에는, 이 복음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것이 육으로 하나님을 보고 육으로 성령을 알면 낳게되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고 빌립 집사를 따라다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믿었고 또 세례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몬은 베드로에게 저주의 말을 듣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바로 회심없는 영접을 하기 때문 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능력은 이생의 평안과 자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제공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회심하고 돌아온 그리스도인에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2.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따라가는 자 입니다.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의 과정에는 십자가 고난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은 그냥 올라가신 분이 아닌 십자가 고난을 당하고 죽고 다시 사시고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따르다 불평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가지 해결책을 주시는데 그 해결책이 바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놋뱀을 쳐다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쳐다보는 백성들은 다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광야는 물도 없이, 넉넉한 식량도 없이 뚜렷한 목적지 걸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고난의 장소입니다. 힘든 장소입니다. 그런 장소에서 그들은 죄를 지었고 뱀에 물렸습니다. 독이 퍼지는 중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죽어가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은 문 뱀과 같은 모양의 뱀을 세워놓으시고 그것을 보면 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믿음과 순종이 필요한 시점이었던 것입니다.
9절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자기를 문 뱀과 똑같은 모양의 뱀, 독을 퍼지게 해서 사람들은 죽인 뱀, 자기 몸 속에 독을 퍼지게 해서 내 피부가 시퍼렇게 변하고 숨이 가빠지게 하고, 정신이 흐려지게 한 이 뱀과 똑같은 모양의 뱀을 쳐다보면 살겠다는 이 말씀을 듣고 쳐다보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 장대가 있는 곳 까지 가는 그 길을 걸어서 가는 것. 거기에는 믿음과 순종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문 뱀과 같은 모양이었지만 그것을 보면 나을 것이라는 말을 믿고 본 사람들을 다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고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눈에는 패배의 장소, 비참한 장소, 저주의 장소입니다. 사람들이 침뱉고, 주먹으로 치고 조롱하고 가장 처참하게, 수치스럽게, 고통스럽게 저 십자가를 지고 갔던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고통을 받고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그 예수님, 믿기지 않겠지만 그분을 믿고 따르면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보지도 못하고 믿기지 않는 이 것을 어찌 믿고 어찌 순종하고 어찌 여기에 내 인생을 걸 수 있겠냔 말입니까? 거듭난자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 따라가는게 가능하단 것입니다. 그것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는 곳도 아니고, 불로장생을 누리게 해주는 곳도 아니고, 이생의 자랑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지만, 당장 내 눈에 확연히 보이는, 나를 헷가닥하게 만드는 초자연적인 인생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지만,
오히려 광야의 삶, 고난의 삶, 인내의 삶, 다져지는 삶, 깎여져가는 삶이라 해도 믿음의 자녀들에게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자녀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광야같은 삶을 삽니다. 그 광야가 축복되게 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다 같은 광야에서 똑같이 뱀에 물렸습니다. 죽게 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느냐, 아니면 내 몸에 퍼진 독을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나를 믿고 그대로 사느냐, 여기에서 광야의 결과가 결정난다는 것입니다.
3. 거듭난다는 것은 내가 어디로 갈 사람인지 아는 자.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우리는 성령님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볼 수도 없고 또 만질 수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육성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님과 교제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바보같아보이는 일입니까?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 그 성령? 그 분이 우리를 이끄신다?
만약 기독교에 대해서 한번도 들은 적이 없는, 가장 기본적인 지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 성령님이 이끄실꺼야… 라고 말한다면. 그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바보취급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정신병걸린 사람 취급하지 않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나를 이끈다고?
니고데모의 반응을 보세요. 니고데모는 실력있는 산헤드린 회원이었습니다. 구약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구약에 대해 잘 안다는 개념은 지금 우리 사이에서 잘 안다는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달달 외울 정도로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그 실력있는 니고데모의 반응을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니고데모의 반응을 보시고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들은 비록 성령을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고 피부로 느낄 수 없지만 그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를 이끄신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하려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 땅에서 지혜와 지식을 받아서 이생이 자랑되게 하려 하시는게 아니라, 내가 영원한 생명에 참예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극단적으로 묻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대답하시길 원합니다. 여러분 지금 당장 누군가 우리 머리에 총구를 내밀고 예수님을 부인하라고 한다면 여러분 부인 안 할 자신 있으십니까? 천만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용기와 자신을 가질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자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옆에서 지키겠다고 했는데 결국 예수님을 한번도 아니요 두번도 아니요 세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과 3년을 함께 하고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표적과 이적과 또 성스러운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베드로도 결국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육성을 들은 적 없는 우리가 어떻게 감히 당당히 해낼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누가 우리를 해하려 들고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고 목에 칼을 대고 내 육신을 어떤 방법으로든 해할 지언정,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있다면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회심하고 거듭난 자들은 성령님이 이끄시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 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인치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의 마지막 까지도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육체의 숨이 끊어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 사랑이 넘치는 삶이 우리의 죽음 저 너머에 우리가 볼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이러한 성령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확신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잠깐 동안의 삶의 번들거림이 아닌 영원한 삶의 광명한 빛이 우리 가운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거듭난 자로써, 성령님의 깊은 역사하심 안에 누리는 유치부 성도님들 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