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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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누구나 품어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누구나 품어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서론]
제가 대학교3학년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며 제일 좋았던 것이 또하나의 가족을 얻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가기 전에 교회가고, 점심시간에 교회에서 밥 해먹고, 학교마치면 교회가서 기도하고 교회친구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나누는 시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이런 세상이 있구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제게는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치만 교회 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친구들이 모여있다보니 별의 별일들도 많았습니다.
서로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서로 상처주기도 했습니다.
냉장고 옮기는 방법 가지고도 서로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젊다보니 형제 자매끼리 애정전선이 얶여서 서로 긴장관계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또다시 서로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교회란 이런 곳이구나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완벽한 곳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도 죄인들이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부족한 자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런 교회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본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자들을 향해 조심해야 할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작은 자들이란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힘이 없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작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특히 이 작은 자들을 하나님 나라에 초청하셨습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의 아픔을 아시고 직접 손으로 만져 치유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작은 자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큰 자처럼 다루셨습니다.
학교에서 보면 선생님들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이 공부도 못하는 어떤 친구를 잘 대해주면 그 친구는 평생 그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선생님이 관심을 주시고 사랑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중학교때 한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지금 제 아내가 성악가이지만 저는 학창시절 음악을 잘 못했습니다.
물론 노래는 잘했지만 음악실기가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음악선생님이 저를 정말 사랑해주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인데 제 생각에 제가 같은 아파트 살았기 때문인거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선생님께 사랑받은 기억이 아직도 너무나 생생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작은 자들을 정말 사랑해주셨거든요.
손수 만져 병을 고쳐주시고, 함께 식사도 하시고 죄도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작은 자들을 향해 섬세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줘야만 합니다.
세상은 그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지만 교회는 오히려 그들을 환영하고 잘 섬겨줘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세상에서 높은 자가 낮아지고, 세상에서 낮은 자가 높아져야 합니다.
지금 저희 교회는 그런 분들이 없지만 교회가 좀 커지면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지금은 학생들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사업가, 나이드신 분, 괴팍한 분, 가난한 분, 아프신 분들도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특히, 세상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조심해서 상대해야 합니다.
실족한다는 것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한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장애물이 되어 그것때문에 그들이 믿음에서 넘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의도했을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상대방이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죄를 짓게 되거나 또는 아에 교회를 떠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작은 자는 여러가지 면에서 상처받기 쉬운 분들이기 때문에 상대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작은 자들이 넘어질 수 있을까요?
제가 예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연탄파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거의 그런 분이 안 계시지만 제가 어렸을 적만해도 제 옆집이 연탄장수집이었습니다.
아무튼 그 분은 교회에서 가난한 편에 속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배를 마치고 담임목사님이 예배당 문 앞에서 나가는 성도들과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왠만하면 성도들과 대부분 인사를 나누지만, 간혹 성도들이 한꺼번에 많이 나오면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또는 목사님도 사람인지라 계속 웃지 못하고 얼굴표정을 좀 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딱 그 타이밍에 그 연탄장수분이 걸린 겁니다.
목사님이 그 분한테 웃지 않고 악수를 했던 거죠.
그 분은 그걸 자기가 연탄장수라서 목사님이 웃지 않은 거라고 오해한 겁니다.
그래서 그 연탄장수분은 목사님이 자신을 차별한다고 생각해서 몇 주간 교회에 나오질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경우 목사님 잘못이 아니죠.
그 분이 착각하고 오해한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 목사님이 직접 찾아가서 그 분 마음을 풀어주는 게 맞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차별당하고 소외된 분들은 교회에서도 그런 경험을 받으면 정말 힘들어하거나 믿음에서 떠날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의지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상대할 때에는 교회에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교회에 그런 분이 계시면 더 반갑게 인사하고 맞아줘야 합니다.
또 누군가의 말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작은 공동체이다보니 소문이 참 잘 돌아다닙니다.
제가 아는 유학생 한분도 한인교회에서 잘못된 소문이 나서 야밤도주를 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그 교회 집사님들이 소문을 다 퍼뜨린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말을 잘못해서 청년 하나를 교회에서 떨어뜨린 겁니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그 분은 정말 교회가기가 싫고 두려웠다고 하더라구요.
교회에서 이런 소문들, 남 흉보는 것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란게 그렇습니다.
워낙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때로는 서로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상처주기도 상처 받기도 쉬운 곳입니다.
그래서 좀 더 믿음이 있고, 오래 교회 다니신 분들이 말과 행동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아니, 왜 나만 그렇게 조심해야해?라고 말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분은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분입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내 말과 행동때문에 다른 사람이 혹시나 다칠까봐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그들이 실족하게 된다면 화가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심지어 그런 사람은 목에 큰 맷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지는 게 더 낫다고 말합니다.
쉽게말해서 이런 작은 자를 믿음에서 떠나게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말입니다.
좀 예수님이 너무 심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작은 자 한명을 실족시키는 일이 큰 죄라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실족시키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도 연탄장수분을 의도적으로 웃지 않으신게 아니잖아요.
그럼 그렇게 의도하지도 않고, 아니면 어쩌다보니 남을 실족하게 한 경우도 다 이렇게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죽으라는 그런 말일까요?
그럼 아마 교회 대부분 사람들 죽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경우를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을 실족케 하는 죄는 지속적으로 그런 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일이 심각한 죄일까요?
그것은 그 일이 하나님 나라에 한 영혼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을 넘어지게 해서 심판을 받게 만드는 일은 사탄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찾아 나서시는 분인데 오히려 한 마리 양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이라면 그 죄가 무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반대로 누군가가 제자들에게 죄를 지어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본인이 가해자였다면 이제는 피해자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먼저 그 죄를 지은 사람을 꾸짖어서 설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꾸짖고 설득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죄를 계속 짓게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거나 회개하지 않으면 그건 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사실여부를 확인해서 몇번의 회개할 기회를 주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에서 퇴출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면 용서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용서가 보통 용서가 아닙니다.
하루에 일곱번 죄를 짓고 일곱번 다시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보통 당시 유대교에서는 3번만 용서하는 것도 대단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니까 이것은 엄청난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엄청난 거죠.
보통 우리는 누군가 한 두번 회개했다고 말해도 동일한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의 회개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다시 용서하지 않으려 하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회개의 진정성은 우리가 판단하지 말고 계속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번이란 성경에서 완전수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용서해야 할까요?
그것은 끊임없는 용서를 통해 그 사람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기다림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한번 두번 용서하는 것은 어쩌면 내 용기로 가능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결국 이 사람을 변화시켜 주시겠지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이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뭐라고 포기하나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친구가 자꾸 자신에게 잘못하면 ‘너 한번 더 이렇게 하면 가만 안둬, 절교야~’
이렇게 말하죠.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실수를 몇번 반복하면 용서하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못해서 헤어지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죄를 매번 짓습니다.
그리고 지을 때마다 회개하고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매번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너 또 똑같은 죄 지으면 아웃이야~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이 부분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내가 하나님께 내 죄를 용서받았다는 증거가 뭐냐면 바로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았기 때문에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서로 죄인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내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서로 서로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상처주고 상처받으면 서로 안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서로 용서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 사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용서를 끊임없이 하기가 참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도 아내가 동일한 실수를 몇 번만 해도 못 참아서 다투게 되는데 누군가 나한테 계속 죄를 짓는데도 그를 끊임없이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이런 끊임없는 용서는 정말 믿음이 대단한 사람이나 하는 게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제자들도 했던 모양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도 자신들의 믿음을 더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에 믿음이 필요할까요?
믿음은 내게 뭔가 큰 일이 이뤄지게 할 때나 필요한 게 아닌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믿음이 정말 필요합니다.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게 쉽지, 남을 용서하는 건 어렵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용서와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은 결국 그 사람을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끊임없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믿음 이야기를 한 것은 방향은 잘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이 부분에서 잘못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말의 의미는 지금 우리의 작은 믿음으로는 실천할 수 없을 거 같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말해서, 이거 너무 어려운 데요 이런 의미입니다.
누군가를 계속 용서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저라도 제자들처럼 말했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더 기가 막힙니다.
너희 이게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아니야 너희들한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뽕나무더러 바다에 빠지라고 하는 것도 가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큰 믿음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콩알보다 작은 믿음일지라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입김만 불어도 훅 날라가버리는 그런 것인데 반해 뽕나무는 뿌리가 깊게 자라서 잘 뽑히지도 않는 그런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런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가 바다에 빠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기적같은 일이 그 작은 믿음만 가지고 있어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작은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예수님은 과장법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한마디로 말해서 누군가를 끊임없이 용서하는 데에는 너희 믿음이 크냐 작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할수 있다고 믿고 실천하느냐 실천하지 못하느냐의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순종여부를 자기 믿음의 크기로 판단하곤 합니다.
교회봉사를 부탁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직 믿음이 작아서요.
아닙니다.
믿음이 작아서가 아니라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큰 믿음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 진실한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고 믿으면 불가능한 것이고, 가능하다고 믿고 실천하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믿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내 믿음에 집중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힘듭니다.
항상 내 생각에 내 믿음은 작아 보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 집중하면 믿음은 절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개를 키우시는데 정말 작은 개였습니다.
그런데 그 개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큰 개를 만났습니다.
자기 몸집보다 10배는 더 큰 개인데 그 개를 보고 도망가지 않고 막 짖어대며 달려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개가 용감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 개는 자기 크기와 능력을 믿은 게 아니라 주인을 믿은 것입니다.
주인크기가 자기 크기인줄 알고 그 개에게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믿음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주님의 능력을 진짜로 믿고 신뢰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의 자세를 강조합니다.
왜 갑자기 종의 자세를 이야기 하시는 것일까요?
순종을 마치 선택처럼 생각하는 자세를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앞서 돈을 비롯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정말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을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또 각별한 수고를 해야 합니다.
또 끝없이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니 이게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냥 부분적인 순종만 할 수 있잖아요.
다른 거 다 하는데 이것 좀 안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것을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종이 있는데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관리하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수고했다면서 식사자리에 앉혀서 주인과 함께 식사하지 않습니다.
밖에서 많이 일했다고 집에 와서 주인하고 같이 식사하고 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종은 집에 오자마자 또다시 주인이 먹을 음식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먹는 동안에도 수종을 들어야 합니다.
주인이 이렇게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야 종은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그 당시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종도 어떤 보상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그냥 종이 할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제자로서 해야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쉽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누군가를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누군가를 끊임없이 용서하는 일은 너무 힘들고 어려습니다.
그렇다고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할 뿐입니다.
많은 일을 했을지라도 이것까지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핑계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한 많은 일들로 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유혹은 목회자에게 많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개척하고 오랜 세월 헌신하고 나면 좀 느슨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한 일이 얼마나 많은 데 이 정도쯤이야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마치 주인 식탁에 같이 앉아서 밥먹으려고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주님도 이정도는 인정해주시겠지.
내가 좋은 차, 이 정도는 탈 수 있지.
내가 교회에서 이 정도 대우는 받을 수 있지.
뭐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타락하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뭐 이런 위험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큰 교회에서 일할 때 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것을 제 돈주고 산 적이 없습니다.
다 제가 담당했던 친구들이 사준 것입니다.
명절때는 많은 선물들이 들어와서 솔직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죽도록 일하니 이정도 보상이 주어지는 구나.
한 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냥 주님의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런 게 왜 필요합니까?
도리어 제 영혼을 망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비단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에 공로가 있는 분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자기가 교회 초기부터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가 오랫동안 교회를 섬겼기 때문에 나중에 좀 빠지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좀 쉬고 누리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다카포교회 초창기 멤버니깐 나중에 여러분들도 해당되겠죠?
그런데 그러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식은 종이 주인과 함께 식탁에 앉으려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할 수 있는 말은 ‘주님,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우리의 노고와 수고를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끝이 나와 있지 않지만 주님은 충성한 종을 나몰라라하는 그런 야박한 주인이 아닙니다.
그 분은 수고하고 충성한 종의 피곤한 발을 씻겨주시는 분입니다.
다 수고하고 나면 큰 잔치를 베풀어 우리의 수고를 격려해주시는 분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펄전 목사님에게 어떤 젊은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교회를 찾고 있는데 혹시 목사님이 추천해주실 수 있는 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나도 찾고 있는데 아직 못 찾았다네.
혹시 자네가 찾으면 내게 연락해주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청년이 실망하고는 스펄전 목사님 방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스펄전 목사님이 한 말씀을 더 했다고 합니다.
젊은이, 혹시 완벽한 교회가 있더라도 자네가 그 교회를 다니는 한 그 교회는 완벽한 교회가 될 수 없을 거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죄인들이 그 안에 있다보니 갈등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관계를 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좀 더 세심한 관심과 용서입니다.
내 말과 행동이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지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 내에 연약한 자가 있다면 더 세심히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죄를 지으면 서로 서로 회개를 권면하고 끝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나도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 믿음으로는 못할 거 같지만, 주님의 능력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나보다 더 크신 주님이 내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순종들은 나의 권리가 아니고,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서 순종해야 할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보다 훨씬 커지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서로 관심을 기울이고,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는 제 2의 가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