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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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0:7 그 이름을 위하여 살라
-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이런 대사가 있다. “나의 원수는 당신의 이름뿐이에요./ 몬테규 사람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당신일 뿐이에요./ 몬테규가 무엇인가요?/ 손도 아니고, 발도 아니고, 팔도 아니고, 얼굴도 아니고/ 사람의 몸에 속한 그 어떤 부분도 아니에요./ 아, 어떤 다른 이름이 되세요!/ 이름 안에 무엇이 있지요?/ 장미를 다른 어떤 이름으로 일컫더라도/ 향기로운 냄새는 변함이 없지요./ 그러니 로미오는 로미오라고 불리지 않더라도/ 그가 가진 사랑스런 속성은 그대로 유지되는 거예요./ 그 이름이 없어도 말이죠./ 로미오, 당신의 이름을 버리세요./ 그리고 당신의 일부가 아닌 그 이름 대신/ 나를 받아주세요.”
-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 원수지간인 가문에서 태어난 탓에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불행한 연인에 관한 이야기다. 위의 대사처럼 줄리엣은 자신이 사랑하는 로미오가 ‘로미오 몬테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 이름이 자신의 원수라고 말하고 그 이름을 버리라고 한다. 그러면서 중요한 질문을 한다. “이름 안에 무엇이 있지요?” 도대체 이름 안에 무엇이 있기에 자신과 로미오의 사랑을 가로막는가? 존 코츠라는 학자가 이렇게 해설한다. “그의 이름은 그의 역사다. 몬테뉴 가문. (중략) 여러 세대의 증오와 한 세대의 숙명적 사랑의 비극이 이름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로미오이자 몬테뉴 사람이라는 이름 안에 사랑하는 두 연인의 비극적 스토리 전체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모든 것이 이름 안에 있다.”
- 우리도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녀가 태어났을 때 (혹은 태어나기 전에) 부모가 하는 가장 진지한 일은 바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그냥 ‘개똥이’로 짓지 않고 왜 더 나은 이름을 지으려고 애쓰는가? 그 아이가 평생 그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름이 그 아이를 규정짓기 때문이다. 이름이 곧 그 아이다. 저도 첫째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놓고 거의 6개월 동안 굉장히 고민하며 기도했다. 결국 ‘하준’으로 정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잘 지은 이름이다.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이다. 그의 인생에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경험하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 인간의 이름도 함부로 정하거나 부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곧 존재 자체다. 그분의 이름 안에는 인격, 성품, 능력, 영광, 위엄 등 모든 것이 담겨있다. 역대상 29장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한다. 11절에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그런데 13절에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그분의 위대하심, 권능, 영광, 승리, 위험, 주권이 모두 그의 이름 안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 오늘 세 번째 계명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에 관한 말씀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이 계명을 그냥 ‘말을 조심해라, 욕하지 말라, O My God! 이런 말 쓰지 말라’ 정도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세 번째 계명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봐도 알 수 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첫 번째 청원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청원이다. 마태복음 6:9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십계명과 주기도문 모두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중요한 관건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 사실 셋째 계명을 어기는 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다. 레위기 24:16에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호와(야훼)’라는 이름 자체를 아예 입에 담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음 없이 ‘YHWH’라고 표기하고 이 단어가 나오면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라고 읽었다.
-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부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할 것을 명령한다. 구약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7천 번 이상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세 번째 계명은 정확하게 무엇을 금지하는 것인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하신다. 초점은 ‘망령되게’로 번역된 ‘샤웨’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크게 2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공허한, 가치 없는.’ 하나님의 이름을 허망하고 가치 없는 일에 마구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경우다. 영어에는 하나님을 일컫는 God이란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O My God! (맙소사!) 이 표현을 한국 사람도 많이 쓰는데 진짜 하나님을 부르는 건 아니다. 사실 미국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Jesus Christ!(제기랄!) 이건 예수님을 부르는 게 아니라 욕설이다. 몇 년 전부터 우리말에는 어떤 단어 앞에 하나님을 뜻하는 ‘갓’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다. ‘갓지성(박지성)’ ‘갓뚜기(오뚜기).’ 또한 하느님을 가리키는 ‘~느님’을 사람이나 사물에 붙이기도 한다. 유재석을 가리켜서 ‘유느님,’ 치킨을 ‘치느님’이라고 부른다. 치킨과 할렐루야를 합쳐서 ‘치렐루야’라고 부른다. 물론 재미로 애교로 봐줄 수 있다고 하지만 정말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두려움, 경외심이 있을까?
- 2) ‘거짓된, 속임수의’라는 뜻이 있다. 이게 더 심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3가지가 있는데 거짓 맹세, 거짓 경배, 거짓 예언이다. 먼저, 거짓 맹세다. 레위기 19:12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맹세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자신이 지킬 의도가 없는 헛된 약속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절대 그런 일은 없어.’ 이런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못 지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신약에 가면 예수님은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마태복음 5:34-35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7절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헛된 맹세는 악에서 나온다.
- 또한 거짓 경배가 있다. 이사야 1:13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여기서 ‘헛된’이 바로 ‘샤웨’다. 이스라엘이 마음에도 없으면서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기신다고 말한다. 우상은 예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했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예물보다 우리 자신이 먼저 받으실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신다.
- 마지막으로 거짓 예언이 있다. 에스겔 13:7에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여기서 ‘허탄한’이 바로 ‘샤웨’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받은 계시의 말씀이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거짓으로 예언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은 정말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정말 하나님께서 성령의 음성으로 말씀하신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가짜다. 기도원에 가면 이런 사람들 많다. 더욱 심한 경우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어떤 남자 청년이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저보고 당신하고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나쁜 X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파는 것 아닌가? 10절에도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평강이 전혀 없는데 평강이 있다고 말한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든다. 정말 목회자로서 성도들에게 수술용 매스를 대야 하는 상황에 빨간 약 발라주면서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
-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경박스럽게 부르지 않고 거짓 맹세, 거짓 경배, 거짓 예언만 하지 않으면 이 계명을 잘 지킨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 셋째 계명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우리가 저주나 거짓 맹세, 또는 불필요한 서약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잘못 사용하지 않는 것이며, 더 나아가 침묵하는 방관자가 되어 그러한 두려운 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만 사용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하고 부르며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에서 그분이 영광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이 문답의 앞부분은 앞에서 나눈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 혹은 오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뒷부분은 좀 더 적극적으로 계명을 순종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한다.
-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 두 가지로 말씀드리려고 한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이다. 출애굽기 34:5-8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모세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하심을 경험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을 선포하실 때 모세는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이런 진실한 경외심이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무겁게 여기는가? 그렇다면 절대로 그분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만’ 사용할 것이다. 여기서부터 진정한 예배가 시작된다.
- 시편 2:11에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는 것,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섬기고 떠는 것이 어떻게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리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즐거운 일이다.
- 요즘 온라인 예배를 계속 시행하고 있는데 드리고 싶은 말이 많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적인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제 시간에 예배를 드리지 않는 분들도 꽤 계시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로 예배드리는지 잘 모르겠다.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대충 아니면 아예 안 드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누구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 어느 교회에서 예배에 대해 세 가지 지침을 제시했는데 저도 그대로 가져왔다. “시간: 예배 시작부터 참여하며 지각하지 않습니다. 복장: 예배 의식에 맞는 단정한 복장으로 예배드립니다. 태도: 예배 중에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며 바른 자세로 예배드립니다.” 주일학교에서나 가르칠 법한 것인데 모든 성도들에게 가르친다. 온라인 예배나 현장 예배 모두 적용되는 내용이다. 다음 주일부터 일부 현장예배가 재개되는데 이제까지 무너진 부분이 있다면 다시 세워야 하지 않을까?
- 그렇다면 둘째, 우리의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다. 역대하 7:14에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다. 무슨 뜻일까? 저는 이렇게 이해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실 수도, 더럽힘을 받을 수도 있다. 에스겔 36:20에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해 더러워졌다. 송성진 박사가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은 신학적 사실로서 항상 변함없이 거룩하시지마는 그러나 인생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합당하게 모시지도 않고 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 때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마치 훼손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불변적인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죄된 인생들에 의해서 실존적으로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무시되는 상황이다.” 이런 것과 같다. 지금은 성인이 되었지만 어릴 때 우리가 잘못하면 누가 욕을 먹었나? 제가 남의 집 장독대를 깨면 우리 부모님이 욕을 먹는다. 오히려 부모님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배상한다.
- 저는 이번 코로나 기간 동안에 많은 교회들이 욕을 먹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 교회의 명예만 실추시키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 전체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방역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교회에서 확진자가 폭증하게 된 책임도 굉장히 무겁다. 얼마 전에 어느 교회는 지역 전체가 집합금지였는데 자기 교회만 몰래 불 끄고 예배드리다 적발되었다고 한다. 너무 부끄러웠다. 차라리 그냥 불 켜고 당당하게 드리다가 과태료를 내는 게 더 낫지 않나? 사람한테도 당당하지 않는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겠나?
- 어떤 일이 있어도 더 이상 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 우리의 부주의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어디 가서 구제나 선교하는 것보다 이게 더 중요하다. 교회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그게 교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이다. 나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사는 존재인가? 오늘 부른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명예 지켜가며 깊어진 삶을 주께 드리네.” 저는 단지 우리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